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새 90년대에 대한 회고조 이야기가 웅성웅성하다.

'응답하라 1997'이라는 드라마가 VOD 매출 1위이고,

올해의 폭염이 아무리 힘들어도 1994년도보다는 덜 하다고 비교된다.

아, 그리하여 나도 마구마구 추억한다.


1994년 난 학생생협 조합장이었고, 그 해 내가 만진 현찰이 아마 내 평생 만질 현찰보다 많을 거다.

그해 난 자그마치 서울시에서 상을 받았는데, 청소과에서 선정한 분리수거모범상.

그 상금으로 디자인 공모전을 열어

유독 삼각지붕이 많은 우리 학교 건물을 모티브로 한 분리수거함을 만들어 학교에 설치했더랬다.

여성학과 대학원 진학을 준비하며 했던 스터디도 참 기억난다.

맨날 발제 준비 제대로 안 해온다고 언니들에게 많이 혼났었는데...

결혼, 이혼, 출산은 커녕 연애 경험조차 없는 니가 무슨 젠더를 논하냐며 놀림도 많이 받았고...


아, 그러나 1994년의 기억은 무엇보다 그 뜨거웠던 여름...

지금은 철거된 (구)학생회관에서 선풍기 하나 없이 땀 뻘뻘 흘리며 진행했던 학자학교,

생전 처음 가 본 광주가 학생처 선생님과 동행했던 조선대 생협학교라는 아이러니.

김일성 주석 서거후 조문파동과 범민족대회 내내 우리를 따라다니던 헬기...

80년대 초반 이후 집회 진압용으로 헬기가 다시 동원된 게 10년만이라고 했던가.

헬기에서 뿌려대는 최루액과 형광액으로 인해 온 몸에 생겼던 발진은

지독한 폭염에 의해 온통 수포로 악화되어 진물이 질질 흘러내리기 시작했고,

한참 나중에서야 찾아간 피부과에서는 이 정도면 2도 화상 이상이라며 혀를 찼더랬다.

그 해 이후 여름마다 헬기가 뜨는 건 일상이 되었고, 가장 끔찍했던 게 바로 1996년.


누구는 1997년을 젝스키스와 HOT 팬간의 패싸움으로 기억하는데,

우리에게 1997년은 연세대 항쟁 혹은 연세대 사태 이후일 뿐이다.

막판에는 단전단수된 건물에 갇혀 이대로 쥐도 새도 모르게 살해당할 수 있겠구나

마지막으로 어머니에게 전화라도 한 통 해야 하나 갈등했던 시간들...

간신히 탈출에 성공한 뒤에는 그 안에 남겨진 사람들에 대한 죄책감에 울었고,

그 날 이후 한총련은 이적단체로 낙인찍혀 전국의 모든 학생회장이 탈퇴를 종용받고 수배자가 되고

형사들이 학교에 상주하고 수시로 전경들이 학생회관을 뒤져 싹쓸이하고...

그 악몽의 시간들 속에서 우리들은 한없이 움츠려들고 한없이 헤매고 누구는 떠나고 누구는 싸우고

길고 긴 악몽의 정점이... 97년 추석... 모 은신처에 숨어 있다가... 뉴스를 듣고야 말았다...

김준배 열사의 죽음... 아무 것도 판단할 수 없었다... 무조건 광주로... 광주로...


쓰다가 북받쳐 숨겨버린 줄 알았는데... 지금도 어떻게 마무리지어야 할 지 모르겠는데...

뒤죽박죽 얽힌 감정을 차마 다 적지 못 하고...


난 가만히 중얼거린다.

응답하라 1997이여, 응답하라 청춘이여, 응답하라 통일이여, 대답해줘요, 준배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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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이에자이트 2012-08-09 23: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연세대에서 대규모 시위가 벌어지고 헬기 뜨고 그 사건 말이죠? 외신에서도 크게 다루고...그런데 그 사건은 1996년 8월에 일어났어요.김준배 씨 사건은 제가 사는 광주에서 일어났으니 기억하는데 1997년 9월이고요.두 사건 시간 차이가 1년이 넘어요.

조선인 2012-08-10 08: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이 글이 공개되어 있었군요... 어제 회사에서 일하다 순간적으로 흥분하여 썼던 페이퍼라... 뒤죽박죽인데... 네, 노이에자이트님의 말씀이 맞습니다. 96년 연세대의 범민족대회와 97년 추석 때 준배형...

책읽는나무 2012-08-10 16: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며칠 간간히 읽고 있는 책에서 학생운동 이야기를 기억하며 회고되고 있는데..
음~~ 님의 페이퍼도 그책을 읽고 있는 듯한 기분이군요.
80년대와 90년대.
님의 그때 그심정들이 고스란히 전해져오는 듯해요.
그리고 지금의 심정들도..
나는 그때 정말 무얼하고 살았었는지..ㅠ

94년이 더웠다니..지금 추억하니..그래서 더웠구나~~ 뒤늦게 끄덕끄덕~
근데 왜 지금 더덥게 느껴지는거죠?


조선인 2012-08-10 17: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음, 더 더운 건,,, 우리가 나이를 먹어서??? 체력이 떨어져서???^^;;

토토랑 2012-08-23 15: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옷~ 탈출에 성공하셨드랬군요!!!
그런 사람이 많을 수록 다행이지요..

저는 난중에 조서잘못쓴 덕택으로..
96년 겨울까지 엄마랑 같이 북부지법으로 판사님앞에서 잘못했다고 빌고 -_-;;; 쳇..
경찰차 집에 두어번 오고.. 덕분에 무슨 종이 이런거 다 태우고..

97년 여름 방학이 될무렵.. 엄마가 먼저 인도행 비행기표를 끊어서 주시더군요. 여름방학때 또 어디 갈까봐.. 덕분에 콧바람은 잘 쐬고왔지요..모...

조선인 2012-08-24 09: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토토랑님, 그 시절 우린 무얼 그렇게 잘못한 게 많았을까요... 지금 생각해도 억울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