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그레트헨 비극: 열정의 시험
메피스토펠레스의 인도를 받으며 파우스트는 동화에나 나올 법한 마녀의 집에 도착한다. 그곳, ‘마법의 동그라미’ 안에서 마녀의 약을 마시고 청춘을 되찾은 그는 곧이어 순박한 평민 아가씨 그레트헨(마르가레테)에게 반한다. 한편, 그녀의 입장에서 젊고 잘생긴 귀공자 파우스트가 마음에 든 것은 당연한 일. 파우스트는 메피스토펠레스의 힘을 빌려 선물 공세를 펴며 그레트헨을 집요하게 유혹한다. 처음에는 이웃집 여인 마르테의 집에서 밀회를 갖던 그들이 점점 더 대담해져 그레트헨의 집에서 밤을 보내고자 한다. 이를 위해 그레트헨은 파우스트가 건네준 수면제를 어머니에게 먹임으로써 본의 아니게 어머니를 죽인다. 나아가 순결한 누이동생의 ‘타락’을 알아챈 오빠 발렌틴이 파우스트 일당과 싸움을 벌이다가 사망하는 사고가 발생한다. 훗날 감옥에 갇힌 그레트헨의 말을 참조하면, 이후 그녀는 파우스트와의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를 물에 빠뜨려 죽이고 반쯤 미친 채로 감옥에 갇힌다.
(젊어진 파우스트와 그레트헨)
이것이 이른바 그레트헨 비극(‘초고 파우스트’라고 불린다)의 대략적인 내용이다. 우리의 신파극을 연상케 하는 이 시민 비극은 메피스토펠레스의 기획에서 보자면 죄악과 타락에의 유혹이다. 실제로 파우스트를 사로잡은 그레트헨은 귀족 아가씨도 아닐뿐더러 별로 미인도 아니다(“저는 아가씨도 아니고, 아름답지도 않아요”: 1, 141). 그러니까 파우스트는 그야말로 악마의 묘약, 즉 약기운에 취해 그녀에게 반한 것이다. 하지만 현실적 관점에서 보자면 이것이야말로 사랑의 은유일 수 있으며, 이를 통해 파우스트는 악마의 의도와는 달리 단순한 육적 쾌감 이상의 것을 성취한다. 지고지순하고 숭고한 사랑의 카타르시스와 비극, 이것이 그가 열정의 시험에서 얻은 소중한 체험이다. 1부의 결말이 중요한 것도 이 때문이다.
(청춘, 열정, 뭐, 이런 말 생각할 때 절대 빼먹을 수 없는 작품이죠? 나이 들어 읽으니 딱 한마디면 족하겠더라고요. "명불허전" ^^)
5월 1일 전야, 발푸르기스의 밤이 끝날 무렵, 파우스트는 감옥에 갇힌 그레트헨을 발견하고 메피스토펠레스를 책망하며 감옥에 잠입한다. 형리를 기다리며 불안에 떨고 있던 그녀는 파우스트-하인리히의 등장에 열광하지만 탈옥하자는 그의 권유는 받아들이지 않는다. “도망간들 무슨 소용이 있겠어요? 그들이 절 노리고 있을 텐데요. / 구걸한다는 건 정말 비참한 일이에요. / 게다가 양심의 가책은 어떡하고요? / 낯선 고장을 떠돌아다니는 건 또 얼마나 비참한 일인가요. / 결국 그들이 절 붙잡고 말 텐데!”(1, 246) 보다시피 그레트헨이 도주를 거부하는 것은 비단 “양심의 가책”, 즉 죄책감 때문만은 아니다. 어떻든 그레트헨은 죽음을 택함으로써 오히려 구원받는다. 그리고 2부의 마지막에 ‘속죄하는 한 여인’이 되어 파우스트의 구원과 부활의 순간을 함께 한다.
한데 파우스트의 입장에서 보면 그레트헨을 향한 열정은 그것이 아무리 강렬한 것일지라도 궁극의 지점은 아니다. 즉 “멈추어라! 너 정말 아름답구나!”라는 말은 아직 나오지 않았다. 열정의 비극은 말하자면 청춘의 상징인바, 청년 파우스트는 아직 갈 길이 멀다. 적어도 괴테의 관점을 빌자면, 삶의 절정에 대해 말할 수 있기 위해서는 장년과 노년을 거쳐야 한다.
