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Encounter Unforgettable
밀회 Brief Encounter
감독: 데이비드 린 주연: 셀리아 존슨, 트레버 하워드
1946, Cineguild 83분, B/W
"...하지만 그 어떤 분석과 비평도 이 영화에 대한 나의 애정과 숭배를 대신할 수는 없다."
- 앤디 매드허스트, '그 특별한 흥분 That Special Thril'
컬트 영화하면 떠오르는 이미지라면 다분히 피와 살이 튀겨 나가는 엽기적인 장면이나 혹은 그 정도 수위를 만족켜주는 기이한 장면들이다. 그러나 앞 뒤 안 가리고 사랑해 마지 않을 수 없는 영화, 그래서 광적인 집착을 하게 되는 영화로서 컬트 영화를 언급한다면, 사실 이러한 의미에서의 컬트 영화에 가장 어울리는 영화는 바로 클래식이다. 아마도 <카사블랑카>같은 고전이 컬트 영화의 고전으로 숭상되는 것 역시 이런 의미에서 가능한 일이다. 걸작이라고는 말할 수 없지만, 그 매력에 무기력해질 수 밖에 없는 영화.
데이비드 린의 46년작 <밀회 Brief Encounter> 는 이런 점에서 완벽한 컬트 텍스트다. 이 영화에 대해 약간의 정보를 가진 분들이라면, 약간 의아해 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밀회>에 대한 컬트적 숭배는 <블레이드 러너>나 데이빗 린치에 절대 뒤지지 않는다. 영화의 대사를 모두 녹취한 사이트는 기본이고, 아예 영화의 배경이 되는 밀포드 기차 환승역 승강장의 역사를 사진 자료와 설계 도면까지 이용하여 제공하거나 영화 속의 모든 공간에 갈 수 있는 여행 경로까지 상세하게 알려주는 엽기적인 팬 사이트에 이르면 이 영화에 대한 숭배는 거의 종교적인 수준이다. 하지만 이 '밀회주의 Brief Encounterism’의 압권은, 이 영화의 영국인 팬들이 모여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밀포드 기차역의 휴게실을 복원하기 위한 이른바 ‘밀포드 휴게소 재건 위원회’까지 만들어 졌다는 BBC의 단신이다. 이 뉴스에 따르면, 위원회장을 주축으로 모인 회원들은 영화 속의 장면 그대로 휴게소를 그대로 복원하여 관광지로 개발할 예정이라고.
하지만 앞에서도 이야기한 것처럼, 영화의 줄거리 정도 되는 사전 정보를 가진 분들이라면, 이 영화에 대한 이런 광적인 애착이 잘 납득되지 않을 수 있다. <밀회>는 간단히 말해 중산층의 유부남, 유부녀 커플이 잠깐의 우연한 만남으로 사랑에 빠졌다가 다시 가정으로 돌아간다는 지극히 진부한 이야기다. 두 아이의 엄마이자 한 남자의 아내인 로라(셀리아 존슨)는 목요일마다 시내에서 쇼핑과 영화 감상을 즐기는 평범한 주부다. 집으로 가는 기차를 갈아 타기 위해 밀포드 환승역에 도착한 그녀는 갑자기 눈에 들어간 석탄 먼지로 고생을 하고, 우연히 휴게실에 있던 중년의 의사 알렉(트레버 하워드)이 그녀를 도와주게 된다. 그 후 우연한 조우로 다시 만나게 된 두 사람은 서로에게 애정을 느끼지만, 두 사람 모두 그 끝이 어디인지 잘 알고 있었다.
극작가이자 작사가인 노엘 카워드의 모노드라마인 ‘오늘 저넉 8시 30분’의 부분인 ‘스틸 라이프 Still Life’를 카워드 본인이 각색한 <밀회>는 원작과 마찬가지로 로라의 플래쉬 백과 일인칭 나레이션으로 진행된다. <콰이 강의 다리>나 <아라비아의 로렌스> 같은 데이비드 린의 걸작을 떠올려 본다면, 그가 이 간질간질한 로맨스를 어떻게 그려냈는지 상상하기가 짐짓 어렵다. 그러나 <밀회>는 그가 위의 영화들에서 보여주던 완벽함에 섬세함이라는 덕목이 더해진 초기 데이비드 린의 성격을 잘 보여주는 영화다. 특히 로라의 독백을 중심으로 전개되는 치밀한 심리적 묘사는 이후 묘한 성적 긴장감을 드러내던 <인도로 가는 길> 같은 영화를 이해할 수 있게 해 주는 부분이다. 거기에 흑백 영화만이 가질 수 있는 궁극의 우아함은 영화 전체를 마치 그림 엽서를 보듯 매혹적으로 만들어 주고 있는데, 특히 밀포드 승강장을 포착하는 린의 카메라는 뤼미에르 형제의 ‘역에 도착하는 기차’가 준 충격에 버금갈 만한 매혹을 선사해 준다. 한편 로라 역의 셀리아 존슨은 이 영화로 아카데미 여우주연상 후보에 오르기도 했는데, 커다란 눈에 당시의 기준으로 미인이라고 할 수 없는 그녀는 환하게 웃을 때 보이는 천진난만함과 무표정할 때의 불안감이 묘하게 교차하는 독특한 이미지와 극적인 고조를 이끌어 내는 보이스 톤으로 영화 전체의 긴장감을 강하게 이끌어 내는 명연기를 보여준다. 이와는 반대로 알렉 역의 트레버 하워드는 거부하지 못할 사랑에 빠진 중년 남성의 부드러움과 신사적임으로 일관하면서, 다소 날카로운 듯한 인상에도 불구하고 로맨스 영화 역사상 가장 이상적인 캐릭터를 만들어 내고 있다.
