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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영희 프리즘 - 우리 시대의 교양
고병권.천정환.김동춘.이찬수.오길영.이대근.안수찬.은수미.한윤형.김현진 지음 / 사계절 / 201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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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이고 조사를 만나면 조사를 죽여라"
- <임제록>
 

지난 3월 11일, 법정 스님이 입적하셨다. 소유하려는 집착에서 벗어나 욕심을 내려놓을 때 진정한 자유를 얻을 수 있다는 ‘무소유의 역리(逆理)’를 몸소 실천하셨다. 가질수록 행복하다는 착각 속에서 살고 있는 세인(世人)으로서 참 쉽지 않은 가르침이다. 인생을 살아가면서 힘겹게 깨치는 진실은, 마음에 깊이 새기는 말들은 늘 역설(逆說)을 품고 있다는 것. 버려야 얻고 잃어야 알며 앓아야 깨닫는다.

 

밥도 허겁지겁 먹고 잠도 자는 둥 마는 둥 자면서까지 남보다 앞서려고 기를 쓰며 사는 우리들. 연봉과 지위를 자기의 참모습으로 여기며 나보다 못하면 깔보고 나보다 잘나면 굽실댄다. 속물이 되어버린 자신을 결코 인정하지 않은 채 누군가 자신의 흠을 지적하기라도 하면 ‘그래, 너 잘났다 잘났어’라고 속으로 악다구니를 부린다. 살수록 마음에 때를 묻히고 또 묻힌다. 마음은 거울과 같아서 닦고 또 닦지 않으면 때가 켜켜이 쌓인다. 그러니 늘 깨어 있으려면 닦고 또 닦을 수밖에 없다.

 

리영희는 가르치기보다는 가리킨 스승이다. 우리는 이건 이렇다 저건 저렇다며 딱 꼬집어 말해야 알아듣는다.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만 보고 달은 좀체 보지 않는다. 그래서 “사랑을 가르치는 시대는 슬프고 / 사랑을 가르칠 수 있다고 믿는 / 믿음의 시대는 슬프다”(정호승, <洗足式을 위하여> 중에서). 한평생 우상과 싸우면서 한쪽 면만 바라보았던 우리들에게 다른 쪽도 있다고 일러주었다. 우상을 만들어야 직성이 풀리는 듯 우상을 숭배하는, 아둔한 우리들. 돈을 우상으로 만들어 물신(物神)으로 숭배하는 우리들. 돈이면 다 된다며 관직도 자격증도 학위도 사고판다. 그런 우리들이 리영희를 만나면 죽비로 사정없이 얻어맞는다. 정작 당신은 내리친 적이 없다 하겠지만 들리지 않는 죽비 소리 덕에 우리도 잠에서 깰 수 있었다.

 

지난 20세기는 전쟁과 살육의 시대가 아닐까. 그 후유증이 아직도 채 가시지 않은 분단의 오늘을 살고 있지 않은가. 여전히 냉전체제를 공고히 하며 기득권을 유지하는 데 골몰하고 있진 않은가. 이렇게 사유하도록 일깨웠기에 리영희는 ‘항법사’다. 역사의 세찬 물결에 휩쓸리면 우리가 어디쯤 가고 있는지, 어디를 향해 가고 있는지 길을 잃게 마련이다. 표류하는 줄도 모른 채 잘 가고 있다고 걱정하지 말라고 일러주는 사람들 속에서 어디를 어떻게 가야하는지 몸소 보여 주었으니 항법사가 아닌가. “전쟁은 본디 ‘제국’의 프로젝트이며, 제국의 중요한 정책”(60쪽)이기에 제국은 제 시장을 넓히려고 전쟁을 고귀한 명분으로 미화한다. 또 신자유주의는 무한경쟁을 부추기며, 실력만 있으면 누구든지 성공한다며 달콤하게 유혹한다. 그렇게 성공해서 살아남아야 행복하다고, 그러니 처세의 달인이 되라고. 혹 누군가 이런 말은 웃기는 소리라고 비판하면 억울하면 출세하란다. 정작 남을 짓밟고 남의 것을 빼앗으며 제 뱃속만 채우고 있는데 말이다. 우리 마음 안에도 제국이 도사리고 있다. 은근하게, 음흉하게, 음산하게.

