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부터 내가 하는 말을 당신은 믿을 수 없겠지만
마르크 레비 지음, 김운비 옮김 / 북하우스 / 2001년 7월
평점 :
절판


아주 슬픈 시를 읽고싶다. 아주 슬픈 영화를 보고싶다. 아주 슬픈 음악을 듣고싶다. 그리고, 아주 슬픈, 그런 사람을 만나고 싶다. 내 안의 수분이 모두 말라버릴 정도로 오랜 시간 정성 들여 울고 나면 잘 마른 낙엽처럼 그렇게 거리를 걸어도 좋으리라.

서늘하다. 키 큰 나무들이 맥없이 허우적거리고 사람의 집들이 벌겋게 상기된 채 언덕 높이 가득하다. 책상등 하나 켜놓고 모니터의 푸른빛을 응시하는 일은 즐겁다. 일체의 소음이 배제된 그런 적막과 함께라면 더 좋다. 어떤 적막은 부재와 동의어이며, 다른 어떤 것은 간혹 공감으로 풍요롭다는 말을 찾아낸다. 뭉툭한 연필로 구부정하게 밑줄을 긋는다. 지금 내 곁에 누운 적막이 비록 짓무른 안정에서 비롯된 것이라 할 지라도 모처럼의 적막에 위안을 얻는다. 가을이, 뽀얀 속살 드러낸 채 침상으로 파고드는 느낌.

<지금부터 내가 하는 말을 당신은 믿을 수 없겠지만>, 마르크 레비의 장편소설이다. 기존의 프랑스 소설에서 느껴지던 애매모호하고 지루하고 관념적인 서술은 찾아볼 수 없다. 대신 온갖 리뷰들이 언급한 대로 코미디와 멜로로 가득한 서사가 모포처럼 따뜻한 소설이다. 소설이 출판되기도 전에 드림웍스와 영화 제작 계약을 맺기도 했다니 출판사인 로베르 라퐁사의 상술의 전략이 얼마나 치밀했던가 알고도 남음이다.

줄거리는 간단하다. 교통사고로 코마에 빠진 로렌과, 살아있는 육체에서 빠져나온 로렌의 유령, 그리고 그런 로렌을 지상에서 유일하게 보고 듣고 느낄 수 있는 남자, 아담의 이야기다. 설정 자체에서 빤히 들여다보이듯 아담은 로렌으로 인해 여러 우여곡절을 겪는다. 둘의 로맨스가 싹트겠구나 하는 짐작 또한 빤하다. 빤하다는 말이 이 소설에 대한 폄하를 의미하는 건 아니다. 이 소설을 읽으며 내내 감탄한다. 작가의 전문 분야가 건축이고 자신의 아들이 어른이 되어서도 읽을 수 있는 긴 이야기를 쓰고자 소설을 창작했다는 점을 들면 더 그렇다. 이야기 속에 나오는 작가의 의학상식은 놀랄만하다. 소설 준비 과정이 얼마나 치밀하고 촘촘했던가, 혀를 내두를 따름이다. 허투로 소설 쓰자고 덤비는 일 따위 무 자르듯 해야겠구나 하는 새삼스런 다짐까지 할 지경이다. 생을 바라보는 시선도 따뜻하다. 아버지가 아들에게 전하는 이야기여서 그런지 생에 대한 응대의 방식 또한 긍정적이고 겸허하다. 투덜이 스머프처럼 삶은 내게만 가혹하고 냉담하며 야박하다는 식의 불만만 늘어놓는 나 같은 인간에게 있어선 반성의 시간이 되기도 한다. 이를 테면 이런 구절들.

- 이봐, 누구도 행복의 집주인은 아냐. 간간이 임대계약을 하고 세입자가 되는 행운을 잡을 따름이지. 아주 착실하게 셋돈을 치러야 한다구. 아니면 곧바로 쫓겨나는 거야.

- 그는 따지 않은 열매에 대해 이야기했다. 땅바닥에서 썩어가도록 내버려둔 열매들에 대해서. '소홀함으로, 습관으로, 확신이나 자만심으로 인해 결코 소비되지 않을 행복의 즙액'에 대해서.

- 행동해! 회의에 빠지지 말고. 제 자신의 선택을 밀고 나가지 못하면 어느 구석에선가 삶에 대한 혐오가 생겨나는 거야.

- 삶은 경이롭지. 이런, 사람이 그걸 알아차리는 때는 삶이 벌써 살금살금 발끝으로 물러나고 있는 때지.

- 삶에 동행하는 의혹과 선택은 우리 감정의 현들을 떨게 하는 두 힘이다. 오직 그 떨림의 조화가 중요하다는 점을 기억해라.


어둠이 윤기 반지르르해지는 시간이다. 어둠은 빛 속에서 밝아진다. 사랑이 이별로 밝아지는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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