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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의 공간 - 소수성, 타자성, 외부성의 사건적 사유
이진경 지음 / 휴머니스트 / 2010년 1월
평점 :
- 하나.
칼은 선할까 악할까? 강도가 든 칼은 남의 목숨을 위협하니 악할 테고, 요리사가 잡은 칼은 생명을 살릴 테니 선할 것이다. 그렇다면 요리사가 칼로 갑자기 손님을 협박하면 악한 칼이겠다. 강도가 집으로 돌아가 제 아이들에게 요리를 해주면 선한 칼이 될 터이다. 이렇듯 선악 판단은 두부모 자르듯 선명하게 구분할 수 없을 때가 많다. 사물이나 현상은 상황을 벗어나거나 맥락을 떠나면 의미는 새롭게 만들어진다. 무엇과 관계를 맺느냐에 따라 같은 대상도 의미가 달라지게 마련인 것이다.
- 둘.
이진경은 코뮨주의자다. 맑스주의의 한계를 절감한 그는 들뢰즈의 사유를 만나면서 그 한계를 넘어설 수 있는 힘을 찾았다. 공동성, 즉 ‘동질적인 것이 아니라 이질적인 것이 만나 함께하는 능력’(557쪽)에 바탕을 둔 새로운 공동체 ‘코뮨’에 주목한다. 이러한 그의 생각은 ‘연구공간 수유+너머’ 공동체를 ‘코뮨’의 실현으로 여기고 그의 친구들과 지금도 실험중이다.
- 셋.
제 1부에서는 서구 근대적 역사관념과 역사의 주체, 진보의 개념을 되짚고서 동일성의 폭력을 고발하며 새로운 관점을 제시한다. 우선 서구 근대적 역사관념에 드리워진 폭력을 주목한다. 맑스주의나 실증주의 입장에서 역사를 바라보는 관점을 들여다보면서 둘 다 역사의 단일성을 추구하고 있다는 점에서 다르지 않다고 말한다. 단일하고 보편적인 역사 안에 모든 이질적인 것들을 포섭하는 ‘동질화’와 선형적 발전 단계에 따라 등급을 매겨 평가하는 ‘선형적 위계화’를 통해 근대 역사를 단일하고 목적론적인 역사를 만들어내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역사관념을 비판하며 보편사에 갇힌 복수의 시간과 리듬을 되살리려는 시도로 소수적 역사에 주목한다.
다음으로 역사의 주체로서 소수자를 살핀다. 근대적 역사관념을 바탕으로 한 역사 속에서 억압 받는 피해자로 규정된 소수자를, 다수자의 억압에 저항하고 투쟁하는 긍정적 · 적극적 의미를 부여하며 되살려낸다. “소수적인 역사란 소수자들이 역사 속에서 올바른 가치를 인정받고 제대로 된 지위를 할당받게 만드는 양심적 역사가 아니라, ‘역사’ 속에서 역사화될 수 없는 사건을 역사로부터 돌발하게 하고 이로써 역사 안에서 다른 돌발의 지점들이 만들어지도록 촉발하는 역사”(103쪽)라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두 가지 진보의 이념, 즉 적분적 진보와 미분적 진보로 나누어 살펴본다. 진정한 진보는 지배적인 기준과 척도에서 끊임없이 벗어나며 새로움을 만드는 진보, 이미 있었던 기준과 척도에 따르는 것이 아니라 그 기준과 척도를 비판하면서, 행동하고 사유하는 진보라는 것이다.
- 넷.
제 2부에서는 서구적 근대를 우리가 어떻게 내면화했는지를 탐구한다. 1부에서 역사관념과 진보의 이념에 대한 고찰은 자연스레 우리의 근대로 시선을 돌린다. 조선 후기 <세시기>를 검토하며 제의에 담긴 소수적 움직임에 주목한다. 그런 후 20세기 초 <독립신문>과 <대한매일신보>를 들여다보면 서구 근대적 시·공간의 관념뿐만 아니라 서구 근대적 역사관념까지 어떻게 수용되었는지를 고찰한다. 1907~1908년에 서구 근대적 시·공간의식 및 역사관념을 바탕을 한 용어들이 유독 증가하는 현상에 대한 원인을 찾는 일은 ‘입증할 방법이 없다’(281쪽 각주 4)고 하면서 담론적 변화 양상에만 주목하겠다고 한다. 그러나 얼핏 ‘민족의식과 결부되어’(281쪽) 있다고 언급한 점을 미루어 볼 때, 일본 제국주의의 손아귀에 포획되어 가는 대한제국의 현실을 들여다봐야 하지 않을까. 일제라는 다수자에 저항하고 투쟁했던 소수자의 역동적 움직임, 특히 정미의병의 모습은 ‘역사적 포획’에서 벗어나려는 ‘반역사적 돌발’이라고 할 수 있진 않을까. 1907년 전후 바람 앞에 촛불 신세가 되어가는 대한제국의 현실에서 나타난 소수자의 움직임에 눈을 감는 것은 아닐지. 어찌보면 정미의병도 일제라는 다수자에 포획된 소수자로 볼 수도 있으리라.