 

전쟁의 참화 속에서도, 서슬 퍼런 독재의 칼날 앞에서도, 출세와 성공을 의뭉스레 권하는 사회에서도, 당당히 맞서며 시대의 오류를 용기있게 비판했던 리영희. “대학 진학률은 OECD 국가 중에서도 가장 높은 86% 수준”(198쪽)이라지만 지식인다운 지식인은 사라져만 간다. ‘스펙’ 쌓기에 골몰하여 사유의 의무를 내팽개쳐 버린 지식인을 양산하는 사회는 불행하다. 치열한 성찰마저 도구가 되고 상품이 돼버린 세상에서 리영희의 이름을 잊어가는 시대는 슬프다. 아니 리영희마저 우상으로 만드는 시대가 더 서글프다. 희망마저 저당 잡혀 허덕이는 삶이 아니던가. 비관하고 절망하는 우리에게 리영희는 “반드시 변혁은 와요. 우리 사회에도 옵니다. … 바로 이것이 역사이고, 역사의 변증법입니다.”(218쪽)라며 다시금 죽비를 내리친다. 딱.딱.딱!

 

팔순의 병약한 노구(老軀)를 이끌고서도 변함없이 치열하게 성찰하는 리영희. 그러면서도 나의 시대는 끝났다며 이젠 가야할 때라고 역사의 뒤안길로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물러섰다. 그래서 그는 아름답다. 눈부시게 빛나지는 않지만. 화려하게 치장하지 않아서, 맨얼굴로도 스스럼없이 만날 수 있어서 아름답다. 최후의 한 목숨을 쉬는 그 날까지 자유를 꿈꾸며 늘 깨어있을 당신. 당신을 만난 건 우리에게 큰 행운이다. 간절히 바란다, 우리가 당신마저 우상으로 받들지 않기를, 우리가 힘겹다고 잠자는 척도 하지 않기를. 죽비 소리가 들린다, “생활은 간소히, 하지만 생각은 높게”(235쪽), 딱.딱.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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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적 시 읽기의 즐거움>을 읽고 리뷰를 남겨 주세요.
철학적 시 읽기의 즐거움 - 우리 시에 비친 현대 철학의 풍경
강신주 지음 / 동녘 / 201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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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경계를 가로지르며 넘나들다

강신주는 카멜레온이예요. 동물들은 천적에게서 제 몸을 지키려고 보호색을 띠며 숨죠. 그들에게 변화는 생존 본능입니다. 변화를 모색한다는 점에선 저자는 색깔을 바꾸는 동물과 같을지 모르나 틀을 깨고 새로이 길을 내며 걷는다는 점에선 다르지요. 

장자와 노자 철학을 전공한 저자는 동양철학에만 머물지 않고 서양철학과 손잡고 걷기를 주저하지 않았습니다. 우리 학계에서 금기로 여기는 ‘전공 불가침’의 묵계를 과감히 떨쳐버리고 파문을 무릅쓰며 이단의 길로 나아간 거죠. 

글쓰기 방식마저 딱딱한 문어체로 쓴 논문 형식에서 과감히 벗어나 구어체를 바탕으로 대화하듯 써 내려갑니다. 점점 삶과 멀어지는 철학을 일반인에게 쉽고 편하게 느끼도록 글쓰기 양식마저 변화를 주었습니다.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처럼’ 장자가 추구했던 자유를 생각으로만 그치지 않고 학문과 생활에도 실천하려는 의지에서 비롯됐으리라 봅니다.

 

2. 불륜이 아닌 외도?

저자가 이번에도 외도를 했네요. 시에게 철학이 데이트 신청을 했습니다. 내가 하면 사랑이지만 네가 하면 불륜이라고 천연덕스레 말하며, 은근히 불륜을 즐기며 부치기는 우리네 일상으로는 도저히 가늠하지 못할 외도인 셈입니다. 저자의 외도는 무딜 대로 무뎌진 사유 감각을 일깨우니 박수를 쳐 주어야겠지요. 

시인 21인과 철학자 21인이 서로 짝을 이루어 펼치는 이채로운 소개팅! 문창호지에 침을 묻혀가며 구멍 내어 살짝 들여다보는 재미로 설레기만 하네요. 시인들은 모두 우리와 함께 호흡했거나 호흡하고 있는 사람들이고, 철학자들은 박동환을 빼면 스무 명은 서구 현대 철학자들입니다. 시와 철학이 가슴앓이 하듯 서로에게 말을 건네고 있습니다.    

