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리공주 비룡소 세계의 옛이야기 35
김승희 지음, 최정인 그림 / 비룡소 / 200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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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비문학을 전공한 신동흔은 <살아있는 우리신화>를 통해 '우리 겨레가 섬겨온 가장 중요한 저승 신은 단연 바리'라고 주장한다. 하긴 그의 말대로 언뜻 먼저 떠오르는 저승신은 염라대왕과 저승사자지만, 그들은 명부전 불화 속의 평면적 존재일 뿐이다. 우리 조상이 죽은 넋을 위로하기 위해 신들린 몸짓과 흐느낌으로 부른 이는 다름아닌 '바리공주'.

바리공주는 태어나자마자 부모에게 버림 받는다. 게다가 그냥 버려진 게 아니라 수없이 죽을 고비를 넘긴다. 더워 죽으라고 여름에는 솜저고리에 솜바지를 입히고, 얼어 죽으라고 겨울에는 베저고리에 베바지를 입힌다. 뱀에 물려 죽어라, 대나무에 찔려 죽어라, 바리공주를 죽이기 위해 부모가 들이는 공은 소름끼칠 정도이다. 온갖 수를 다 써도 바리공주를 죽일 수 없자 기어이 상자에 집어넣어 바닷물에 띄워보내는 야박한 부모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바리공주는 병든 부모를 살리기 위해 살아있는 인간으로서는 갈 수 없는 길을 자처한다. 무쇠신과 무쇠지팡이가 다 닳도록 삼천리 땅을 걷고, 열두 바다를 지나, 가시밭길을 건너, 귀신 우글거리는 지옥 너머, 간신히 수양산에 도착해도 고생은 끝날 줄 모른다. 밑빠진 독 물붓기 삼년에, 불씨없는 불 때기 삼년에, 무동자의 세 아들 낳기 삼년, 도합 9년의 고난을 더 거치니 그 한 많은 사연은 가히 눈물을 자아낸다.

여기서 잠깐. 왜 우리의 선조들은 바리공주에게 이토록 수많은 시련을 주었던 걸까. 어떤 경우에도 부모를 위해 효를 다하라는 유교의 효사상은 아닐 것이다. 내 사랑하는 이가 나를 떠나 가버린 저 세상이 어둡고 춥고 삭막하고 외로운 곳이라 한다면 남겨진 이들의 억장은 끝없이 무너지고 말 것이다. 하지만 저승에 바리공주가 있다면? 이 세상 그 어떤 인간보다도 모진 수난과 고초를 겪은 바리공주라면 어떤 상처를 가진 존재가 저 세상에 오더라도 따스하게 안아주고 보듬어주지 않겠는가. 서럽게 죽은 이들을 달래기 위해 우리의 할아버지 할머니는 밑바닥의 밑바닥인 바리공주를 만들어낸 것이다.

현대인의 사고방식으로는 이해하기 힘든, 무가 속에 살아있는 우리 신화 바리공주를 그림책으로 만드는 건 결코 쉽지 않은 작업이었을 것이다. 김승희 시인의 맛깔스러운 말씨도 훌륭하지만, 최정인씨의 화려하면서도 처연한 그림의 공이 크다. 왜 이렇게 무서워, 왜 이렇게 슬퍼, 왜 이리 어려워, 끊임없이 되물으면서도 5살 아이가 끝까지 책을 놓지 않았던 건 단청빛 고운 그림 덕분이다. 다만 아쉬움이 있다면 표지. 서럽고 서러운 어린 바리공주의 우는 모습 대신 무조신으로 화한 온화하고  빛 충만한 바리여신을 표지 삼았다면 좋았을 거라는 생각을 해본다.

* 무가이다 보니 본에 따라 구전되는 내용이 조금씩 다르다. 이 책에서는 바리공주가 무동자의 일곱 아들을 낳고 이들이 나중엔 북두칠성이 된다고 하는데, 개인적으론 3년 동안 세 아들을 낳았다는 게 더 원본이 아닐까 싶다. 칠성신은 저승신이라기 보다 무병장수를 비는 살아있는 자들의 신이기 때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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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돌이 2006-09-18 09: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바리공주 얘기는 아이들에게 읽혀주기에 참 난감하다 싶어요. 전래동화들이 다 좀 그렇긴 하지만 특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