- 다섯.
3부에서는 우리 근현대사를 살피면서 담론 분석을 행한다. 먼저 ‘동아신질서론’에 대응하는 조선 지식인의 모습을 고찰하면서 식민지 인민이 과연 말할 수 있는 자격을 지닐 수 있는가를 논의한다. 이어서 가족계획 담론을 검토하면서 근대국가가 실행하는 생명정치학의 기술을 분석한 후 비가족적인 공동성을 바탕으로 하여 새로운 종류의 가족 공동체가 생성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코뮨주의를 말한다.
다음으로 참여정부 시절 한미 FTA와 MB정부의 실용주의를 비판한 뒤 촛불시위에서 ‘흐름으로서의 대중’이 보여준 가볍고 즐거운 혁명을, 1부에서 언급한 역사 주체로서 소수자의 본보기로 언급한다.
- 다시 하나, 그러나 다른 하나
저자의 논의는 니체, 푸코, 들뢰즈 등이 서구 근대를 의심의 눈초리로 매섭게 파헤친 ‘동일성의 폭력’에 대한 고발을 바탕으로 한다. 그리고 저자는 보편적 역사의 그늘에 가려진 소수자가 당당하게 역사의 주체가 되길 믿으며 공동성에 뿌리를 둔 공동체, ‘코뮨’을 꿈꾼다. 그러나 예찬에 가까운 목소리로 그가 말하는 소수자가 과연 그의 믿음만큼 순수하게 건강한지는 의문이다. 일상에서 소수자가 보여주는 던적스러운 모습들에는 눈감아 버리는 것은 아닌가 싶을 만큼 맹목에 가까운 듯한 낙관적 믿음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칼은 선하지 악하지 않다. 그 칼을 사용하는 우리 인간들이 어떤 마음으로 사용하는지 중요하지 않을까. 또한 자본이 지닌, 강력한 포획력에 우리들이 쉽게 벗어날 수 있을지도 의문이다.
이렇듯 개념과 이론은 성긴 그물과 같아서 복잡다단한 현실을 담아내기엔 늘 역부족이다. 결국 문제는 실천인 것이다. 사람살이에서 실천은 참 어렵고 힘들다. 그렇다고 심각한 회의에 빠질 필요는 없다. 희망이란 던적스런 세상을 오지게 맛보는, 맵짠 인생에게 주어지는 선물일지 모른다. 차별이 아니라 차이를 존중하며 더불어 사는 지혜를 쉼없이 실천하는 사람들이 늘어날 때 우리가 꿈꾸는 세상은 이미 다가와 있지 않을까 싶다.
끝으로 '우충좌돌'하면서 '기우뚱한 균형'을 강조하는 김진석이 최근 출간한 책『더러운 철학』에서 제기한 저자에 대한 비판은 귀 기울일 필요가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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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진경을 비롯한 노마디즘 옹호자들은 개념적 구분에만 매달리면서 ‘노마디즘’이 들뢰즈/가타리의 숙성한 사상이고 나쁜 자본과 전혀 상관이 없으며 따라서 노마디즘이 침략적 성격을 띠는 것도 자신에게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마음 편하게 말한다. 그는 노마드뿐만 아니라 ‘매끈한 공간’과 ‘외부성’이 그 자체로 순수하고 초월적인 혁명적 개념인 것처럼 말하지만, 들뢰즈/가타리는 여기서도 그것을 개념적으로 구별하는 일에만 머물지는 않았다. (『더러운 철학』, 27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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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욱이 이진경은 ‘노마디즘’을 거의 부드러운 문화상품으로 만든 후에 결론으로 ‘코뮨주의’를 주장하는데, 이것도 전쟁기계를 간과하거나 은폐한다는 의심을 받을 만하다. 더욱이 폭력의 수많은 흐름에서 전적으로 벗어난 우정과 사랑의 공동체를 목적으로 삼을 때, 자칭 노마드들은 알게 모르게 그쪽으로 줄을 서는 듯하다. 우애에 근거한 공동체는 훌륭한 가치지만, 그걸 노마드의 선험적 목적으로 상정할 필요는 없다.‘전쟁기계’에게 전쟁이 목적이 아닌 것과 마찬가지다. 노마디즘은 침략주의라고 공격한 생태주의자 천규석이 내세운 것도 모든 국가로부터(심지어 복지국가도) 완전히 벗어난 공동체주의다. 노마디즘은 어떤 오류도 없다고 말하는 이진경도 비슷한 코뮨주의를 칭송한다. 단순한 우연일까? 아니다. 이들은 노마드의 한쪽 면만 극단적으로 과장했기 때문이다. (『더러운 철학』, 27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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