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제가 되어버린 천재’, 우리의 영원한 ‘모던 보이’
- 이상(1910-1937), 「날개」(1936)
이상은 저 악명 높은 「오감도」를 쓴 시인이자 섬세한 감성과 예리한 지성, 최고의 문장이 어우러진 「권태」를 쓴 수필가이지만, 소설가이기도 하다. 다분히 자폐적인 ‘나’와 ‘안해’(아내)에 관한 이야기인 「날개」를 모르는 독자는 없을 터이다. 좀처럼 해가 들지 않고 낮보다 밤이 오히려 시끌벅적한 33번지, 대문에서 가장 가까운 7번째 집, 아침에 들었던 “책보”만한 해가 오후에는 “손수건”만해지는 아랫방이 아내의 방이고, 그곳을 통과해야만 들어갈 수 있는 “해가 영영 들지 않는 윗방”이 그의 방이다. 그는 아내의 화장대 앞에서 “유희심”을 채우고(돋보기 놀이, 거울 놀이) 아내의 직업과 돈의 출처를 연구하고 속으론 반찬 투정을 하면서도 아내가 갖다 주는 “모이”를 “닭이나 강아지처럼 (…) 넙죽넙죽” 받아먹는다. 아내가 주는 은화는 마땅히 쓸 데가 없어 벙어리저금통에 차곡차곡 모았다가 변소에 갖다 버린다.
이런 극도의 칩거생활에서 소위 사건이란 그의 야밤 외출과 산책인데, 어느 날 경성역(=서울역)에서 비를 흠뻑 맞는 바람에 꼬박 한 달을 앓아눕는다. 어느덧 따뜻한 5월, 아내의 베개를 벤 채 벌렁 드러누워 “이렇게도 편안하고도 즐거운 세월을 하느님께 흠씬 자랑”하고 싶을 만큼 열락을 누리다가 아스피린처럼 생긴 수면제(아달린) 통을 발견한다. 지난 한달 동안 아내가 자기를 속이고 수면제를 먹여왔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은 그는 밖으로 뛰쳐나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얼결에 또 아내와 ‘내객’의 정사 장면을 목격한다. 이번에는 아내도 가만 있지 않고 그의 멱살을 잡고 살을 물어뜯을 뿐더러, 뒤이어 들어온 ‘내객’에게 안겨가는 와중에도, 밤새워 “도둑질”을 하느냐, “계집질”을 하느냐며 그를 닦아세운다. 그는 “억울”하고 “어안이 벙벙”하지만 그냥 집을 나와 또 경성역을 찾았다가 저도 모르게 “미쓰꼬시 옥상”(신세계 백화점의 전신)에 올라가 있다. 자신이 살아온 “스물여섯 해”를 되짚고 자신과 아내의 “숙명적으로 발이 맞지 않는 절름발이” 관계를 받아들이기로 결심하지만, 아내에게로 돌아가야 할지, 말지는 망설여진다.
그때 뚜- 하고 정오의 사이렌이 울었다. 사람들은 모두 네 활개를 펴고 닭처럼 푸드덕거리는 것 같고 온갖 유리와 강철과 대리석과 지폐와 잉크가 부글부글 끓고 수선을 떨고 하는 것 같은 찰나, 그야말로 현란을 극한 정오다. / 나는 불현듯 겨드랑이가 가렵다. 아하 그것은 내 인공의 날개가 돋았던 자족이다. 오늘은 없는 이 날개, 내 머릿속에서는 희망과 야심의 말소된 페이지가 딕셔너리 넘어가듯 번뜩였다. / 나는 걷던 걸음을 멈추고 그리고 어디 한 번 이렇게 외쳐보고 싶었다. / 날개야 다시 돋아라. / 날자. 날자. 날자. 한 번만 더 날자꾸나. / 한 번만 더 날아보자꾸나.(99-100)
아내가 매춘으로 남편을 먹여 살리되 그 나름의 사랑과 질투가 엄연히 존재하는 이 괴상한 공생 관계는, 화자의 말마따나, 파행적(跛行的)이라고 할 만하다. ‘의식의 흐름’ 기법, 즉 ‘나’의 해롱해롱한 반수(半睡)의 서사가 21세기 독자의 눈에도 여전히 참신하고, 화자의 양식화된 굴욕에는 과연 “위트와 패러독스”가 “바둑 포석(布石)”처럼 깔려 있다. 여기서 ‘날개’란 “의식” 속에 감금된 “일상성”의 상징(이어령)이기도 하고, 세계와의 모든 끈을 잃어버린 화자의 “만남”에 대한 갈구의 표현(김현)이기도 하고, 또 다른 무엇이기도 하겠다. 분명한 것은 이 몽롱함과 모호함이 우리를 영원토록 「날개」로 이끌 것이라는 점이다.
