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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의 배신 - '긍정의 배신' 바버라 에런라이크의 워킹 푸어 생존기 ㅣ 바버라 에런라이크의 배신 시리즈
바버라 에런라이크 지음, 최희봉 옮김 / 부키 / 2012년 6월
평점 :
누구나 한번쯤은 일기를 써 보았을 테다. 개학을 앞두고 한달치 일기를 이리저리 지어내던 시절이 지나고, 일기가 자신의 인생에 중심을 잡아주는 역할을 하기도 한다는 걸 깨닫는 사람은 기록되는 삶의 뜨거움을 새삼 느낄 수 있을 테다. 하루의 날씨나 그날 먹었던 음식을 끼적이며 매일 반복되는 일상에 조금이라도 색을 입혀보기도 하고, 새롭게 만난 사람에 대한 느낌을 한 글자 한 글자 옮겨 적으며 앞으로 펼쳐질 인연의 달콤함을 기대해보기도 한다. 이렇게 기록한 그날그날의 역사는 '나'를 중심으로 한 세상 이야기가 된다. 세상 모든 것이 나 없이도 아주 잘 돌아가는 것 같은 허무함에 빠지다가도 일기장을 펴 든 그 순간만큼은 내가 멋진 주인공이 되어보는 사치를 누리는 것이다. 소소한 기록의 기쁨은 느껴본 사람만이 알 것이다.
자신에 대한 이야기를 기록하는 것. 여기에서 한발 더 나간 사람은 '타인의 방'을 기록하는 사람이다. 내가 아닌 '너'를 나의 삶보다 더 자세히 기록하는 사람. 타인의 삶을 기록함으로써 세상이 좀더 살기 좋은 곳으로 거듭나리란 일말의 희망을 갖는 것. 그 희망에 내 삶을 기꺼이 바치는 사람. 그 예가 바로 이 책의 저자 바버라 에런라이크다. 저널리스트인 그녀는 최저생계비에도 미치지 못하는 돈을 받으면서 고된 노동 환경에 내던져진 사람들의 이야기를 생생하게 이 책에 기록했다. 그 방법은 간단히 말해, 그녀가 곧 그들이 되는 것이었다.
<노동의 배신>은 그녀가 스스로 말하듯이 "내가 써 내는 글이 생계를 보장해 주는 상황에 매우 감사한" 상황에서 "저임금 노동자들이 생활하고 거의 평생 살아가는 그 세계를" 잠시 방문하여 기록한 장편의 일기이다. 물론 '일기'라고 한 것은 서평을 쓰는 입장에서 이해하기 쉽도록 붙여본 이름이고, 읽는 사람에 따라 이 기록물은 '르포기사', '에세이', '노동일지' 등으로 다양하게 다가갈 수 있을 것이다. 그녀는 실험을 하기 전부터 자신이 빈곤을 '경험'하거나 장기간 저임금 노동자로 일하는 기분을 진짜 느낄 수는 없으리란 것을 알고 있었다. 다만 진짜 가난한 사람들이 매일매일의 삶에서 수입과 지출을 맞출 수 있는지 시험해 보겠다는 아주 간단명료한 목표를 가지고 시작한 시도였다. 그녀는 자신이 글을 쓰는 직업을 갖게 된 것은 온몸으로 고생하며 살았던 자신의 조상에게 단단히 빚을 지고 있다는 사실을 여러번 언급하고 있을만큼 현실을 명확히 인지하고 있었다. "빈곤은 공포와 너무나 비슷한 냄새를 풍긴다"는 것을 그녀는 못 박으며 자신이 장난스레 이 도전을 하게 된 것이 아님을 선언한다.
요즘처럼 개인화되어 가는 세상에서 '이타주의' 같은 낯선 단어를 떠올리며 혹시 그녀가 지독한 차카니즘에 빠진 것은 아닐까, 하는 의심을 품는 사람도 있겠다. 하지만, 우리 주위에는 은근히 타인을 자신의 삶에 아로새기며 사는 사람이 많다. 한국의 언론을 통에서도 그녀가 이 책에서 꾸려가는 것과 비슷한 방식으로 기자가 직접 현장에 몰래 뛰어들어 장기간 타인의 삶을 체험하며 쓴 탐사보도 기사가 있다. <한겨레21>에서 썼던 '노동OTL'이 있었고, <단비뉴스www.danbinews.com>에서 연재했던 '한국인의 5대 불안'도 떠오른다. <노동의 배신>을 포함하여 이러한 글들이 갖는 힘은 그렇게 크지 않다. 물론 조그만 물방울들이 모여 큰 바위를 뚫을 수도 있겠지만, 이 글을 쓰는 사람들이 현실에서 만나는 사람들에게 안타까움과 먹먹함을 가지고 세상이 꼭 바뀌었으면 좋겠다고 소원하는 갈망은 늘 현실의 벽 앞에서 무너지기 일쑤다. 그러니 어쩌면 글을 읽는 독자는 더더욱 마음을 느슨하게 하고 텍스트를 접해야 할 것이다. '지금 당장 바뀔 수는 없지. 하지만 시간을 가지면 돼. 포기하지 않으면 조금씩 나아질거야'라는 다짐을 하면서 접할 때, 도무지 말도 안 되는 세상 일들에 거리를 두고 객관적으로 해결책을 포착할 수 있으리라고 믿는다.
