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코의 <장미의 이름>에 관한 짧은 글의 마감을 잠시 미뤄둔 채 막간의 여유를 부려본다.  

 

 

 

 

 

 

 

 

 

 

 

 

 

 

이런 저런 놀라운 소설들에도 불구하고 그는 여전히 '소설가'라기 보다는 교수이자 학자로 여겨진다. 그에게 있어 소설은 (물론 너무 잘 썼음에도!) 아무래도 호작질(^^;;) 같은 느낌을 주기 때문이다.  그건 또한 그가 본업(연구와 교육, 집필 활동 ^^;)에 너무 충실한 탓이기도 할 터. 암튼, 에코의 정수는 이후의 걸작들에도 불구하고 <장미의 이름>에 제일 잘 표현된 것 같다.

 

 

 

 

 

 

 

 

 

 

 

 

 

상아탑이 도저히 감당하지 못한 '-끼'. '중세'라는 '암흑'의 시대를 깊이 연구한 학자(학위논문 주제는, 이름 조차 고루한 토마스 아퀴나스^^;;)임에도 '속세'(=대중)의 쾌락을 마다하지 않았을 법하다. 그것을 사진 속 유쾌한 에코의 얼굴, 동영상 속 분주하고 말 많고 두툼, 뚱뚱한 아저씨의 모습이 잘 보여준다...ㅋ 어쩌면 그렇기에 이 소설은 (에코가 <장미의 이름 작가노트>에서 밝히듯) 보르헤스에 대한 오마주가 아닌가 싶기도 하다.

 

<마지막 - 한밤중>. 고된 노력 끝에 우연찮게(!) 암호를 해독한 윌리엄과 아드소는 부리나케 장서관으로 달려간다. 그리고 암호 Q-R을 눌러 거울-문을 연다.(키가 커야만 누를 수 있는 위치! ㅠ.ㅠ 키 작은 수도원장은 설령 여기까지 온다 할 지라도 절대 누를 수가 없다..ㅠ.ㅠ) 문 너머, 드디어 정체를 드러낸, 지적 갈망에 넘친 똑똑한 수도사들의 목숨을 앗아간 책이 보관된 밀실 <아프리카의 끝>. 희미한 등잔불, 가득 쌓인 책들, 그 속에 책상, 그 앞에 앉아 있는 장님 노수도사, 부르고스 사람 호르헤. 너무 말라, 그의 손은 숫제 투명해보인다. 윌리엄(-아드소)와 호르헤의 이 마지막 배틀(!)은 정녕 명장면이다.  

 

“... 내가 보고 싶은 책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 2.... 세상이 소실되었다고 믿거나 아예 쓰이지도 않았다고 믿는 책... 어쩌면 이 세상에서 한 권밖에 남자 않았을지도 모르는 당신의 소장품, 바로 그겁니다.”(829)

 

 호르헤는 “40년 동안 시력 대신 기억력/에 의존해 책을 되새겨 온 사람다운 놀라운 기억력”(830/31)을 뽐내며 책의 내용을 줄줄 읊고 예의 그 시니컬한(^^;;) 평도 곁들인다. 아리스-스의 책에 관한 한, 에코가 직접 몇 자 써주었다.

 

“1부에서 우리는 비극을 다루면서......이 희극이 어리석은 자들을 즐겁게 함으로써 비극과 같은 작용을 하는 과정을 검토해 보기로 하자. 우리가 영혼에 관한 책에서 이미 말했듯이 인간은 하고많은 동물 가운데서도 웃을 줄 아는 유일한 동물이다.”(831)

 

호르헤의 웃음에 대한 두려움은 인간의 특정 본성, 그러니까 인간 자체에 대한 두려움에서 기인하는 것일 터. 암튼,그는 그 자신에게 너무 잘 어울리는 최후를 맞는다.  세베리노의 시약실에 훔친 독약을 발라놓은 책을 먹기 시작하는 것.

 

“(묵시록의 7번째 나팔)... 내가 곧 무덤이 될 터이다. 그 비밀을 나는 나의 무덤에 봉인하리라!”(853)

 

이로써 자신을  지식의 일곱번째 제물로 바친다. (앞선 제물 중 제일 보고 싶은 것은, 소설 속에 실제로 등장하지는 않는 미남 수도사 아델모이다. 그는 문제의 책을 손에 넣기 위해 베렝가리오에게 속된 말로 몸을 판다. 동성애가 얼마나 공공연히 이루어졌는지 보이는 대목이기도 하다.) 이어, 그의 반응.

 

그는 웃었다, 그가, 호르헤가, 그가 웃는 것을 본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다. 그는 목구멍으로 웃었다. 입술은 웃는 꼴을 하지 못했다. 아니, 웃는 것이 아니라 우는 것 같았다.”(853)

 

그뿐이냐. 노인은 손으로 등잔을 손으로 꺼버리고, 급기야, 제 손으로 장서관에 불을 질러버린다. 불을 진압하다가 지친 윌리엄은 숫제 울음을 터뜨린다. 암튼. 윌리엄은 호르헤에게 하는 말은 여전히 뇌쇄적이다. 

 

이 영감아, 악마는 바로 당신이야!” “... 악마라고 하는 것은 영혼의 교만, 미소를 모르는 신앙, 의혹의 여지가 없다고 믿는 진리... 이런 게 바로 악마야! (...) 봐라, 이 영감은 악마답게 이렇게 어둠 속에 살고 있지 않아! /(....) 널 웃음거리로 만들고 싶다.”(848/49) : “하느님의 손은 창조하지, 감추지는 않는다.”(851)

 

“(호르헤가 가짜 그리스도이다.) 호르헤 영감의 얼굴 말이다. 철학에 대한 증오로 일그러진 그의 얼굴에서 나는 처음으로 가짜 그리스도의 얼굴을 보았다. (...) 가짜 그리스도는 지나친 믿음에서 나올 수도 있고, 하느님이나 진리에 대한 지나친 사랑에서 나올 수도 있는 것이다. (....) 그리고 진리를 위해서 죽을 수 있는 자를 경계하여라. 진리를 위해 죽을 수 있는 자는 대체로 많은 사람을 저와 함께 죽게 하거나, 때로는 저보다 먼저, 때로는 저 대신 죽게 하는 법이다. (...) 호르헤가 아리스토텔레스의 서책을 두려워한 것은, 이 책이 능히 모든 진리의 얼굴을 일그러뜨리는 방법을 가르침으로써 우리를 망령의 노예가 되지 않게 해줄 수 있어 보였기 때문이다.”(871)

 

 

대학 시절, 추석이었나, 설이었나, 암튼, 부산 내려가는 통일호에서 처음 읽었던 책. 한 6시간은 족히 가는, 등받이가 젖혀지지 않아 잠도 자기 힘들었던(등받이가 젖혀지는 무궁화호는 사치였다!) 기차였다. 책 읽는 것 말곤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아무려나, 너무 재미었었던 책. 오죽 하면 이 책을 읽지도 않은 동생이 (내가 떠들었던 내용 때문에-_-;;) 기억할 정도. 다시 읽어도 전율스럽다. 이 참에 훑어본 책. 이런 것도 써주시고, 님은 정말, 르네상스-맨..^^;;

 

 

 

 

 

 

 

 

 

 

 

 

 

 

 

 

 

 


댓글(0)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