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몽(3) - 푸르디 푸른
1. 낙조(落照)
물 위의 도시, 백야의 절정이 저문다.
자정이 가까워지면 땅거미가 진다. 대양과 맞닿은 푸른 만, 쌀쌀한 물놀이를 즐기는 사람들, 입을 맞추는 귀여운 연인들, 예쁜 계집애를 목마 태운 젊은 아빠, 한 곁에 차를 세워두고 담배를 피우는 후줄근한 중년 남자, 왁자지껄 즐거운 금발 미녀들, 장바구니를 들고 터벅터벅 해변을 걷는 뚱보 아줌마, 해안가 풀숲에 몸을 포개고 있는 늙은 연인…. 그리고 피(彼)가 이 풍경 속에 묻혀 있다.
갑자기 그의 시선이 딱 멎는다. 푸르디푸른 물과 푸르디푸른 하늘, 이 두 공간 축이 시간 축과 만난다. 삼위일체의 접점에 커다란 구멍이 뚫리고 빨강과 노랑을 부조리한 배율로 섞어놓은 듯 오묘한 빛이 뿜어져 나온다. 백야의 끝자락에 우연히 낙조의 절정을 목도한 그는 깨닫는다. 종말이 멀지 않다.
이후 그는 오직 낙조를 보기 위해 바닷가 산책에 나선다. 북국의 맞바람이 너무 거세서 라이터도 켤 수 없다. 점퍼와 목도리로 중무장하고 불씨를 꺼뜨리지 않으려고 연이어 담배를 피워대며 자갈밭 한가운데 반석 위에 앉는다. 푸르디푸른 허공과 바다가 점차 어둠에 잠식된다. 구름에 가려진 태양이 느린 듯, 빠른 듯 변덕스럽게 수평선으로 내려온다. 전락의 움직임보다 더 전율스러운 것은 그 찬연한 큰 원이 물의 선과 맞닿는 지독히도 찰나적인 순간이다. 태양-원은 수면-선에 닿아 한 점이 되기가 무섭게 급속도로 침몰하다가 함몰한다. 둔탁한 울림도 없고, 아슬아슬한 출렁임도 없다. 그러게, 태양 구멍이다.
낙조의 절정이 끝나면 그의 눈앞으로 광활한 무정형의 공간이 펼쳐진다. 푸르디푸른 공간과 검디검은 선의 사차원적인 만남은 로바체프스키의 두 평행선처럼 영원하리라.
어느덧 8월말, 가을을 예고하는 찬비가 내린다. 바닷가의 축축한 반석 위에 앉아 담배 연기를 마시며 맥주 한 병을 딴다. 두어 모금 마실 무렵 후줄근한 장바구니를 든 노파 하나가 다가온다. 어린아이처럼 작은 몸집인데, 그나마도 쭈글쭈글, 바싹 오그라들었다. 지하실 한 구석에 웅크리고 앉아 축축한 웃음을 흘리면 오싹 소름이 돋을 것 같은 형상이다. 입을 벌리자 헐렁한 잇새로 엉성한 말이 새나온다.
“비도 오는데 뭐해? 등신 같은 놈, 젊은 놈이 그렇게 담배 피우면 못 써!”
이어 신세한탄이 이어진다. 노파의 조그맣고 헐거운 몸이 저 바다의 잔물결처럼 일렁인다.
“요새는 애들이 많아져서 이 짓도 못 해먹겠어. 애들은 발도 빠르지, 힘도 좋지. 늙은이가 해봤자 얼마나 하겠어? 병 하나 팔아봤자 꼴랑 1루블이야. 빵 값은 또 얼마나 올랐는지. 치즈랑 버터는 엄두도 못 내. 자식새끼 키워봤자 말짱 도루묵이고… 아이고, 맥주 갖고 제사 지내냐! 빨리 좀 마셔, 이 등신아!”
적반하장도 유분수지. 그의 입가로 겸연쩍은 듯, 무안한 듯 어색한 미소가 일다가 그대로 새겨진다.
갑자기 노파 하나가 또 나타난다. 손에 장바구니를 들고 그의 곁을 슬그머니 맴도는 모양새가 익숙하다. 새 노파는 이미 터를 잡고 있던 헌 노파와 대놓고 싸움을 벌인다. 생의 한가운데서 생의 가두리로 밀려난 두 노파의 황혼녘의 전투는 시나브로 속살대는 밀담으로 바뀐다. 잇새로 뿜어져 나오는 늙은 숨결소리가 묘한 이중주를 이룬다. 거북살스러운 관객의 역할을 빨리 끝낼 수 있는 방법은 딱 하나다.
그는 남은 맥주를 얼른 처리한 다음 새 맥주병을 따서 식은 숭늉 들이키듯 벌컥벌컥 마신다. 병 두 개를 사이좋게 하나씩 나눠주자 두 노파는 고맙다는 말은커녕 자비로운 마음에서 쓰레기를 거둬주는 양 거들먹거리며 땅거미 지는 침침한 무대 너머로 사라진다.
두 노파가 사라진 자리, 비가 그친 하늘에는 짙은 먹구름이 무리지어 뻗어 있다. 수평선에서 멀찍이 떨어져 있던 둥근 태양이 점점 아래로 내려온다. 드디어 구멍처럼 뚫린 커다란 새빨갛고도 샛노란 원이 푸르디푸른 선과 맞닿는다. 종말이 코앞이다.
2. 변태(變態)
갑자기, 너무 비좁다.
