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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적 시 읽기의 즐거움 - 우리 시에 비친 현대 철학의 풍경
강신주 지음 / 동녘 / 201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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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경계를 가로지르며 넘나들다

강신주는 카멜레온이예요. 동물들은 천적에게서 제 몸을 지키려고 보호색을 띠며 숨죠. 그들에게 변화는 생존 본능입니다. 변화를 모색한다는 점에선 저자는 색깔을 바꾸는 동물과 같을지 모르나 틀을 깨고 새로이 길을 내며 걷는다는 점에선 다르지요. 

장자와 노자 철학을 전공한 저자는 동양철학에만 머물지 않고 서양철학과 손잡고 걷기를 주저하지 않았습니다. 우리 학계에서 금기로 여기는 ‘전공 불가침’의 묵계를 과감히 떨쳐버리고 파문을 무릅쓰며 이단의 길로 나아간 거죠. 

글쓰기 방식마저 딱딱한 문어체로 쓴 논문 형식에서 과감히 벗어나 구어체를 바탕으로 대화하듯 써 내려갑니다. 점점 삶과 멀어지는 철학을 일반인에게 쉽고 편하게 느끼도록 글쓰기 양식마저 변화를 주었습니다.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처럼’ 장자가 추구했던 자유를 생각으로만 그치지 않고 학문과 생활에도 실천하려는 의지에서 비롯됐으리라 봅니다.

 

2. 불륜이 아닌 외도?

저자가 이번에도 외도를 했네요. 시에게 철학이 데이트 신청을 했습니다. 내가 하면 사랑이지만 네가 하면 불륜이라고 천연덕스레 말하며, 은근히 불륜을 즐기며 부치기는 우리네 일상으로는 도저히 가늠하지 못할 외도인 셈입니다. 저자의 외도는 무딜 대로 무뎌진 사유 감각을 일깨우니 박수를 쳐 주어야겠지요. 

시인 21인과 철학자 21인이 서로 짝을 이루어 펼치는 이채로운 소개팅! 문창호지에 침을 묻혀가며 구멍 내어 살짝 들여다보는 재미로 설레기만 하네요. 시인들은 모두 우리와 함께 호흡했거나 호흡하고 있는 사람들이고, 철학자들은 박동환을 빼면 스무 명은 서구 현대 철학자들입니다. 시와 철학이 가슴앓이 하듯 서로에게 말을 건네고 있습니다.    

 

3. 세르파와 함께 산을 타다

험하디 험한 인문학의 양대 산맥. 발길을 좀처럼 허락하지 않는 시와 철학의 봉우리. 세르파(Sherpa)를 자청한 저자를 뒤따르니 산행이 그리 어렵지만은 않습니다. 때론 준봉(峻峯) 위에서 아찔한 현기증을 느끼기도 하고, 때론 외봉오리에 올라서서 구름을 내려다보며 시원한 바람 내음새에 흠뻑 취하기도 합니다. 

서구 현대 철학자들은 동일성의 사유라는 감옥에 갇힌 차이를 구출하려고 특공대를 파견합니다. 개념의 그늘 속에 가려진 살결과 숨결을 온전히 드러내줍니다. 우리가 스스로 자신 인생의 주인공이라고 생각해 왔지만 사실은 누군가가 만든 틀 안에서 춤추고 있었을 뿐이랍니다. 이른바 ‘구성된 주체’였다는 것이죠. 영화 <트루먼 쇼>의 트르먼처럼 말입니다. 견고하게, 은밀하게, 물신(物神)으로 자리 잡은 자본주의가 우리의 욕망을 길러낸 겁니다. 온전히 우리 자신 스스로 무언가를 욕망한다고 했다고 착각했던 거지요. 이 치명적 유혹을 쉽사리 뿌리치기는 참 힘겹습니다. 근대 민주주의 역시 헐벗은 생명을 배제하고 냉대했던 것도 ‘이성의 간계’가 빚어낸 폭력이랍니다.  

 

4. 하산 그리고 땅멀미

어느덧 하늘 끝 모를 봉우리만 오르다보니 땅이 그립습니다. 산행을 마치고 비릿한 도시 땅자락에 두 발을 내딛으니 낯설기만 합니다. 뱃사람들이 오랜 항해를 마치고 뭍에 오르면 땅멀미를 하듯이 말입니다. 

이젠 낯익고 친숙한 일상이 낯설고 어색하기만 하네요. 불쾌감마저 들 정도로 혼란스럽군요. 삶을 제대로 살아보려면 이를 견뎌내야만 한다죠. 홀로서기를 하려면 어쩔 수 없는 통과의례라네요. 앓은 만큼 성숙하겠죠. 경이로움으로 가득한 세상을 맘껏 누리겠노라고 조용히 다짐해 봅니다.    

 

5. 묻고 또 묻다!

저자가 프롤로그에 밝힌 대로 우리 철학계는 서구를 수입하는 데 급급하다보니 우리네 삶은 서구인들에 사유그물 속에 사로잡혀 있었습니다. 문명은 교류를 통해 성장해 왔음을 알지만 서구인의 일상과 다른 우리네 삶결을 살피는 데는 소홀했던 게 사실입니다. ‘바나나 콤플렉스’라나요. 우리네 피부색은 살구색이지만 생각은 하얗잖아요. 서구가 몇 세기에 걸쳐 겪었던 근대를 압축해서 따르다 보니 사유의 식민지에서 허덕인 것이죠. 귤도 회수를 건너면 탱자가 된다잖아요. 언제쯤 우리도 당당하게 우리 목소리를 낼 수 있을까요?

우리 철학계를 뒤돌아본 저자는 박동환의 철학을 조명하며 한국적 사유의 가능성을 검토했으나 서구 생태주의와 별반 다르지 않아 보입니다. 도시의 삶이 점차 확산되어 농촌의 삶을 찾기 힘든 현실에서 도시 밖을 이야기한다는 건 좀 아쉽네요. 오히려 우리말로 온전히 사유하려고 애쓴, ‘씨 사상’으로 집약되는 함석헌 선생과 다석 류영모 선생을 만나게 했다면 좋았을 텐데요. 중매를 잘 하면 술이 석 잔이고 못 하면 뺨이 석 대라잖아요. 

그리고 우충좌돌하며 폭력과 근본주의에 한바탕 싸움을 걸고 있는 김진석이 내놓은 ‘포월과 소내’의 철학도 의미가 있지 않나 싶군요. 앎과 삶의 소통을 꿈꾸며 ‘일리(一理)의 해석학’을 내세운 김영민이라는 사유가도 눈여겨보았으면 합니다.

선별한 서구 철학자들은 대개 남성이더군요. 페미니즘계에서 동일성의 사유에 사로잡힌 ‘젠더’에 균열을 내었던 주디스 버틀러와 같은 여성 철학자들과 시인 김승희, 김혜순, 김선우 등과 같은 여성 시인을 만나도록 주선했다면 좋지 않았을까 싶네요.

‘오히려 길 밖이 넓다 / 길 아닌 것이 오히려 더 넓고 넓다’고 나직이 말한 어느 시인의 시구가 귓전을 휘감습니다. 뚜벅뚜벅 길섶으로 발걸음을 옮겨봐야겠네요. 늘 가던 길만 가다보니 무기력한 나날을 벗어나지 못했나 봅니다. 사유하지 않고 일상에 휩쓸려 살았던 생활도 반성해 봅니다. 

끝으로 이 책을 읽은 당신께 묻고 싶네요. 어떤 기쁨, 어떤 자유를 좇고 계신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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