 

3. 세르파와 함께 산을 타다

험하디 험한 인문학의 양대 산맥. 발길을 좀처럼 허락하지 않는 시와 철학의 봉우리. 세르파(Sherpa)를 자청한 저자를 뒤따르니 산행이 그리 어렵지만은 않습니다. 때론 준봉(峻峯) 위에서 아찔한 현기증을 느끼기도 하고, 때론 외봉오리에 올라서서 구름을 내려다보며 시원한 바람 내음새에 흠뻑 취하기도 합니다. 

서구 현대 철학자들은 동일성의 사유라는 감옥에 갇힌 차이를 구출하려고 특공대를 파견합니다. 개념의 그늘 속에 가려진 살결과 숨결을 온전히 드러내줍니다. 우리가 스스로 자신 인생의 주인공이라고 생각해 왔지만 사실은 누군가가 만든 틀 안에서 춤추고 있었을 뿐이랍니다. 이른바 ‘구성된 주체’였다는 것이죠. 영화 <트루먼 쇼>의 트르먼처럼 말입니다. 견고하게, 은밀하게, 물신(物神)으로 자리 잡은 자본주의가 우리의 욕망을 길러낸 겁니다. 온전히 우리 자신 스스로 무언가를 욕망한다고 했다고 착각했던 거지요. 이 치명적 유혹을 쉽사리 뿌리치기는 참 힘겹습니다. 근대 민주주의 역시 헐벗은 생명을 배제하고 냉대했던 것도 ‘이성의 간계’가 빚어낸 폭력이랍니다.  

 

4. 하산 그리고 땅멀미

어느덧 하늘 끝 모를 봉우리만 오르다보니 땅이 그립습니다. 산행을 마치고 비릿한 도시 땅자락에 두 발을 내딛으니 낯설기만 합니다. 뱃사람들이 오랜 항해를 마치고 뭍에 오르면 땅멀미를 하듯이 말입니다. 

이젠 낯익고 친숙한 일상이 낯설고 어색하기만 하네요. 불쾌감마저 들 정도로 혼란스럽군요. 삶을 제대로 살아보려면 이를 견뎌내야만 한다죠. 홀로서기를 하려면 어쩔 수 없는 통과의례라네요. 앓은 만큼 성숙하겠죠. 경이로움으로 가득한 세상을 맘껏 누리겠노라고 조용히 다짐해 봅니다.    

 

5. 묻고 또 묻다!

저자가 프롤로그에 밝힌 대로 우리 철학계는 서구를 수입하는 데 급급하다보니 우리네 삶은 서구인들에 사유그물 속에 사로잡혀 있었습니다. 문명은 교류를 통해 성장해 왔음을 알지만 서구인의 일상과 다른 우리네 삶결을 살피는 데는 소홀했던 게 사실입니다. ‘바나나 콤플렉스’라나요. 우리네 피부색은 살구색이지만 생각은 하얗잖아요. 서구가 몇 세기에 걸쳐 겪었던 근대를 압축해서 따르다 보니 사유의 식민지에서 허덕인 것이죠. 귤도 회수를 건너면 탱자가 된다잖아요. 언제쯤 우리도 당당하게 우리 목소리를 낼 수 있을까요?

우리 철학계를 뒤돌아본 저자는 박동환의 철학을 조명하며 한국적 사유의 가능성을 검토했으나 서구 생태주의와 별반 다르지 않아 보입니다. 도시의 삶이 점차 확산되어 농촌의 삶을 찾기 힘든 현실에서 도시 밖을 이야기한다는 건 좀 아쉽네요. 오히려 우리말로 온전히 사유하려고 애쓴, ‘씨 사상’으로 집약되는 함석헌 선생과 다석 류영모 선생을 만나게 했다면 좋았을 텐데요. 중매를 잘 하면 술이 석 잔이고 못 하면 뺨이 석 대라잖아요. 

그리고 우충좌돌하며 폭력과 근본주의에 한바탕 싸움을 걸고 있는 김진석이 내놓은 ‘포월과 소내’의 철학도 의미가 있지 않나 싶군요. 앎과 삶의 소통을 꿈꾸며 ‘일리(一理)의 해석학’을 내세운 김영민이라는 사유가도 눈여겨보았으면 합니다.