주지하다시피 「날개」는 폐병을 앓던 이상이 배천에 요양을 갔다가 만난 술집 작부 “금홍”을 서울로 불러와 3년 정도 같이 살며 겪은 일을 소설화한 작품이다(소설에 ‘금홍’의 본명인 ‘연심’이 나온다). 그녀와의 ‘만남’과 ‘이별’을 기록한 「봉별기」(1936)는 한결 담백하고 경쾌한 문체와 아이러니가 돋보이는 걸작이기도 하다. 이 두 소설을 비롯하여 1830년대 후반 이상이 쓴 소설 대부분이 금홍, 그리고 그의 정식 아내가 된 변동림(화가 구본웅의 계모의 이복동생인 그녀는 훗날 서양화가 김환기의 부인(김향안)이 된다)과의 체험을 담은 일종의 사소설에 가깝다. 금홍과 헤어진 이상은 요양차 성천(「권태」의 배경)에 갔다가 귀경, 여기저기 비장한 어조로 떠벌리며 “동경”으로 떠난다. “사람이 비밀이 없다는 것은 재산 없는 것처럼 가난하고 허전한 일이다.”라는 아포리즘이 무려 세 번이나 반복되는 유작 「실화(失花)」(1939)에는 이런 낯 뜨거운 고백이 나온다.
“한 개 요물(妖物)에게 부상(負傷)해서 죽는 것이 아니라 이십칠세를 일기(一期)로 하는 불우의 천재가 되기 위하여 죽는 것이다.”(165)
이윽고 동경 땅을 밟은 그가 문우 김기림에게 보낸 편지(1936년 11월 14일)의 첫 문장 역시 한 줄의 시 같다.
“기어코 동경 왔소. 와보니 실망이오. 실로 동경이라는 데는 치사스러운 데로구려!”
이듬해 2월 그는 사상범으로 오인되어 체포, 감금되었다가 건강이 악화되어 4월 17일 동경제대 부속병원에서 사망한다. 죽기 직전 “레몬”(혹은 멜론)을 찾았다는 유명한 일화에서도 “수심(水深)을 몰랐던 나비”의 소위 ‘현해탄 콤플렉스’(김윤식)가 느껴진다.
김해경(金海卿)은 경성고등공업학교(서울대 공대의 전신)를 수석으로 졸업하고 조선 총독부에 취직한 건축 기사로서 그림에도 남다른 재능을 보인 당대 최고의 지식인이자 엘리트였다. 첫 소설(장편 12월 12일)의 소재가 된 약간의 불운(경제적인 이유로 백부 집에 입양됨)을 빼면 사실상 별 다른 문제가 없었던 그가 스스로를 식민지 조선의 “쓰레기, 우거지”(「종생기」)라고 선언한다. 이런 과잉된 자의식이 김해경을 ‘이상(李箱)’, 즉 “상자 속의 인간”으로 만든다. 전도유망하고 말쑥한 건축 기사가 실패만 거듭하는 ‘다방’ 주인에 봉두난발, 폐병쟁이 시인으로 전락하는 순간, ‘날개’ 돋은 한 ‘천재’의 비상이 시작된다. 한데 그의 문학은 애당초 일본어로 쓰인 작품은 물론이거니와 한글 전용의 작품도 식민지 치하의 이중 언어라는 특수한 정황을 고스란히 반영한다. 작품이 발표된 지면의 대부분이 일제의 어용 잡지이기도 했다. 또 이상이 꿈꾸었던 자살(특히 정사(情死)와 동반자살)이야말로 일본식 탐미주의와 군국주의의 표현이다. ‘선진’ 일본을 통해 유입된 저 “도스토예프스키”, “우리들의 레우오치카”(=톨스토이), “고리키”에 대한 치기어린 탐닉, 한껏 겉멋을 부린 외국어 앞에서 참, 만감이 교차한다.
