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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영희 프리즘 - 우리 시대의 교양
고병권.천정환.김동춘.이찬수.오길영.이대근.안수찬.은수미.한윤형.김현진 지음 / 사계절 / 201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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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이고 조사를 만나면 조사를 죽여라"
- <임제록>
 

지난 3월 11일, 법정 스님이 입적하셨다. 소유하려는 집착에서 벗어나 욕심을 내려놓을 때 진정한 자유를 얻을 수 있다는 ‘무소유의 역리(逆理)’를 몸소 실천하셨다. 가질수록 행복하다는 착각 속에서 살고 있는 세인(世人)으로서 참 쉽지 않은 가르침이다. 인생을 살아가면서 힘겹게 깨치는 진실은, 마음에 깊이 새기는 말들은 늘 역설(逆說)을 품고 있다는 것. 버려야 얻고 잃어야 알며 앓아야 깨닫는다.

 

밥도 허겁지겁 먹고 잠도 자는 둥 마는 둥 자면서까지 남보다 앞서려고 기를 쓰며 사는 우리들. 연봉과 지위를 자기의 참모습으로 여기며 나보다 못하면 깔보고 나보다 잘나면 굽실댄다. 속물이 되어버린 자신을 결코 인정하지 않은 채 누군가 자신의 흠을 지적하기라도 하면 ‘그래, 너 잘났다 잘났어’라고 속으로 악다구니를 부린다. 살수록 마음에 때를 묻히고 또 묻힌다. 마음은 거울과 같아서 닦고 또 닦지 않으면 때가 켜켜이 쌓인다. 그러니 늘 깨어 있으려면 닦고 또 닦을 수밖에 없다.

 

리영희는 가르치기보다는 가리킨 스승이다. 우리는 이건 이렇다 저건 저렇다며 딱 꼬집어 말해야 알아듣는다.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만 보고 달은 좀체 보지 않는다. 그래서 “사랑을 가르치는 시대는 슬프고 / 사랑을 가르칠 수 있다고 믿는 / 믿음의 시대는 슬프다”(정호승, <洗足式을 위하여> 중에서). 한평생 우상과 싸우면서 한쪽 면만 바라보았던 우리들에게 다른 쪽도 있다고 일러주었다. 우상을 만들어야 직성이 풀리는 듯 우상을 숭배하는, 아둔한 우리들. 돈을 우상으로 만들어 물신(物神)으로 숭배하는 우리들. 돈이면 다 된다며 관직도 자격증도 학위도 사고판다. 그런 우리들이 리영희를 만나면 죽비로 사정없이 얻어맞는다. 정작 당신은 내리친 적이 없다 하겠지만 들리지 않는 죽비 소리 덕에 우리도 잠에서 깰 수 있었다.

 

지난 20세기는 전쟁과 살육의 시대가 아닐까. 그 후유증이 아직도 채 가시지 않은 분단의 오늘을 살고 있지 않은가. 여전히 냉전체제를 공고히 하며 기득권을 유지하는 데 골몰하고 있진 않은가. 이렇게 사유하도록 일깨웠기에 리영희는 ‘항법사’다. 역사의 세찬 물결에 휩쓸리면 우리가 어디쯤 가고 있는지, 어디를 향해 가고 있는지 길을 잃게 마련이다. 표류하는 줄도 모른 채 잘 가고 있다고 걱정하지 말라고 일러주는 사람들 속에서 어디를 어떻게 가야하는지 몸소 보여 주었으니 항법사가 아닌가. “전쟁은 본디 ‘제국’의 프로젝트이며, 제국의 중요한 정책”(60쪽)이기에 제국은 제 시장을 넓히려고 전쟁을 고귀한 명분으로 미화한다. 또 신자유주의는 무한경쟁을 부추기며, 실력만 있으면 누구든지 성공한다며 달콤하게 유혹한다. 그렇게 성공해서 살아남아야 행복하다고, 그러니 처세의 달인이 되라고. 혹 누군가 이런 말은 웃기는 소리라고 비판하면 억울하면 출세하란다. 정작 남을 짓밟고 남의 것을 빼앗으며 제 뱃속만 채우고 있는데 말이다. 우리 마음 안에도 제국이 도사리고 있다. 은근하게, 음흉하게, 음산하게.

 

전쟁의 참화 속에서도, 서슬 퍼런 독재의 칼날 앞에서도, 출세와 성공을 의뭉스레 권하는 사회에서도, 당당히 맞서며 시대의 오류를 용기있게 비판했던 리영희. “대학 진학률은 OECD 국가 중에서도 가장 높은 86% 수준”(198쪽)이라지만 지식인다운 지식인은 사라져만 간다. ‘스펙’ 쌓기에 골몰하여 사유의 의무를 내팽개쳐 버린 지식인을 양산하는 사회는 불행하다. 치열한 성찰마저 도구가 되고 상품이 돼버린 세상에서 리영희의 이름을 잊어가는 시대는 슬프다. 아니 리영희마저 우상으로 만드는 시대가 더 서글프다. 희망마저 저당 잡혀 허덕이는 삶이 아니던가. 비관하고 절망하는 우리에게 리영희는 “반드시 변혁은 와요. 우리 사회에도 옵니다. … 바로 이것이 역사이고, 역사의 변증법입니다.”(218쪽)라며 다시금 죽비를 내리친다. 딱.딱.딱!

 

팔순의 병약한 노구(老軀)를 이끌고서도 변함없이 치열하게 성찰하는 리영희. 그러면서도 나의 시대는 끝났다며 이젠 가야할 때라고 역사의 뒤안길로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물러섰다. 그래서 그는 아름답다. 눈부시게 빛나지는 않지만. 화려하게 치장하지 않아서, 맨얼굴로도 스스럼없이 만날 수 있어서 아름답다. 최후의 한 목숨을 쉬는 그 날까지 자유를 꿈꾸며 늘 깨어있을 당신. 당신을 만난 건 우리에게 큰 행운이다. 간절히 바란다, 우리가 당신마저 우상으로 받들지 않기를, 우리가 힘겹다고 잠자는 척도 하지 않기를. 죽비 소리가 들린다, “생활은 간소히, 하지만 생각은 높게”(235쪽), 딱.딱.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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