4. 헬레나 비극: 관료이자 가장으로서의 파우스트
파우스트의 인생에서 장년과 중년에 해당하는 시기가 곧 <파우스트>의 2부 1막-3막이다. 그는 여전히 메피스토펠레스의 도움으로 여러 술수를 부려가며(가령 지폐를 만들어 뿌린다) 왕, 그리고 궁정 귀족 사회와 어울린다. 권태에 찌든 그들이 고대 신화 속의 헬레나와 파리스를 데려오라고 하자 그마저도 얼결에 승낙하고 만다. 이에 메피스토펠레스는 자기는 “이교도”라서 직접 갈 수 없다고 하면서 ‘어머니들의 나라’로 통하는 열쇠를 건네준다. 그곳에서 삼발이 향로를 훔쳐오면 된다는 것이다. 악마의 염려에도 불구하고 파우스트는 목적을 달성하여 궁정 사람들 앞에 헬레나와 파리스를 대령한다. 그러나 그 스스로 헬레나에게 반한 나머지 그녀를 구하겠다고(더 정확히, 질투에 사로잡혀 파리스를 제치고 헬레나를 차지하겠다고) 설치다가 파국을 맞는다. 모든 것이 흔적도 없이 폭발한 것이다.
(사실 파우스트의 '호문쿨루스'와는 직접적인 관계는 없으나 어쨌거나 호문쿨루스, 하면, 이 만화가 떠오릅니다. 파우스트와 메피의 거래가 보여주듯, 이 만화도 등가교환(의 법칙)에 기반하죠. 흠, 요즘 만화볼 시간이 없군요...ㅠ.ㅠ 얘들아, 다들 잘 있냐? ^^;)
실신한 파우스트를 메피스토펠레스는 그 옛날의 실험실로 데려간다. 파우스트의 제자 바그너는 드디어 플라스크 속의 작은 인간(난쟁이), 즉 ‘호문쿨루스’를 만드는 데 성공했다. 태어나자마자 말도 할 줄 아는 이 영특한 녀석은 곧 파우스트의 고뇌를 알아차리곤 그의 치료법을 찾기 위해, 즉 헬레나를 만나기 위해 함께 떠난다. 한편, 헬레나는 트로이 전쟁이 끝난 이후 다시 메넬라오스의 궁전으로 돌아왔으나, 적국의 여자가 되었던 몸이기에 자신의 운명을 무척 걱정하고 있다. 메피스토펠레스(포르키아스로 변신)는 바로 이런 심리적 공황 상태를 이용, 헬레나를 선동하여 파우스트의 궁정으로 데려간다. 마땅한 대안이 없어진 그녀는 파우스트의 청혼을 받아들인다. 그 때, 메넬라오스의 군대가 쳐들어오고 호메로스가 <일리아드>에서 선보인 트로이 전쟁이 괴테의 손으로 재창조된다. 전투장면이 상세히 묘사되지는 않으나, 다음 부분에서 헬레나와 파우스트는 명실상부한 부부가 되어 있으며 아들(오이포리온)까지 두고 있다. 그런데 이 아들이 문제이다. 그는 부모의 사랑과 근심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끊임없는 비상을 꿈꾸며 제멋대로 날뛰다가 결국 이카루스처럼 너무 높이 올라가는 바람에 불길에 휩싸여 추락, 사망하고 만다. 이에 상심한 헬레나는 아들을 따라죽는다. 그녀가 유품처럼 남긴 옷이 파우스트를 새로운 세계로 이끌고 간다.
(헬레나 비극을 읽어내려면 우선 호메로스부터...-_-;;)
대략 이렇게 요약되는 헬레나 비극은 <파우스트> 전체를 통틀어 가장 난해하고 어쩌면 지루한 부분이다. 신화와 알레고리가 현실 속에 너무 깊이 침투해 있기 때문이다. 역사적 과거와 신화적 과거가 뒤섞인 우주적 스케일 역시 혼란을 조장하는 측면이 있다. 단순화시킨다면 핵심은 두 가지인 듯하다. 첫째, 파우스트가 정부 관료로서, 궁정 사회의 일원으로서 모종의 시험을 시도하고 그 과정에서 현실 정치에 대한 비판과 풍자가 부각된다는 것. 둘째, 1부의 청춘의 열정 이후 보다 성숙된 사랑의 시험이 전개되고 그런 만큼 결혼과 가정이라는 제도 속에 진입한 파우스트의 가장으로서의 고뇌가 암시된다는 것. 두 가지 시험은 모두 악마와의 계약의 범주에 드는 것으로서 결과적으로 비극으로 종결된다. 파우스트 입장에서는 새로이 몰입할 대상을, 시험의 대상을 찾지 않으면 안 된다. 그것이 곧 세계 건설이다.
