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편 후배중 대학을 졸업한 뒤 부모님 모시며 살겠다고 농사지으러 간 이가 있다.
참으로 축복할 일은 철딱서구니 없다 했던 그의 여자친구가 기꺼이 그를 따라나섰던 것.
한동안 '초보 농부의 초보 아내'가 동문회 게시판에 올리는 요절복통 사건 덕분에 무척 즐거웠는데,
두 아이의 엄마가 되더니 바빠서 그런가 영 소식이 없어 궁금해했다.
그런데 얼마전 '농부'가 하룻밤 재워달라는 전화를 해왔다.
WTO 홍콩투쟁 가는 길인데 준비 때문에 남들보다 하루 먼저 올라왔고,
경비가 빠듯하여 하룻밤 숙박비라도 아껴야겠다는 청.
반갑게 그를 맞이하긴 했지만, '농부'가 그런 투쟁을 간다니 어째 낯설게 여겨졌다.
맥주 한 병 나눠먹으며 그간 사는 이야기를 두런 두런 풀어놓는데, 온통 죽는 얘기뿐이다.
마트에서 산 우리집 쌀이 영 글렀다며 좋은 놈으로 한 가마 올려보내겠다고,
경기미가 진상미인 건 한양과 가까워서 그랬던 거고, 남도 곡창도 무시못한다며 큰소리친다.
작년에도 철원쌀이 1등 먹지 않았냐고 은근히 아는 척 거들었더니,
슬그머니 인정하면서도 올해는 비가 많이 와 철원쌀 품질이 떨어졌다고 한 소리 붙인다.
비 때문에 죄다 벼 쓰러지고, 기계 망친다고 추수 콤베인도 안 들어오는 바람에,
지난 가을에 농부 하나가 농약 먹고 죽었다는 뉴스 못 봤냐고도 덧붙인다.
일순 분위기가 너무 가라앉어 요새 마을엔 재미난 소식 없냐고 이야기를 돌렸다.
두런두런 동네 이야기를 고향 소식처럼 듣다가 문득 전화를 한다.
"**형 들어왔냐? 우이, 전화가 왔다고. 그나마 다행이구마.
그래도 모르니까 내일도 안 들어오면 뒷산이랑 선산 묏등이랑 잊지 말고 올라가봐라, 알겠제?"
고향 선배 하나가 며칠전 마누라랑 싸우고 집을 나간 뒤 소식이 없어 걱정이었는데,
혹시나 해서 아침 저녁으로 동네 야산을 뒤지고 다녔단다.
오늘은 자기가 길을 떠나서 행여 큰일날까 걱정했는데 다행히 전화통화가 됐다니 그나마 안심이란다.
아직 자기 논이 거의 없어서 소작을 부치는데,
그 형이 가장 크게 힘쏟던 땅을 올해 외지인이 돌릴 작정으로(용도 전환) 갑자기 놀리겠다는 바람에
새로 소작을 알아볼 새도 없이 한해 농사를 봄부터 글렀다는 거다.
실성이라도 한 듯 제 땅조차 제대로 안 돌보고 일년 내내 술만 퍼마시고, 부쩍 부부싸움도 하고,
그러다 갑자기 사람이 없어졌으니 산자락을 안 뒤질 수 있겠냐는 거다.
몇 년 전에도 비슷한 상황이던 사람이 기어이 겨울을 못 넘기고 못맨 적이 있었는지라 따라갈까 걱정이란다.
이경연 회장님처럼 할복자살하고, 전용철씨처럼 맞아죽은 사람만 농부가 아니라,
높아지는 자살률에 가장 일조하는 게 바로 우리 농부라며 넋두리를 하는데, 그저 겁이 더럭 났다.
다음날 짐싸들고 나가는 '농부'에게 경비도 못 보태주고
덩치큰 여행가방 대신 튼튼하고 큼직한 등산가방으로 바꿔들게 하고,
올 때도 꼭 들렸다 가라 신신당부하는 거 밖에 못 했는데,
전 세계를 떠들썩하게 한다는 WTO 한국농민시위가 어째서 우리나라 뉴스에는 찌질하게만 나오는지
그저 답답하고 열이 날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