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창작 강의를 해보고 있지만, 비교(^^;;) 삼아 시를 읽는 시간을 마련해보곤 했다. 거기에 덧붙여 지난 학기부터인가 시도 한 번 올려보라고 했더니 제법 되었다. 그 무렵을 돌이켜 보면 소위 '나의 장르'가 시인지 소설인지 그도 아닌 제삼의 어떤 것인지 잘 모를 때가 아니던가. 소설을 시처럼 쓰는데 막상 써놓은 시를 보면 시 같지 않은 경우도 있어 흥미로웠다. 이러나저러나 너무 오랫동안 시를 읽지 않아(심지어 러시아어문학 쪽도 단 한 학기도 시 강의를 한 적이 없었다!) 처음에는 아주 까막눈이 된 것 같았는데, 자꾸 읽다 보니 슬슬 눈이 뜨이는/열리는 것 같은 느낌(착각?)은 든다.

 

 

 

 

 

 

 

 

 

 

 

 

 

 

 

 

이른바 이런 고전에 덧붙여, 그때그때 신작 시집(혹은 상 받은 시들)을 첨가해본다. 더러 학생들이 소설에 참고한(?), 혹은 그냥 읽고 말해주는 시들을, 시집을 들춰보기도 한다. 뭘 해도 시간은 부족하다. 한데 요즘은 시간의 부족보다는 몸-건강의 부족이 더 아쉽다, 아니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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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학자, 러시아문학자로서(-도) 나는 소설 전공이라 시를 읽지 않은지 참말 오래 되었다. 그렇다는 것을 요 2, 3년간 절감했다. 희곡이야 말할 것도 없으리라. 체호프 희곡 수업을 들으며 극 장르를 좀 공부한 것이 처음이자 마지막. '소년이로학난성'을 실감한다. 정말 늙는 건 일도 아니고 공부(배움)는 끝이 없구나, 너무 어려운 것이다. 게다가 나이 들 수록 머리통이 지진아, 즉 '슬로우 러너'에 가까워지는 걸 절감한다. 하나를 배우면 열을 아는 것이 아니라, 기존에 알던 다른 하나 둘을 까먹는다.(내 아이큐가 정녕 126이냐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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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 벗 하나가 5월부터인가 시를 쓰기 시작했다. 소설가를 꿈꾸던 후배와 시인을 꿈꾸던(실제로 자비로 시집 몇 권을 - 복사집에서 - 찍어낸 이력이 있는) 선배로  학과 사무실에서 처음 만난 것이 93년이었는지, 94년이었는지, 그때 그가 조교였는지, 아니면 지금은 죽고 없는, 그의 동기인 다른 선배가 조교였는지, 모든 것이 뒤죽박죽이다. 그렇게 많은 시간이 흐른 지금, 그가 다시 시를 쓰기 시작했다. 그 결기에, 저돌성에 아주 질려버렸는데(^^;;), 그가 거의 연일 써대는 시를 보면서 '시와 시 아닌 것'에 대해 생각한다. 분석과 평가를 떠나(이건 내 몫이 아니고), 시로 읽히는 것과 그러지 않는(못하는) 것이 있다. '로쟈'의 시는 대부분(특히 문학이나 영화를 소재로 취한 것) '시 아닌 것' 쪽에 가깝게 읽히는데(아니면, 제삼의 어떤 시로 평가될 것인가?) 가끔씩, 미친 척, '그래, 이런 것이 시지!'라는 느낌을 주는 것이 있다. <부화의 꿈>은 요즘 계속 웃으며 상기하는 시. 밑에 두 편은 그가 정녕 러시아문학 전공자임을(-였음을) 보여준다. 특히, 니진스키의 자서전(원제는 '감정')이 생각난다.

 

"이건 아침에 지워야겠다"   

 

 

 

 

 

 

 

 

 

 

 

 

 

 

 

 

북마크하기부화의 꿈                  


세상은 점점 따뜻해져
어제보다 더운 오늘
그리고 더 뜨거운 내일
어미 없이도 계란이 부화한다니
암탉의 품속 같은 세상
숨막히는 사랑이란 이런 거구나
지구가 맘먹고 계란을 품는구나
그래 이젠 부화지
우리 생에 남은 일이라곤
알을 깨고 세상 밖으로 나가는 일
그러니 좀더 버티자
우리가 서로를 꼭 끌어안고
체온으로 체온을 버티는 일
북극의 빙하도 녹인다는 사랑이지
아프리카의 고통을 함께 나누는 사랑이야
마침내 부화할 그날까지
좀더 버티자

그런데
우리가 유정란은 맞아?

 

 

북마크하기지하철에서

 

분명 어제의 구도가 아니다
배치도 다르고 엑스트라도 다르다
오늘의 전철 씬
그러고 보니 나도 엑스트라군
대사가 없다
입 다물고 스마트폰에 열중한다
열심히 문자를 보내는 표정으로
시를 적는다 오늘의
할당량을 채운다
이제 겨우 복역 2개월차
만기 출소는 꿈꾸지 않는다
특별대사면은 혹 모르겠다
다행히 수용소는 아주 넓다
무제한 데이터서비스처럼
이동반경도 무제한
해저터널이 있다면 남미도 갈 수 있다
모스크바에서 안부를 묻는다
뮌헨에서도 문자가 온다
병원도 오갈 수 있다
단지 시를 써야 할 뿐이다
다들 스마트폰을 보고 있다
재소자들의 특징이다
그림시도 있고 노래시도 있고
포르노시도 있다
형량은 다르다
장르도 다르고 스타일도 다르다
각자 복역중이다
다들 모르는 척 시선을 돌린다
나도 전과를 숨긴다
예전에 써봤다고 진술했다
멍청이!
나는 두 배를 써야 한다
전철에서도 쓴다
안약 넣고도 쓴다
무작정 쓴다
살아야 하기 때문에
컷! 이제 다음 장면이란다

 

 

북마크하기머리가 아파서 적는다

머리가 아파서 적는다
아프다고 적으니 아픈 건 아니다
날아다닐 기분이 아니다
말들과 어울리고 싶지 않다
문은 열어놓는다
자동차단기가 달려 있다
마음은 자주 단속해야지
복잡한 마음은 자주 고장이 난다
컴프레서에 문제가 있다
에이에스를 부르는 것도 일이다
세탁소에 들르지 않았군
지난 옷들의 원망을 듣고 싶지 않다
발가락 장난이나 할 때인가
목구멍에도 반창고를 붙여야겠다
이건 썼던 말이다
한번 쓴 반창고를 다시 붙이다니
이건 누가 하는 말인가
말할 기분이 아니다
하고 싶은 말은 꿀꺽 삼켰다
치사량에 못미쳤나 보다
아침이면 또 깨겠군
그럴까봐 새벽에 일어난다
내일은 눈이 아플 예정이다
아니 다시 머리가 아플 것이다
아프다고 적은 걸 어디에 두었나
잘 때는 배에다 붙여놓아야겠다
배가 아프다니 너무 유치하다
차라리 날아다니는 게 낫겠다
요즘은 신경들을 쓰지 않는다
날아다닐 맛이 나지 않는다
추락할 기분이 아니다
무조건 입을 다물어야 한다
나는 단호하게 블라인드를 내린다
양들을 불러모으자
러시아에 가보자
아직 눈이 내릴까 눈 맞을
기분이 아니다 눈꺼풀이 감긴다
이건 아침에 지워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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