5. 위정자-개발자 비극: 세계 건설의 시험
파우스트는 전쟁을 승리로 이끈 대가로 왕으로부터 영토를 하사받는데, 그곳을 개발하여 지상낙원으로 만들고자 한다. 애초부터 척박했던 이 해안지대에는 필레몬과 바우치스 부부가 살고 있다. 주지하다시피 오비디우스의 <변신 이야기>에서 이들은 제우스와 헤르메스를 정성껏 대접한, 부부애가 돈독하기로 유명한 노부부이다. 이들이 왜 여기 있을까. 일찍이 파우스트는 궁정 사회에 자본을 도입하기도 했거니와 황무지 간척사업에 착수함으로써 근대의 한 측면을 보여준다. 그러나 그것은 마냥 낙관적이지는 않다. 지상낙원 건설이라는 미명 하에 거침없이 개발이 진행되지만 그 때문에 노부부의 터전은 파괴되고 그들도 죽고 만다.
(이런 것도 같이 읽어줘야죠? 헉헉, <파우스트>, 그래서 따라잡기 힘든 작품입니다.)
한데 파우스트는 세속적인 권력욕을 은연중에 숭고한 인류애로 포장하려고 한다. 실제로 그런 식의 승화 작용이 없는 것도 아니다. 그럼에도 근대 세계의 확립이 신화 세계의 와해를 전제로 한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이 양날의 칼과 같은 진리가 위정자-개발자 비극의 핵심이기도 하다. 결국 그는 ‘근심’으로 인해(회색 여인 ‘근심’이 입김을 불어넣고 가버린다) 눈이 멀어버린다. 그 순간에 그가 궁극의 지점에 다다른다는 것은 대단한 역설이다.
파우스트는 해안지대에 수로가 건설되는 소리를 듣는다. 그러곤 곧 지상낙원이 완성될 것이라는 꿈에 젖어 고양된 독백을 늘어놓는다.
“그렇다! 이 뜻을 위해 나는 모든 걸 바치겠다. / 지혜의 마지막 결론은 이렇다. / 자유도 생명도 날마다 싸워서 얻는 자만이 / 그것을 누릴 자격이 있는 것이다. / 그래서, 위험에 둘러싸이더라도 여기에선 / 남녀노소가 모두 값진 나날을 보내는 것이다. / 나는 이러한 군중을 지켜보며, / 자유로운 땅에서 자유로운 백성과 살고 싶다. 그러면 순간을 향해 이렇게 말해도 좋으리라. / <멈추어라, 너 정말 아름답구나!> 내가 세상에 남겨놓은 흔적은 / 영원히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 이같이 드높은 행복을 예감하면서 / 지금 최고의 순간을 맛보고 있노라.”(2, 363-4)
“멈추어라, 너 정말 아름답구나!” 드디어 이 한 마디가 튀어나왔다. 하지만 여기에 상당히 웃긴 반전이 있다. 그를 감동시킨 소리는 수로가 아니라 무덤, 더욱이 파우스트 자신의 무덤을 파는 소리였던 것이다. 정녕 파우스트가 죽음 직전에 다다른 저 황홀경은 자기기만이자 자기 환상에 불과한 것이 아닐까. 그의 영탄 역시도 감정의 자연스러운 토로라기보다는 반쯤은 당위적인 요구였을지도 모르겠다. 왜냐면 파우스트는 이미 너무 늙어버렸기(괴테의 구상에 따르면 100살이다!) 때문이다. 악마와의 계약을 갱신하지 않는 한 더 이상의 삶은 없고, 따라서 더 이상의 시험은 없다.
---- 단순히 제목 때문에 찾아 읽은 이런 소설도 있습니다. 주제상의 유사성은 있을지 모르겠으나 우리의 저 파우스트가 나오는 건 아니고요. 여하튼, 돈 주고 사 봤지만, 누구 말마따나, 돈 줄 테니 읽으라고 해도 읽고 싶지 않은, 너무 지루한(-_-;;) 소설로 기억에 남아 있습니다. 이런 거 번역하신 역자님들은...-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