방안, 컴퓨터 책상 앞에서 일어서는데 허벅지가 낀다. 걸음을 떼다가 의자 모서리에 무르팍을 부딪친다. 절름절름 침대 쪽으로 가는 길에 탁자용 작은 나무 상자에 복숭아뼈를 찧는다. 절로 구부러졌던 몸을 펴자 천장이 정수리까지 내려와 있다.
화장실, 원래 세면대도 없이 변기 하나만 달랑 있다. 오늘따라 더 비좁다. 안으로 들어가긴 했으나 문이 안 닫힌다. 두 손을 얌전히 모아 허벅지에 올리는데 팔꿈치가 양쪽 벽에 닿는다. 변기 뚜껑 위에 올려놓은 휴지를 향해 손을 뻗지만 닿지 않는다. 뒤치다꺼리는 더 힘들다. 고문 틀처럼 비좁아진 화장실을 간신히 빠져나온다.
“야옹.”
그의 눈앞에서 거의 이차원처럼 여겨지는 가늘고 납작한 검푸른 형상이, 하지만 고양이, 그것도 러시안 블루임이 분명한 어떤 형상이 어른거린다. ‘넌 대체 누구냐?’하고 묻고 싶지만 녀석이 먼저 입을 연다.
“나는 영원히 악을 행하고 싶지만 영원히 선을 행하게 되는 힘의 일부야. 아니야. 나는 영원히 선만을 원하는 유일한 존재야. 흥, 천만의 말씀. 나는 아무것도 원하지 않아. 해골 깨고 노는 것도 지루해, 지루해 죽겠어. 하지만 죽을 수가 있어야지! 고양이가 아홉 개의 목숨을 가졌다고 하잖아? 아홉 개가 뭐야? 9가 무한대로 이어지는 거야. 이런 불멸, 너무 싫어!”
녀석의 말은 다시 “야옹”으로 바뀌고 녀석의 형상도 사라진다. 공간의 협소화가 몸 곳곳에서 느껴진다. 집이 이차원으로 바뀌고 있다. 가만히 있다가는 종이인간처럼 짜부라질 것이다. 그는 황급히 집을 빠져나온다.
바닷가, 자갈밭 위의 나지막하고 야트막한 반석. 담배를 뿜어내고 맥주를 마시고 담배를 들이켜고 트림을 뱉어내는 작업을 번갈아 해본다. 이 느린 박자에 맞추어 한 노파가 빈 맥주병을 받아 가고, 한참 뒤 또 한 노파가 두 번째의 빈 맥주병을 받아 간다. 글쎄, 어쩌면 같은 노파인가.
육지 쪽, 시커멓고 거대한 개 한 마리가 긴 꼬리를 허공에 날리며, 긴 다리를 쭉쭉 뻗으며 걸어온다. 그는 맥주병을 노리는 노파들처럼 천천히, 그러나 집요한 투지를 보이며 개에게 다가간다. 우유팩과 유리조각이 즐비한 자갈밭을 지나고 해변의 풀밭을 가로질러 날렵하게 개의 등 위에 올라탄다. 앗! 지금껏 그 흔한 말 타기 놀이조차 해본 적 없는데 이렇게 잘 하다니! 하지만 역시나 이건 환각이다. ‘턱’ 하는 순간, 온 몸에 육중한 무게가 느껴진다. 어느덧 그는 두 손발(네 발)로 땅을 짚고 있으며, 개는 뒷발(다리)을 그의 등 좌우로 늘어뜨리고 앞발(손)을 그의 목덜미 근처에 가뿐하게 올려놓고 있다. 속수무책이다. 개는 손으로 그를 몰아대고 그는 네 발로 달린다.
‘정말 개 같군.’
그리하여 그는 분연히 떨치고 일어나 직립보행 하는 인간의 위엄을 뽐낸다. 일순간 개는 땅바닥으로 나뒹굴지만, 금방 자세를 바로잡고서 뾰족하고 싯누런 이빨을 드러내며 그를 향해 돌진한다. 잇새로 끈적끈적한 침을 질질 흘리는 개의 험악한 면상을 본 찰나, 송곳 같은 이빨이 그의 머리뼈를 우걱우걱 씹고 골수가 꿀꺽꿀꺽 삼켜진다. 한쪽 눈알이 시커먼 나락으로 떨어지는 순간, 그는 아직은 먹히지 않은 한쪽 눈알로 섬광처럼 지나가는 낙조의 붉고도 노란 빛을 본다.
‘정말 아름답구나, 여기서 멈추어라!’
그 눈알마저 이내, 태양이 검푸른 바다 속으로 침몰하듯, 개의 컴컴한 목구멍 속으로 사라진다.
엉덩이쯤에 이른 개는 기왕지사 먹은 것도 다 게워내고 싶다는 듯 꾸역꾸역 무성의하다. 그러면서도 집요하게 끝까지 씹어 먹는다. 마침내 개가 사라진 자리에는 그의 몸 어딘가에 붙어있던, 점처럼 새까만 사마귀 하나만 남았다.
한참 뒤 술 취한 유쾌한 청춘들이 나타난다. 누군가가 사마귀를 밟고 움찔하더니 그것을 집어 올려 휙 던진다. 허공을 날아 바닷물 속에 풍덩 빠지는 사이, 피(彼)는 있지도 않은 머리를 굴려보며 존재할 수도 없는 미소를 흘린다.
‘나쁘지 않은 종말이군.’
*
<문학나무> 2017년 여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