그러나 <밀회>의 진짜 주인은 바로 노엘 카워드다. 그는 극작가로 그리고 작사가(최근 펫 샵 보이즈나 엘튼 존 등이 그의 원곡을 리메이크한 컴필레이션이 CD와 DVD로 국내에 출시되기도 했다)로 유명한 인물이지만, 성적 정체성으로 인해 우울한 노년을 보낸 인물로도 악명이 높다. 사실 완벽한 이성애 로맨스 영화인 <밀회>에서 카워드의 동성애적 감성을 찾기란 늘 분홍색 벨벳 가운을 입고 집필했다는 일화 등을 제외하고는 표면적으로 쉽지 않아 보인다. 그러나 ‘스크린’ 誌의 필진인 앤디 매드허스트가 상당히 스마트하게 밝히고 있듯, <밀회>는 카워드의 동성애적 감수성이 깊게 배어있는 텍스트다. ‘그 특별한 흥분 That Special Thril’이라는 글에서 매드허스트는 게이라는 이유만으로 <밀회>라는 텍스트에서 카워드가 지워지게 된 과정을 살핀다. 사실 <밀회>는 50년대 초만 해도 카워드의 원작을 각색한 영화로는 최고의 작품으로 인정받았으며, 영국 저널인 ‘사이트 앤 사운드’는 베스트 10으로 선정하기도 했다. 그러나 50년대 영국의 ‘성난 운동 angry movement’가 가진 동성애공포증 적 성격과 결부된 당대의 상황은 카워드의 <밀회>를 데이비드 린과 셀리아 존슨의 <밀회>로 재포장하기 시작했다. (<밀회>의 오프닝 타이틀은 ‘데이비드 린의 밀회’가 아닌 ‘노엘 카워드의 밀회 Noel Coward’s Brief Encounter’라고 되어 있다) 그와 동시에, 카워드라는 ‘게이 작가’가 표면에 떠오르면서 <밀회>는 부르주아 중년의 치기 어린 연애 놀음이라는 혹평을 받기도 했다. 말하자면, 완벽한 이성애 로맨스의 걸작에 게이인 카워드의 작가성이 침투하는 것을 용납하지 못한 셈이다.
그러나 매드허스트는 카워드의 자기성이 전혀 어울려 보이지 않는 <밀회>에서 어떻게 기능하고 있는가를 명석하게 밝혀낸다. 그에 의하면, <밀회>가 가진 폭탄 멜로의 동인이란 바로 달콤쌉싸름함 bittersweetness 이다. 즉, 욕망하기의 달콤함과 그 욕망의 이루어질 수 없음이 가져오는 비애가 바로 <밀회>의 정서적 동인이라는 말인데, 매드허스트는 이를 남성 동성애자들이 가지는 특별한 정서적 양태와 닿아있음을 제기한다. 어찌 보면 이러한 견해는 다분히 근원주의적 발상으로 보이지만, 사랑하지만 사랑하지 말아야 하는 유부남 유부녀의 정서를 마치 바늘로 후비듯 정확하게 폭로하는 카워드의 대사는 사랑하지만 사랑하지 못하는 동성애적 감수성을 근원으로 하고 있다는 설명은 상당히 설득력있게 들린다.
주옥 같은 대사 만으로도 충분히 매혹적인 <밀회>는 사실 그렇게 잘 알려진 고전은 아니다. 오히려 이 영화를 바탕으로 한 다른 로맨스 영화들, 예컨대 메릴 스트립과 로버트 드니로의 <폴링 인 러브>나 <메디슨 카운티의 다리> 등이 더 유명하다. 하지만 <밀회>가 이들 영화에 미친 영향은 단지 불륜의 사랑이라는 플롯이나 기차역 같은 세팅 정도가 아니다. <밀회>는 이제는 아침 드라마 수준으로 전락한 소재의 근원과 같은 영화이지만, 역설적으로 그 진부한 소재를 가장 세련되게 그려낸 영화다. 고전이라고 보기에는 지나치게 세련된 대사, 그리고 상실의 감정을 이끌어내는 절묘한 설정, 그리고 시작만 해도 눈물이 주르르 흐를 것 같은 라흐마니노프 피아노 협주곡 2번 2악장처럼, 이후의 어떤 로맨스 영화도 따라오지 못하는 그만의 아우라를 지니고 있는 컬트 중의 컬트 고전이다. <밀회>는 이후 소피아 로렌과 리차드 버튼 주연, 앨런 브리지스 감독의 TV 용 영화로 리메이크되기도 했는데, 구질스럽게 첨가된 설정에 카워드의 오리지널 대사를 삽입하면서 원작보다 못하기는커녕 아예 원작을 훼손해버렸다는 악평을 듣기도 했다. 이 리메이크 판에 대한 신랄한 혹평 하나는 원작에 대한 광적인 숭배를 그대로 드러낸다. "나는 <밀회>를 보고 왜 사람들이 이 영화에 그다지도 열광하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나는 내가 본 것이 오리지널이 아닌 리메이크임을 알고 원작을 다시 보았다. 물론! 원작을 최고의 걸작이었고, 나는 연신 눈물을 흘렸다. 리메이크 역시 원작의 설정을 그대로 따라간다. 소피아 로렌은 중년의 의사 리차드 버튼과 사랑에 빠진다. 과연 소피아 로렌은 가정을 버리고 사랑을 선택할 것인가? 젠장! (원작을 이렇게 말아먹었는데 소피아 로렌이 바람을 피우건) 누가 신경이나 쓴대?”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