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중가요 중에 '하늘'이란 노래가 있다.
프레스에 찍힌 손 가슴에 부여잡고 병원으로 갔을 때
붙일 수도 병신을 만들 수도 있는 의사 선생님은
나의 하늘, 하늘이다.
두 달째 임금 막히고 노조를 결성하다 경찰서에 끌려간
죄 없는 우리들을 감옥에 넣겠다는 경찰 나리들은
나의 하늘, 하늘이다.
나는 누구에게 하늘이 될까 힘없이 살아온 내가
우리 아가에게는, 그 사람에게만은
흔들리는 하늘이겠지
아! 우리도 하늘이~ 하늘이 되고 싶다
흔들리는 먹구름 하늘이 아닌, 서로를 아껴주는
아! 우리도 하늘이~ 하늘이 되고 싶다
서로가 서로에게 하늘이 되는 그런 세상이고 싶다
내가 참 좋아하는 노래 중 하나인데, 그 가사가 어찌나 실감이 나는지
'하늘'이나 '짤린 손가락'을 듣거나 부르다 보면 슬그머니 울기도 잘 했다.
더 이상 '맑고 높고 푸른 하늘'을 노래 부르는 어린이가 아니라는 것,
나 역시 누군가의 하늘이 되어주어야 한다는 것이 참으로 버겁게 여겨졌고,
누구는 하늘로, 누구는 땅바닥을 기어 다니는 버러지로 살아야 하는 게 분노스러웠다.
'천공의 섬 라퓨타'나 '걸리버 여행기'는 현실의 좌절감으로 다가오기도 했다.
그렇게 '하늘'은 내게 정말 많은 의미를 가진 단어가 되었다.
근년에 '하늘'에 대해 좀 더 생각할 기회가 두 차례 있었다.
한번은 '다모'에서.
"백성의 하늘이 아니라면 그 하늘도 벨 것이다"
딱 1번 지하철 TV를 통해 재방송을 본 게 전부이지만,
자막으로 나온 이 대사만은 외어버렸고, 나름대로 '다모' 팬을 자처한다.
또 한 번은 '노란 우산'.
이제는 시디를 들으며 노래를 따라부르는 것이 아니라,
책의 가사를 보며 노래를 부르는 딸아이를 볼 때마다,
내가 이 아이의 하늘이라는 생각과 함께,
이 아이도 우산 하나 펴 들 하늘은 있을 거라 낙관하기도 하고,
최소한 우산 하나 접을 하늘을 줄 수 있는 세상이길 바라게 된다.
아이들의 하늘을 위해 우리가 하늘을 벨 날은 언제일지.
아마도 그 건 어느 한 순간의 청천벽력이 아니라, 차근차근 바벨탑을 쌓아올리는 나날이어야 할텐데.
하늘은 높기도 높지만 넓기가 너무 넓어서
위태위태하게 한줄로 블록을 쌓는 것이 아니라, 넓게 넓게 기단부터 다져야 하는데,
하늘로 치솟아오르는 탑의 체감률이 보고 싶어 안달복달하게 되니 이 것 참 큰일이다.

* 태교 음악으로도 '노란 우산'을 강추해드립니다.
<그 외 리스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