선별한 서구 철학자들은 대개 남성이더군요. 페미니즘계에서 동일성의 사유에 사로잡힌 ‘젠더’에 균열을 내었던 주디스 버틀러와 같은 여성 철학자들과 시인 김승희, 김혜순, 김선우 등과 같은 여성 시인을 만나도록 주선했다면 좋지 않았을까 싶네요.

‘오히려 길 밖이 넓다 / 길 아닌 것이 오히려 더 넓고 넓다’고 나직이 말한 어느 시인의 시구가 귓전을 휘감습니다. 뚜벅뚜벅 길섶으로 발걸음을 옮겨봐야겠네요. 늘 가던 길만 가다보니 무기력한 나날을 벗어나지 못했나 봅니다. 사유하지 않고 일상에 휩쓸려 살았던 생활도 반성해 봅니다. 

끝으로 이 책을 읽은 당신께 묻고 싶네요. 어떤 기쁨, 어떤 자유를 좇고 계신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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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의 2 : 심장에 남는 사람 명의 2
EBS 명의 제작팀 엮음 / 달 / 201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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_ 인간, 무병장수를 꿈꾸다

아프지 않고 건강하게 오래 살려는 꿈, 즉 ‘무병장수’의 꿈은 인간이 꿈꾸던, 오래된 꿈이었다. 정작 일상에서 제 몸 하나 돌보지 않은 채 생활한다. 그러다가 건강을 잃고선 지나온 삶의 습관을 되돌아보며 후회한다. 낡은 습관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점을 깨우치고도 일상으로 돌아와서는 몸이 보내는 경고는 관심을 두지 않는다. 우리는 잃어봐서 알고 앓아봐서 얻는 인생을 살고 있는 것이다. 어찌 보면 인간은 생로병사의 고통 속에서 좀처럼 벗어날 수 없을지 모른다. 고통이 있기에 기쁨도 알 수 있다는 역설(逆說)이 늘 무겁게 어깨를 짓누른다.   

 

 

_ 명의는 무엇으로 사는가

『명의2』는 EBS 메디컬 다큐멘터리에서 조명한 130여명 의사들 중에서 엄선한 명의 17인이 펼치는 의료 현장 모습과 그들의 애환을 다룬다. 인체 각 장기가 하는 기능, 장기별 질병과 그에 따른 치료술 등을 본문에서 간략하게 설명하거나 각주로 처리한다. 각 장이 끝나면 사진 자료와 함께 소개하여 의학에 익숙하지 않은 독자에게 친절한 길잡이 정보도 가득하다.

병원 수술방까지 넘나들면서 집필진은 명의들이 펼치는 의술을 눈으로 보듯 전해준다. 마치 눈으로 현장을 목격하듯 읽어내려 가면서 17인의 명의들에게서 몇 가지 공통점을 찾을 수 있었다. 먼저 의사 자신과 그 가족보다는 오로지 아픈 사람들에게 쏟는 그들의 ‘애정과 열정’을 들 수 있다. 또한 남들이 가지 않는 길을 걷고 때론 비난마저 감수하며 묵묵히 환자들에게 새로운 삶을 찾아주려는 ‘노력과 집념’도 빠트릴 수 없다. 마지막으로 명의라는 칭찬에 쑥스러워하는 ‘겸손’을 엿볼 수 있다. 한마디로 말해서 이들은 모두 의술을 넘어 인술을 펴는 사람들인 것이다.

명의들이 보여준 인술뿐만 아니라 생명의 경이감도 생생하게 느낄 수 있다. ‘우리가 평소 생각하지 못하고 있지만 그만큼 우리 신체는 면역체계가 잘 보호하고 있다’(352쪽)는 점이나 ‘아기들은 살아보려고 안간힘을 씁니다. 비밀은 바로 그 힘’(385쪽)이라는 말 속에서 살려는 노력을 포기하지 않는, 말 그대로 생명, 그 생명이 보여주는 경이로운 모습에 숙연해진다.  

 

 

_ 건강한 삶을 사는 길

현대의학은 몸에 나타나는 질병은 마음과 밀접한 연관이 있다고 한다. 만병의 원인으로 지목되는 스트레스가 바로 그것이다. 일상생활에서 우리는 알게 모르게 스트레스를 겪고 산다. 적당한 스트레스는 삶의 활력소가 되기도 하지만 지나친 스트레스는 질병을 일으키는 결정적 원인이 되기도 한다. 명의들이 입을 모아 말하는 건강하게 사는 방법은 적절한 운동과 균형있는 식생활, 올바른 생활 습관이다. 