어떤 사건을 3자의 입장에서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 직접 체험하는 방식으로 밀착 취재하고 디테일하게 현장을 기록한 글은 감정이입하기가 쉽다. 어느새 글 속에 빨려들어가 있곤 한다. 때론 무릎을 탁 치며, 어느 때는 말도 안 되게 슬픈 상황에 헛웃음을 웃으며 찔끔 눈물을 흘린다. 어렵게 사는 사람들을 '글쟁이'들이 돌보아 줄 정도로 아직 세상은 따뜻하다는 데 나름 위안을 느끼기도 한다. 특히 <노동의 배신>처럼 여러번의 시도를 철저한 계획 하에 진행하며 직접 몸으로 뛰고 몸으로 꾹꾹 눌러쓴 바버라 에런라이크 같은 작가를 만날 때면 '글쟁이'를 넘어선 '글장이'가 바로 이런 사람이구나를 알게 된다. 책상머리에 앉아서 키보드나 두드리는 나같은 사람에게 '펜이 칼보다 강하다'는 것을 다른 차원의 가능성으로 증명해 주고 있는 것이다.
그녀의 글쓰기 방식은 애절하거나 절절한 뜨거움이 아니다. 오히려 쿨하다. 가난한 사람들을 '끈적끈적하고 눅눅한 불쌍함'으로 묘사하지 않고, 마치 오늘은 화려한 파티복보다는 간단한 일상복을 입어본다는 마음으로 가볍게 다가간다. 그가 자신이 놓인 상황을 표현했을 때, 우리는 정극을 본다는 느낌보다는 오히려 시트콤을 본다는 생각이 더 들 것이다. 그만큼 그의 필체는 위트 있고 개성 있는 방식으로 노동자들이 처한 현실을 담담하게 전달하는데 최우선을 두었다. 하지만, 왜일까. 오히려 그런 방식이 읽는 사람으로 하여금 부담 없이 '타인의 방'을 들여다보게 하며, 끝내는 그들의 삶이 마치 내 삶이라도 된 것처럼 현실의 모순들을 바꾸고 싶은 열망을 일으키게 만든다. 그녀는 정말이지 재주가 있다. 이를테면 이런 것이다.
어쩌면 '서비스 업계' 전체에 고차원적인 아가페가 실천되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방을 구하러 다닐 때 어떤 아파트 벽에 붙어 있던 포스터를 본 게 생각났다. "당신 혼자 행복해지고자 한다면 행복은 찾을 수 없을 것이다. 남을 행복하게 해 주려고 할 때만 당신은 행복을 찾을 수 있다." 뭐 이 비슷한 말이었던 것 같은데, 베스트 웨스턴 호텔의 벨보이가 사는 방 한 개짜리 축축한 지하 아파트에서 볼 법한 포스터는 아니라고 느꼈다. - 본문 中
그녀는 힘을 가지고 있는 부유한 이들은(아니 부유한 이들까지도 아니다. 하루하루 살아가는 것이 경제적으로 그렇게 못 버틸만한 것은 아닐 중산층) '교과서적'이라고 느낄 법한 착한 발언들을 이런 식으로 재치있게 살금살금 책 속에 넣어둔 것이다. 물론 그녀도 중산층이기에 어쩌면 그녀가 느낀 모든 것들을 자연스럽게 옮긴 것만으로도 그런 효과를 내고 있기도 하다. 그러니 우리가 주목할 것은 그녀가 이 행동을 실제로 저질렀다는 것이다. 그녀는 이 경험으로 너무나 많은 것을 알게 된다. 가난한 사람들만 아는 절약법이란 존재하지 않으며(오히려 가난하기 때문에 추가로 드는 비용이 수두룩하다), 노동력의 공급이 수요보다 적다면 받는 돈이 상승해야 함에도 새로운 수요 공급 법칙에서는 급여가 너무 낮아서 노동자가 최대한 일자리를 많이 구하도록 놓인 씁쓸한 상황을 맛본다. 용역 청소부를 하면서 1시간당 회사는 25달러를 받는데, 6.65달러를 겨우 받으면서도 다리가 꺾이고 피부병이 온몸에 퍼져도 일을 멈출 수 없는 노동의 배신을 눈물로 배운다.
