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비를 피할 때는 미끄럼틀 아래서 ㅣ 보림문학선 4
오카다 준 지음, 박종진 옮김, 이세 히데코 그림 / 보림 / 2006년 11월
평점 :
품절
커다란 콘크리트 미끄럼틀 아래의 동굴 같은 공간, 세찬 소나기가 커튼인양 장막이 되어 바깥세상과 분리시켜 주면서도 이어주는 공간, 비밀 이야기를 나누기에는 완벽한 장소인 것 같다. 간결한 선이 돋보이는 수채화 표지가 이러한 느낌을 잘 살려주어 처음부터 가슴 두근거리면서 읽기 시작했다.
잠깐 삽화에 대해서 짚고 넘어가자면, 이 책은 표지뿐만 아니라 곳곳에 들어있는 삽화가 상황의 분위기나 아이들의 마음 상태를 너무나 잘 잡아내고 있어서 볼수록 마음에 든다.
다시 이야기로 돌아가서, 그 은밀함이 묻어나는 공간에서 아이들이 하나씩 풀어나가는 이야기는 남들은 이해하지 못할 것이라는 생각에서 마음속에 고이고이 묻어둔 소중한 추억들이다. 집안에 해변이 펼쳐지고, 종이비행기를 타고 하늘을 날고, 메기가 말을 하고, 나비가 사람의 형상으로 나타나기도 하는 일들은 누가 들어도 쉽사리 믿어줄 것 같지 않은 이야기들이다. 정말 있었을까, 꿈은 아니었을까 하고 본인조차 의구심을 품게 만드는 일들이지만, 하나같이 힘들어할 때 마음을 다독여 준 소중한 추억들이다. 이러한 추억들이 나만의 추억이 아닌 우리들의 추억이 되어 서로를 묶어주고 유대감을 형성하는 미끄럼틀 아래의 공간은 아이들에게 또 하나의 추억의 공간으로 남을 것이다. 기억 하나가 평생을 따라 다니며 힘들게도 하고 힘이 되기도 한다. 자신에게 힘이 되어줄 추억과 그 추억을 나눈 친구들을 두게 된 아이들이 마냥 부럽기만 했다.
그리고 신비로운 아저씨 아마모리씨, 스스로가 무척이나 외로운 사람인 것 같다. 그래서 아이들의 외로움에 그토록 민감하지 않았을까 싶고... 아이들을 미끄럼틀 아래 모이도록 한 소나기는 아파트를 떠나 이사 가는 아마모리씨의 작별 선물임이 틀림다. 아이들이 추억을 서로 나눔으로써 서로가 이어져 있다는 느낌을 가지게 되어, 아저씨가 곁에 없더라도 서로가 서로에게 힘이 되어줄 수 있도록 아이들을 묶어주는 만남의 장을 마련해준 것이다. 그리고는 결국 한명씩 보듬어주었던 아이들을 통해 자신도 마음 따뜻한 작별의 선물을 받고 소중한 추억을 갖게 된 것이다.
책속에 묘사된 일들이 모두 환상적인 일이기는 하지만 워낙 평범한 일상 속에서 일어난 일들인지라 어느 한 순간 나에게도 일어날 수 있을 것이란 생각마저 들어 책을 덮으면서 마음이 설레었다.
전체적인 줄거리 외에도 아이들이 다니는 학교가 참 괜찮은 학교라는 생각이 들었다. 같은 동네 아이들끼리 함께 등교를 하도록 하고, 그리고 그런 아이들과 함께 놀기라는 정말 괜찮은 방학숙제까지 주는 학교라니... 부럽기조차 했다.
이 책이 어린이들만을 위한 책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오히려 어른들이 읽으면 더 좋을 것 같다. 사는 게 메마르고 답답하다 느낄 때 읽으면 마음에 소나기를 뿌려서 촉촉하게 적셔줄 책이다. 자신이 꽉 막힌 틀 속에 잡혀있다는 느낌이 들 때 읽으면 마음에 여백의 공간을 만들어 숨통을 트여줄 그런 책이다. 그래서 이 책을 읽은 순간이 나에게는 아이들이 느꼈던 마법 같은 순간이었던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