아이이든 어른이든 책상에서 오랫동안 생활하며 몸을 혹사하는 현대인들. 이미 잘못된 생활 습관이 몸에 배어 있는 줄도 모른다. 또 혀만을 즐겁게 하는 음식들이 달콤하게 유혹을 즐긴다. 그러다가 점점 건강을 잃어가는 자신을 발견한다. 그렇기에 학교에서나 가정에서도 가볍게 신나게 즐길 수 있는 ‘생활 체육’에 대한 인식을 높이고 그 저변을 확대할 필요가 있겠다. 

“1년에 한 번만이라도 산부인과에 가서 검진을 받아야 합니다. 잊어버리기 쉬우니까 생일이 들어 있는 달에 꼭 가세요”(160쪽)라고 강조하는 남주현 교수의 말처럼 산부인과에 대해 여성들이 지닌 잘못된 편견은 우리 사회가 만들어 낸 것은 아닐지 생각해봐야 한다. 결혼하지 않은 여성이 산부인과에 다니는 모습을 곱지 않게 쳐다보는 우리 사회의 시선을 하루빨리 고쳐야한다. 결혼한 남성들만이라도 아내에게 산부인과 진료예약을 생일선물로 하는 것은 어떨까. 시간이 허락된다면 아내와 산부인과에 함께 가는 것도 좋겠다. 혹시 아내가 남자 의사를 꺼려한다면 여자 의사가 진료하는 산부인과를 선택하는 센스도 필요하리라.   

 

 

_ 생명을 살리는 노력엔 경계가 없다

책을 다 읽고 난 후 아쉬운 점이 남는다. 양의만을 언급한 점이다. 한의사들 역시 의료현장에서 건강한 삶을 누리도록 온몸으로 헌신할 터인데 왜 다루지 않았나 싶다. 아직도 우리 의료계에는 양의와 한의간에 보이지 않는 알력이 있다. 중국의 경우, 양의와 한의가 협진하여 진료하는 경우가 많으며 그 치료효과도 높다고 한다. 우리도 양의와 한의가 협력하여 치료하는 사례가 없진 않지만 아직 양의와 한의 사이에 넘을 수 없는 강이 있다는 점은 부인할 수 없다. 무병장수의 꿈을 실현하려는 노력을 보인다는 점에서 두 의학 모두, 나름대로 가치가 있으며 존중받아야 하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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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빵과자유를위한정치>를 읽고 리뷰를 남겨주세요.
빵과 자유를 위한 정치 - MB를 넘어, 김대중과 노무현을 넘어
손호철 지음 / 해피스토리 / 201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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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나라 어느 고을에 존경받는 지식인이 살았다. ‘북곽 선생’이 바로 그다. 그런데 그가 그 고장에서 열녀로 추앙받지만 실은 자신의 다섯 아들이 아버지가 다른 과부 ‘동리자’와 비밀리에 사랑을 나누다가 동리자의 다섯 아들에게 들통 나는 바람에 도망친다. 도망치던 북곽 선생은 호랑이를 만난다. 밖에선 선비다운 모습을 보이지만 안에서는 부도덕한 행실을 남몰래 일삼던 북곽 선생을 호랑이는 호되게 꾸짖는다. 호랑이에게 목숨을 구걸하던 북곽 선생은 호랑이가 소리없이 떠난 줄도 모르고 머리를 조아리다가 지나가던 농부에게 발견된다. 그런 자신의 모습이 부끄럽든지 또 다시 거짓을 말하며 자신의 위신을 세우기에 급급하다. 

조선 후기 북학파 지식인 연암 박지원이 쓴「호질」이야기다. 연암은 겉과 속이 다른 지식인의 두 얼굴을 꼬집으려고 호랑이를 등장시켰을 것이다.『열하일기』에 수록된 글이니 청나라 연행 중에 들을 이야기를 기록했을 수도 있다. 중요한 점은 북곽 선생과 같은 지식인이 우리 시대에도 있다는 사실이다. 조선 시대 지식인의 본보기는 선비였다. 선비는 말대로 행동하고 행동대로 말하려고 했다. 그런 선비정신이 사라지는 현실을 연암은 꾸짖고 싶었을 것이다. 지식이 부조리한 권력을 차지하거나 행하는 도구로 전락해 버린 시대는 불행하다. 지식인은 사회 모순과 부조리와 불편한 관계를 유지하면서 그늘진 곳에 햇빛이 들도록 실천하는 사람이지 않겠나 싶다. 