내가 연기하고 있는 역할에 충실하려면 일을 마치고 나서 응급실을 찾아가 무료 치료를 받든지 했어야 마땅하다. 그러나 너무 괴로웠다. 밤사이에 가려움증이 너무 심해져 거의 발작하는 수준이 되었다. 긁고 싶고 소리 지르고 싶은 걸 참느라 팔을 허우적대고 발을 쾅쾅 구르다가 결국 내가 원래의 삶에서 속한 사회 계층의 네트워크를 이용해 키웨스트에 사는 아는 피부과 의사에게 전화를 걸어 생떼를 써서는 환자를 보지 않고 주는 처방을 받아 냈다. 피부 문제로 인해 가려움증에 바르는 연고, 부신 피질 호르몬 알약, 부신 피질 호르몬 연고, 그리고 밤에 잠을 잘 수 있게 복용할 알레르기 약까지 사느라 총 30달러가 들어갔다. - 본문 中
그녀는 참지 못할 상황에서는 이렇듯 끝까지 참지 않는다. 그녀는 자신이 속한 그들보다 우월한 계층에서 사람답게 살기 위해 떼를 쓰는 방법을 알고 있고, 그것을 누릴 수 있는 여력이 된다. 그것을 완전히 회피하지 않고, 적절히 이 글을 쓰는데 섞어냄으로써 이 책에서 보여주고자 하는 현실의 아픔이 더 아리게 다가오는 것이다. 그녀의 말대로 그 세계는 '통증'이 지배하고 있었다. 그녀는 또 말한다.
하지만 연극배우가 된 듯이 느껴졌던 그 순간에도 나는 자신을 억압된 노동자 계급의 일원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내가 시간이 지나도 지치지 않고 일을 할 수 있었던 것은 수십 년 동안 평균 이상의 의료 혜택을 받고, 고단백의 영양 섭취를 하고, 1년에 400~500달러씩 내고 헬스클럽에서 운동을 계속해 왔기 때문이다. 내가 생산성 좋은 가짜 노동자 노릇을 할 수 있었던 것은 오로지 지금까지 몸을 망가뜨릴 정도로 장기간 힘든 육체노동을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 본문 中
책장을 넘기면 넘길수록 그녀는 단순히 그들의 삶을 조명하는데 멈추지 않고, 자신의 삶을 포함한 대다수의 사람들의 삶까지도 총체적으로 묶어냄으로써 독자들이 어떤 방식으로 이 책을 읽어줄 것인가를 함께 치열하게 고민해 준다. 우리는 누군가를 우리도 모르게 이 사회에서 왕따시키고 있는 것은 아닐까? 우리의 웃음이 누군가의 눈물을 먹고 자라는 것을 아는가? 끊임없이 뼈 아픈 질문을 던지며 그녀는 답안을 제시해 본다. 노동자의 일은 사회에서 '왕따'로 전락하지 않도록 구원해주는 것이며, 일반적으로 저임금 노동 자체가 노동자 스스로를 천민처럼 느끼게 만드는지도 모른다고. 시트톰이나 드라마의 주인공은 모두 패션 디자이너나 학교 선생님, 변호사들이라고. 노동자가 회사의 시간에 화장실을 가는 것 조차도 자유로운 것이 될 수 없는 '시간 절도'의 영역에 머물 때, 회사가 그들의 시간을 훔치는 것은 문제가 되지 않는 상황까지도 말이다.
읽어보라. "늘 계획을 세우거나 계획까지는 아니더라도 해야 할 일의 목록 정도는 미리 작성해 놓아야 안심이 되는" 당신이라면," 일어날 가능성이 있는 모든 일에 대처해야 할 방법을 미리 생각하고, 우리의 인생도 어떤 의미에서는 한 번 살아본 것처럼 안전하게 살 수 있기를 희망하는" 당신이라면, 지금 읽어보라. 그들도 당신이 꿈꾸는 것을 꿈꾸지만, 그 꿈이 얼마나 많은 눈물과 땀으로 빚어졌는지를. 그리고 우리에게 이루는 것이 꿈이라면, 그들에겐 그것이 꿈꾸는 것임을. 왜 그들이 그럴 수밖에 없는지를 함께 공유해봤으면 한다. 누군가 진정으로 이러한 글을 읽을 때, 바위를 뚫을 수 있을 것이다. 조금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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