히로미는 쓴웃음을 지었다.
"그렇지만 처음에 내가 하소연했을 때, 선생님은 믿었죠?"
"으응"
이라부는 거침없이 고개를 가로 저었다.
"한눈에 피해망상이란 걸 알았어.
그렇지만 그런 병은 부정 한다고 낫는 게 아냐.
긍정하는 데서 치료를 시작하는 거야.
잠을 못 자는 사람에게 무조건 자라고 해서 될 일이 아니지.
잠이 안 오면 그냥 깨어 있으라고 해야 환자는 마음을 놓게 되지.
그래야 결국 잠이 오게 돼. 그거랑 똑같아."
히로미는 이라부를 빤히 바라보았다.
혹시 이 사람, 천하의 명의?-67쪽
문득, 가슴에 걸린 '의학박사'라는 명찰에 눈길이 갔다.
이 나라의 박사 학위는 대체 어떻게 된 거야. 속으로 그렇게 중얼거렸다.
이라부는 데츠야가 여태 만나 보지 못한 괴짜 중의 괴짜였다.
그에게는 고뇌라는 게 없는 것 같았다.
욕망이 일어나는 대로 행동하고, 소란을 떨고, 웃는 사람임에 분명했다.
다섯 살배기아이가 고뇌하지 않는 것처럼.
그러나 부럽기도 했다.
적어도 이 남자는 자신처럼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구질구질하게 굴지는 않는다.
아무래도 그도 아내에게 버림받은 것 같다.
자신과 똑같은 지경에 처해 있는 것이다.
그런데 왜 결과는 이렇게 다른가.-89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