선거철이 되면 으레 ‘폴리페서’, 즉 학자 특히 대학교수가 정치에 참여하는 문제로 논쟁이 재연된다. 대학교수가 후학을 지도하는 데 전념하지 않고 해바라기처럼 정치권력에 기생하는 모습이 좋지 않아 보이기 때문일 것이다. 말로는 정의를 외치지만 행동으로는 불의를 자행하는 모습이 요즘 지식인에게 자주 보인다. 목청껏 사회를 비판하던 지식인들은 다 어디에 있는가? 정녕 지식인의 죽음을 이야기하는 시대가 돼 버린 것인가. 

위기다. 정말 심각한 위기다. 대한민국에서 정치가 실종됐다. 아니 과잉됐다. 저자는 지금 우리 시대를 위기로 진단하고 ‘신자유주의적 공안국가’로 현 정부를 규정한다. 역주행하는 대한민국을 바로잡으려면 우선 민주화 운동 진영이 뼈아픈 성찰과 반성이 필요하다며 힘주어 말한다. 브레이크 없이 질주하는 신자유주의를 그대로 내버려둬서는 안 된다며 앞으로 진보정치가 나아갈 바를 제시한다. 87년 민주화의 봄을 피를 토하며 외쳤지만 다시 겨울이 찾아온 대한민국에서 어떤 정치가 이루어져야 하는지를 고민한다. 저자는 자신의 간절한 염원을 제정구 의원에 목소리에 실어 이렇게 말한다.

또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더 많은 사회과학 공부가 아니라 더 높은 상상력과 더 깊은 성실성”이며 ‘물질의 눈’, ‘물리적 힘의 눈’, ‘따로 살기, 끼리끼리 살기의 눈’에서 ‘사람의 눈’, ‘생명의 눈’, ‘함께 살기의 눈’, ‘가난의 눈’으로 돌아가자고 주장했다. 정곡을 찌른 것이다. (375쪽, 강조 : 인용자)

정치 혐오를 넘어 정치 환멸에 이른 지금. 우리는 너나없이 위로부터의 정치가 아니라 아래로부터의 정치를 꿈꾼다. 그런데 그간 정치인들에게 염증을 느낀 사람들이 국민에게 부여된 권리이며 양도할 수 없는 신성한 의무인 선거권을 포기하는 경우가 많아졌다. 또 선거철만 되면 국민들에게 머리를 조아리다가 국회의원만 되면 목에 힘을 주며 국민 위에 군림하려는 정치인들도 늘어났다. 무엇을 위한 정치보다 누구를 위한 정치를 생각해야 한다. 

경인년, 호랑이 해를 맞이하니 북곽 선생을 꾸짖던 호랑이가 더욱 그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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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의공간>를 읽고 리뷰를 남겨 주세요.
역사의 공간 - 소수성, 타자성, 외부성의 사건적 사유
이진경 지음 / 휴머니스트 / 201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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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나.

칼은 선할까 악할까? 강도가 든 칼은 남의 목숨을 위협하니 악할 테고, 요리사가 잡은 칼은 생명을 살릴 테니 선할 것이다. 그렇다면 요리사가 칼로 갑자기 손님을 협박하면 악한 칼이겠다. 강도가 집으로 돌아가 제 아이들에게 요리를 해주면 선한 칼이 될 터이다. 이렇듯 선악 판단은 두부모 자르듯 선명하게 구분할 수 없을 때가 많다. 사물이나 현상은 상황을 벗어나거나 맥락을 떠나면 의미는 새롭게 만들어진다. 무엇과 관계를 맺느냐에 따라 같은 대상도 의미가 달라지게 마련인 것이다.

- 둘.

이진경은 코뮨주의자다. 맑스주의의 한계를 절감한 그는 들뢰즈의 사유를 만나면서 그 한계를 넘어설 수 있는 힘을 찾았다. 공동성, 즉 ‘동질적인 것이 아니라 이질적인 것이 만나 함께하는 능력’(557쪽)에 바탕을 둔 새로운 공동체 ‘코뮨’에 주목한다. 이러한 그의 생각은 ‘연구공간 수유+너머’ 공동체를 ‘코뮨’의 실현으로 여기고 그의 친구들과 지금도 실험중이다. 