한편, 세계문학사의 맥락에서 이상은 도스토예프스키의 “지하인”이나 흉내 내는 “쓰레기-우거지”에 불과하다. 그런 그가 “박제(剝製)가 되어버린 천재(天才)”를 자처하며 “19세기는 될 수 있거든 봉쇄(封鎖)하여 버리오. 도스토예프스키 정신이란 자칫하면 낭비인 것 같소.”라고 외치니, 얼마나 야무진 “허담”인가. 정녕 이상의 문학과 그의 “이 도도한 천재의식, 자존심이 한갓 센티멘탈리즘에 지나지 않는 것일지라도 우리에겐 소중한 정신적 유산이자 자질”(김윤식)이 아닐 수 없다. “천재의식”이 있다고 천재가 되는 것은 아니지만, “천재의식” 없는 천재는 있을 수 없다. 그리고 온갖 현란한 기교와 모더니티의 압박에도 불구하고 그는 어쨌거나 “한복을 입은 이상”(방민호)이다.
대학 시절의 나를 포함하여 이상의 문학을 “도둑질”하고 “계집질”하고 싶은 충동을 느껴보지 않은 글쟁이가 있겠는가. 한 시절 나의 동년배였던 그가 너무 앳돼서 눈이 시리다! 독자인 우리는 속절없이 늙어가지만 그는 영원히 <친구의 초상>(구본웅, 1935) 속의 파이프 담배를 꼬나문 ‘모던 보이’이다.
____________ 2015년 <책앤> ?? 월호.
계절이 두 번, 세 번 바뀌었나? 아무튼 오랜만에 들어와 기념으로 글 하나를 올린다.
조그만, 그러나 무척한 소중한 지면이었던 <책앤>에 한국문학에 대해 써도 된다고 하여 당장 이상부터 썼다. 그 다음, 염상섭 <삼대>를 쓸 참이었는데 '사회주의'가 나온다는 이유로 퇴짜, 우여곡절 끝에 김유정으로 썼다. 이런 '촌스러운'(!) 이유로 글쟁이의 자유를 구속하다니, 당장 때려치워야지, 했으나, 앞서 말했듯, 지면이 너무 궁한 나로서는 그런 호기를 부릴 수가 없었다. 흠, 그런데, 그만 댕강 목이 잘리고야 말았다.
아주 '지하인'스러운 꼴이 됐는데, 제일 아쉬운 건 그 어디에도 한국문학에 관한 글을 쓸 수 없다는 것. 혹시 언제든 지면이 주어지면, 열~심~히 쓰겠다는 다짐, 무엇보다도, 우리 소설을 (대개는 다시) 읽고 싶은 열망을 여기에 한 번 밝혀둔다.
글을 쓰려고 이상 전집을 다시 읽었다. 대학 시절에는 김윤식 편 전집, 이번에는 권영민 편 전집.(<뿔>이 없어져서 너무 유감스럽다!) 이상 얘기는 언제 또다시 하게 될 터이고. (아마 좀 더 규모 있는 글을 쓸 테고.)
연구서들이며 논문들도(비교적 최근에 나온 신형철의 박사논문까지) 쭉 훑어 보았다. 항상 주눅이 들어야하는(!) 외국문학자로서 모국어로 된 글을 읽고 논하는 국문학자들이 부럽고(!) 특히, 처음 읽은 대학 시절이나 마흔을 넘긴 지금이나 여전히 독자인 나를 감동시키는 김윤식 선생의 글이 놀랍다. 그의 수업을 처음 들은 건 대학 입학한 해인 93년(다들 아는 그 교양 수업이다!), 그 다음 문화적 충격에서 벗어나 정신 좀 차리고(?) 학업과 창작에 열을 올리던 3학년 때인가 4학년때 국문과 전공 수업. (그때 수업 조교가 평론가 손정수였는데, 그 후덜덜한 포스란 ㅋ). 아무튼 돌이켜보니 그때 선생은 환갑도 되지 않은 나이였다.
다들 아시겠지만 마침 팔순을 기념하는 전시회가 있어, 수업 하나 종강한 날 다녀왔다. 정말, 구경 한 번 잘 했다, 여러 모로. 나야 감히 선생의 제자를 자처할 형편도 아니지만, 만 40의 나이조차 넘어가는데 너무 변변찮은 몰골인 것 같아 만감이 교차했다. 참, 누구 말마따나 나이를 먹는 것이 일도 아니다! 그나마 아이 하나 낳은 것이 성취이지만, 이건 학자로서, 소설가로서의 성취는 아니잖나.-_-;; 아무튼 기념으로 제일 무난한 사진 한 장을 올린다. 가장 인상적인 건, 이번에 처음 본, 학사모를 쓴 선생의 사진이었다마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