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에 바치는 책:
움베르토 에코(1932-), <장미의 이름>(1980)
<장미의 이름>은 노수도사 아드소가 젊은 날 배스커빌 사람 윌리엄을 따라 이탈리아의 모 수도원에 갔다가 겪은 일을 기록한 수기다. 수도원장은 종교재판관이었던 윌리엄에게 아델모 사건의 수사를 부탁한다. 그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여러 수도사들이 「요한묵시록」에 예언된 방식으로 죽어가고 종국에는 그들도 사건에 깊이 연루된다. 흥미진진한 추리소설이자 탐정소설인 <장미의 이름>은 중세에 “대한” 소설일 뿐만 아니라 중세“에서” 쓴 역사소설(<장미의 이름 작가 노트>)이기도 하다. 종교 권력(교황/수도원장-사서)과 세속 권력(황제/봉건영주)의 대립이 작품의 주된 축을 이룬다. 수도원만 놓고 본다면 지역 영주의 사생아인 수도원장과 외지 출신 장서관 사서(부르고스 사람 호르헤)의 어두운 ‘계약’, 수도원 내부의 지역감정과 갈등이 중세의 암흑의 이면을 보여준다.
이와 더불어 <장미의 이름>은 “덧없는 이름”(=기호)만 남은 “지난날의 장미”, 즉 ‘책-텍스트’에 관한 ‘책-텍스트’이자 ‘책-물건’에 바치는 또 다른 ‘책-물건’이다. 수도원의 장서관은 유럽 전역에 명성이 자자할 만큼 많은 책과 희귀본을 소장하고 있다. 목록은 열람할 수 있으되 사서의 허락이 없으면 실제 책은 볼 수 없고 외부 반출은 전면 금지되는 폐가제를 취하는 것은 중세 책의 생산 및 유통 환경, 그 특성과 위상에서 기인한다. 책을 번역하거나 필사하고(베난티오) 아름답게 채식하고(아델모) 그렇게 만들어진 책을 관리하는(베렝가리오, 말라키아 등) 일, 간단히 책(=지식-앎)은 권력이며 모든 권력은 위계를 갖는다. 장서관의 사서가 장차 수도원장으로 가는 요직인 것도, 장서관이 중세의 TO지도를 모델로 한 수학적 미궁의 복잡성을 갖춘 것도 당연하다. 희생양이 된 수도사들은 모두 금서에 손을 댄 자들, 또 대부분 그리스어를 읽을 줄 알았던 자들이다. 호르헤가 장서관의 밀실(<아프리카의 끝>)에 감춰둔 채 살인까지 불사하며 지키려 책은 대체 무엇인가.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 2권은 그의 비극론(<시학> 1권)을 잇는 희극론로서 완전히 소실되었거나 숫제 쓰이지 않은 걸로 알려져 있다. 웃음과 희극에 관한 많은 책 중 유독 이 책만 문제 삼는 것은 젊은 수도사들 사이에서 이 ‘이교 철학자’의 권위가 너무 높은 탓이다. 웃음 관련 논의는 소설의 초반부터 활발하다. 원칙주의자에 근본주의자인 호르헤는 인간의 본(本)인 그리스도가 웃었다는 말이 없음을 근거로 웃음 결사 반대론을 펼친다. 여기에 맞서는 윌리엄(그리고 죽은 아델모, 베난티오 등)의 논리는 “인간은 웃을 줄 아는 유일한 동물”이라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전제를 따른다. 웃음은 “목욕과 같은 것”, “우울증의 특효약”(242)이자 “사악한 것의 기를 꺾고 그 허위의 가면을 벗기는”(246) 기능을 한다는 것. 웃음을 두고 기독교 전통(특히 구약, 순수 히브리 전통)과 ‘이교’인 고대 희랍(나아가 라틴-로마) 전통, 또한 신학과 철학(문학)의 한 판 승부가 펼쳐진다. 자칫 고리타분한 탁상공론으로 전락할 수 있는 얘기가 이토록 흥미로운 것은 플롯의 촘촘함은 물론이거나 인물들의 또렷한 형상 덕분이다.