- 셋.

제 1부에서는 서구 근대적 역사관념과 역사의 주체, 진보의 개념을 되짚고서 동일성의 폭력을 고발하며 새로운 관점을 제시한다. 우선 서구 근대적 역사관념에 드리워진 폭력을 주목한다. 맑스주의나 실증주의 입장에서 역사를 바라보는 관점을 들여다보면서 둘 다 역사의 단일성을 추구하고 있다는 점에서 다르지 않다고 말한다. 단일하고 보편적인 역사 안에 모든 이질적인 것들을 포섭하는 ‘동질화’와 선형적 발전 단계에 따라 등급을 매겨 평가하는 ‘선형적 위계화’를 통해 근대 역사를 단일하고 목적론적인 역사를 만들어내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역사관념을 비판하며 보편사에 갇힌 복수의 시간과 리듬을 되살리려는 시도로 소수적 역사에 주목한다. 

다음으로 역사의 주체로서 소수자를 살핀다. 근대적 역사관념을 바탕으로 한 역사 속에서 억압 받는 피해자로 규정된 소수자를, 다수자의 억압에 저항하고 투쟁하는 긍정적 · 적극적 의미를 부여하며 되살려낸다. “소수적인 역사란 소수자들이 역사 속에서 올바른 가치를 인정받고 제대로 된 지위를 할당받게 만드는 양심적 역사가 아니라, ‘역사’ 속에서 역사화될 수 없는 사건을 역사로부터 돌발하게 하고 이로써 역사 안에서 다른 돌발의 지점들이 만들어지도록 촉발하는 역사”(103쪽)라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두 가지 진보의 이념, 즉 적분적 진보와 미분적 진보로 나누어 살펴본다. 진정한 진보는 지배적인 기준과 척도에서 끊임없이 벗어나며 새로움을 만드는 진보, 이미 있었던 기준과 척도에 따르는 것이 아니라 그 기준과 척도를 비판하면서, 행동하고 사유하는 진보라는 것이다.

- 넷.

제 2부에서는 서구적 근대를 우리가 어떻게 내면화했는지를 탐구한다. 1부에서 역사관념과 진보의 이념에 대한 고찰은 자연스레 우리의 근대로 시선을 돌린다. 조선 후기 <세시기>를 검토하며 제의에 담긴 소수적 움직임에 주목한다. 그런 후 20세기 초 <독립신문>과 <대한매일신보>를 들여다보면 서구 근대적 시·공간의 관념뿐만 아니라 서구 근대적 역사관념까지 어떻게 수용되었는지를 고찰한다. 1907~1908년에 서구 근대적 시·공간의식 및 역사관념을 바탕을 한 용어들이 유독 증가하는 현상에 대한 원인을 찾는 일은 ‘입증할 방법이 없다’(281쪽 각주 4)고 하면서 담론적 변화 양상에만 주목하겠다고 한다. 그러나 얼핏 ‘민족의식과 결부되어’(281쪽) 있다고 언급한 점을 미루어 볼 때, 일본 제국주의의 손아귀에 포획되어 가는 대한제국의 현실을 들여다봐야 하지 않을까. 일제라는 다수자에 저항하고 투쟁했던 소수자의 역동적 움직임, 특히 정미의병의 모습은 ‘역사적 포획’에서 벗어나려는 ‘반역사적 돌발’이라고 할 수 있진 않을까. 1907년 전후 바람 앞에 촛불 신세가 되어가는 대한제국의 현실에서 나타난 소수자의 움직임에 눈을 감는 것은 아닐지. 어찌보면 정미의병도 일제라는 다수자에 포획된 소수자로 볼 수도 있으리라. 

- 다섯.

3부에서는 우리 근현대사를 살피면서 담론 분석을 행한다. 먼저 ‘동아신질서론’에 대응하는 조선 지식인의 모습을 고찰하면서 식민지 인민이 과연 말할 수 있는 자격을 지닐 수 있는가를 논의한다. 이어서 가족계획 담론을 검토하면서 근대국가가 실행하는 생명정치학의 기술을 분석한 후 비가족적인 공동성을 바탕으로 하여 새로운 종류의 가족 공동체가 생성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코뮨주의를 말한다.

다음으로 참여정부 시절 한미 FTA와 MB정부의 실용주의를 비판한 뒤 촛불시위에서 ‘흐름으로서의 대중’이 보여준 가볍고 즐거운 혁명을, 1부에서 언급한 역사 주체로서 소수자의 본보기로 언급한다.

- 다시 하나, 그러나 다른 하나

저자의 논의는 니체, 푸코, 들뢰즈 등이 서구 근대를 의심의 눈초리로 매섭게 파헤친 ‘동일성의 폭력’에 대한 고발을 바탕으로 한다. 그리고 저자는 보편적 역사의 그늘에 가려진 소수자가 당당하게 역사의 주체가 되길 믿으며 공동성에 뿌리를 둔 공동체, ‘코뮨’을 꿈꾼다. 그러나 예찬에 가까운 목소리로 그가 말하는 소수자가 과연 그의 믿음만큼 순수하게 건강한지는 의문이다. 일상에서 소수자가 보여주는 던적스러운 모습들에는 눈감아 버리는 것은 아닌가 싶을 만큼 맹목에 가까운 듯한 낙관적 믿음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칼은 선하지 악하지 않다. 그 칼을 사용하는 우리 인간들이 어떤 마음으로 사용하는지 중요하지 않을까. 또한 자본이 지닌, 강력한 포획력에 우리들이 쉽게 벗어날 수 있을지도 의문이다.  

이렇듯 개념과 이론은 성긴 그물과 같아서 복잡다단한 현실을 담아내기엔 늘 역부족이다. 결국 문제는 실천인 것이다. 사람살이에서 실천은 참 어렵고 힘들다. 그렇다고 심각한 회의에 빠질 필요는 없다. 희망이란 던적스런 세상을 오지게 맛보는, 맵짠 인생에게 주어지는 선물일지 모른다. 차별이 아니라 차이를 존중하며 더불어 사는 지혜를 쉼없이 실천하는 사람들이 늘어날 때 우리가 꿈꾸는 세상은 이미 다가와 있지 않을까 싶다.  

끝으로 '우충좌돌'하면서 '기우뚱한 균형'을 강조하는 김진석이 최근 출간한 책『더러운 철학』에서 제기한 저자에 대한 비판은 귀 기울일 필요가 있겠다.

   
  이진경을 비롯한 노마디즘 옹호자들은 개념적 구분에만 매달리면서 ‘노마디즘’이 들뢰즈/가타리의 숙성한 사상이고 나쁜 자본과 전혀 상관이 없으며 따라서 노마디즘이 침략적 성격을 띠는 것도 자신에게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마음 편하게 말한다. 그는 노마드뿐만 아니라 ‘매끈한 공간’과 ‘외부성’이 그 자체로 순수하고 초월적인 혁명적 개념인 것처럼 말하지만, 들뢰즈/가타리는 여기서도 그것을 개념적으로 구별하는 일에만 머물지는 않았다. (『더러운 철학』, 276쪽)
 
   
   
 

더욱이 이진경은 ‘노마디즘’을 거의 부드러운 문화상품으로 만든 후에 결론으로 ‘코뮨주의’를 주장하는데, 이것도 전쟁기계를 간과하거나 은폐한다는 의심을 받을 만하다. 더욱이 폭력의 수많은 흐름에서 전적으로 벗어난 우정과 사랑의 공동체를 목적으로 삼을 때, 자칭 노마드들은 알게 모르게 그쪽으로 줄을 서는 듯하다. 우애에 근거한 공동체는 훌륭한 가치지만, 그걸 노마드의 선험적 목적으로 상정할 필요는 없다.‘전쟁기계’에게 전쟁이 목적이 아닌 것과 마찬가지다. 노마디즘은 침략주의라고 공격한 생태주의자 천규석이 내세운 것도 모든 국가로부터(심지어 복지국가도) 완전히 벗어난 공동체주의다. 노마디즘은 어떤 오류도 없다고 말하는 이진경도 비슷한 코뮨주의를 칭송한다. 단순한 우연일까? 아니다. 이들은 노마드의 한쪽 면만 극단적으로 과장했기 때문이다. (『더러운 철학』, 27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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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ong 2010-02-23 18: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자에게 맹목적으로 기대고 있는 저에게 일침을 해주시는 글 같습니다. 잘 배웠습니다. ^.^;

野理 2010-03-02 13: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자와 팽팽한 긴장을 유지하면서 독서를 하려고 노력중입니다. 늘 어렵네요. 좋게 읽어주셔서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