가령 로저 베이컨을 숭배하고 오컴의 윌리엄과 친분을 유지하는 윌리엄은 뛰어난 과학 지식(영국식 경험론)에 덧붙여 각종 편견에서 최대한 자유롭고 심판과 처형(종교재판관 베르나르 기)이 아니라 얽히고설킨 일을 푸는 것 자체를 즐기는 사람이다. 수시로 오류를 범하고 갈팡질팡, 더러 분을 못 이겨 호통을 치는 그의 모습이 생기롭다. 그가 당시로는 고령인 50세임에도 호리호리한 몸매에 건장한 체력을 갖춘 것도 눈에 뜨인다. 반면 박학다식에 여러 ‘이교도 말’에 능통할 뿐더러 많은 희귀본을 직접 구해온 호르헤는 스페인의 꼬장꼬장한 선비정신의 구현이다. 몹시 여윈 몸에 고령, 심지어 장님임에도(혹은 그렇기에) 극도로 발달된 다른 감각과 비밀 통로를 이용하여 수도원 내에서 ‘무소부재(無所不在)’하는 이 인물은 신비와 공포, 즉 카리스마 자체이다. 제 손으로 독약을 발라놓은 책을 먹어치움으로써 (밀실 침입을 시도하다가 통로-틈새에 끼여 질식사했을 수도원장에 이어) 스스로를 일곱 번째 제물로 바치는 결말 역시 전율스럽다.
“내가 곧 무덤이 될 터이다. 그 비밀을 나는 나의 무덤에 봉인하리라!”(853)
그의 첫 웃음이자 마지막 웃음에서 평생 동안 균열과 이탈을 몰랐던 한 수도사-학자의 희비극이 엿보인다. 윌리엄이 애증의 감정을 담아 말하듯 호르헤야말로 “영혼의 교만, 미소를 모르는 신앙, 의혹의 여지가 없다고 믿는 진리”(848), 즉 진짜 악마이며 또한 “철학에 대한 증오”와 “하느님이나 진리에 대한 지나친 사랑”(871)에서 태어난 가짜그리스도다.
상아탑에 적(籍)을 두되 ‘속세’(=대중)의 각종 쾌락도 마다하지 않은 재기발랄한 석학이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의 열렬한 숭배자”를 자처하며 “[모범] 독자를 위해서”(<노트>) ‘즐거운 지식’의 소설을 써주었다. <장미의 이름>을 발표했을 때 에코는 이미 미학 연구자이자 중세 연구자, 이어 기호학자로서 명성을 떨치던, 볼로냐 대학의 중년 교수였다. 이후 <푸코의 진자>를 비롯해 최근작 <프라하의 묘지>에 이르기까지 그 스스로 개척한 장르의 걸작을 연이어 내놓았음에도 그는 천생 소설가가 아니라 학자-교수로 여겨진다. 상아탑에 스스로를 감금한 장님 학자-소설가(보르헤스)가 축조한 ‘바벨의 도서관’, 즉 메타문학의 성취를 십분 흡수하되 “플롯의 귀환”(<노트>)을 위해 축배를 드는 소설! 소설 속 윌리엄(아드소)과 호르헤의 승부는 소설 밖 에코(이탈리아)와 보르헤스(스페인)의 승부처럼 읽히기도 한다.
<책앤> 2013년 ??월호. 저 때 원고 매수를 12매로 줄이라고 하는 바람에, 남는 말들은 따로 메모를 해두었다. http://blog.aladin.co.kr/koshka75/6609199
- 사람이 죽는다는 사실에 "아이구 깜짝이야~"할 나이는 한참 지났다. 에코의 최근작을 번역한 선생님을 통해, 그가 건강 때문에 비행기 타기가 힘들어 한국에 못(안) 왔다, 하는 식의 얘기를 재작년인가 언제 들은 것도 같다. 하긴, 돌아가신 팔십대 후반까지 정정하셨던 할머니, 아흔을 앞두고도 정정하신 외할머니를 봐도, 그러니까 아무리 정정해도 '8+0'은 장난이 아니다. 그럼에도 참, 아이구 깜짝이야, 다. 그 정도로까지 그는 '현역'이었던 것이다. 대학 때 처음 읽은(다른 메모에 썼지만, 의자가 뒤로 젖혀지 않는 통일호 안에서!) 그때부터 지금까지 <장미의 이름>은 여전히, 아이구 깜짝이야, 할 만한 소설이다. 에코에겐 여러 이름이 붙지만 내게는 영원히 이 소설의 작가일 터. 영면하시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