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히 여자는 애 낳고 나면 머리도 나빠지고 건망증이 심해진단다. 이는 출산퇴직의 정당화 논리로 사용되기도 하고, 여자들 스스로도 실수할 때마다 써먹는 변명거리기도 하다. 그러나 이 명제는 명백한 거짓이다. 진실은 결혼과 출산후 여자가 기억해야 하는 사실이 점점 더 많아진다는 사실이다.

결혼을 하게 되면 남과 여는 양가 집안의 가계도와 생일, 기념일, 특유의 집안행사 등에 관한 정보를 교환한다. 그런데 대개 남자들은 악필이기에, 혹은 여자가 달력을 골랐기에, 새 달력에 각종 기념일과 행사를 적어두는 일은 여자 몫이 된다. 그렇게 몇 년이 지나면 남자는 자신의 부모 생일조차 마누라에게 물어보며, 여자가 "어머, 그러고보니 이번주에 어머님 생신이 있네, 어쩌지 돈이 없는데"라고 대답하면, 남자는 칠칠맞다고 핀잔한다. 그동안 여자가 결혼기념일, 옆지기와 아이의 생일, 조카 돌 혹은 초등학교 입학일, 어린이날, 어버이날, 추석, 설 등등을 다 알아서 챙긴 것은 안중에 없다.

연애할 때 남자가 카드사고를 낸 적이 있다. 신용불량자가 될 정도는 아니었지만, 몇 달간 돌려막기를 하네 어쩌네 고생을 했다. 더욱이 결혼 턱을 낸다며 흥청망청 술자리가 이어지길래 결국 모든 카드를 압수했다. 그 결과 자연스레 돈 관리는 온전히 내 몫이 되었다. 즉 온갖 공과금, 보험료, 세금, 관리비, 보육료, 아파트 이자, 신랑과 나의 통장정리, 때때로 날라오는 벌금통지서까지 모두 내 몫이 되었다는 뜻이고, 내가 온갖 납부일과 각종 통장의 비밀번호를 외워야 한다는 뜻이다. 옆지기는? 자기 용돈 계좌의 비밀번호만 달랑 외우면 끝이다. 그런데도 옆지기의 인터넷뱅킹 비밀번호를 까먹어 은행가야할 일이 생기면, 그거 '하나' 못 외워 번번이 사람 귀찮게 한다며 타박먹는다.

가사노동을 분업할 때 당번제로 돌아가며 하는 경우가 드물다. 대개 일의 종류에 따라 나누게 되는데, 우리집의 경우 빨래와 다림질과 분리수거/쓰레기는 옆지기, 요리와 청소, 음식물쓰레기는 나, 이런 식이다. 그런데 생활속에는 딱히 어느 영역에 속하지 않는 자질구레한 일거리가 많다. 특히 '정리'에 해당하는 것들. 철따라 옷장을 정리하고, 손님치룬 후 싱크대를 정리하고, 일년에 한두번씩 광을 정리하는 꽤 큼직한 일거리는 물론이거니와 매일같이 아이의 장난감상자와 책장과 가방을 정리하고, 외출하고 돌아와 들고나갔던 짐들을 정리하고, 장봐온 물건을 정리하는 등 매일같이 소소하게 정리할 것이 많기도 하다. 소속이 불분명한 일거리는 보통 여자 몫으로 떨어지는 경우가 많은데, 온갖 물건을 정리하다 보면 내가 뭘 어디에 뒀나 까먹는 경우가 종종 생긴다. 모 드라마에서 여주인공이 리모콘을 냉장고에 넣는 에피소드가 있었다는데, 내 추리상 여자는 분명 리모콘을 뺀 나머지 모든 물건을 제자리에 정리해뒀을 것이다. 아님 말고.

외출을 할 때, 남자는 제 밥 먹고, 제 몸 씻고, 제 옷 챙기고, 제 소지품 챙겨 세차하러 간다. 그 사이 여자는 식구의 식사를 챙기고, 아이와 함께 씻고, 음료수와 간식과 아이 여벌 옷과 장난감과 동화책과 수건과 물티슈 등의 짐을 싸고, 경우에 따라 상대에게 줄 선물/부조금과 그늘막과 돗자리 등까지 바리바리 싸고, 제 소지품 건사하고, 가스며 수도며 전기며 창문이며 문단속까지 한다. 그런데도 막상 차에 타고 나서 가스밸브를 잠갔는지 아닌지 핸드폰을 가방에 넣었는지 아닌지 헷갈려 하면, 여자 머리는 바로 닭000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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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oninara 2004-08-23 16: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조선인님과 텔레파시가 통했네요...
여자들은 멀티 플레이어죠..우리남편도 외출할때 본인 챙기고..아이 챙기는거 조금 도와주면 끝이고..전부 제가 챙긴후에 나가야하는데..머릿속이 복잡해서 출발한후에 미진한것이...현관문 잠갔나? 가스불 껐나?부터 줄줄이 고민이 시작되어요..

sooninara 2004-08-23 16: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리고 남자들은 집에 와서도 텔레비젼 보다 자면 끝이지만 여자들은...끝이 없죠....
건망증도 우리가 잘 살기 위한 뇌의 적응이라니깐...적응해서 살아 보아요^^

가을산 2004-08-23 16: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맞아요! 마지막 단락은 제가 늘 우리 남편에게 강조하는 대목입니다!!

다만..... 이제 아이들이 좀 커서 챙길게 적어지고 있기 때문에......
다음 핑계는 무엇으로 댈까 궁리중입니다. ^^

마냐 2004-08-23 16: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요즘 조선인님의 일련의 시리즈는 제가 아니라, 울 옆지기가 봐야 하는데...쩝.

조선인 2004-08-23 18: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수니나라님, 안그래도 님의 글을 보고 끄적이게 된 겁니다.
가을산님, 다음 핑계가 궁리되면 꼭 저에게도 알려주시길.
마냐님, 님을 생각하면 얼른 올림픽이 끝났으면 좋겠어요. ^^

ceylontea 2004-08-23 19: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맞아요... 여인네들은 할 일이 너무 많아요.. 어딘가 외출을 하려고 하면 전 정신없이 바쁜데.. 남편은 너무 한가하단 말입니다.. 그리고 그 바쁜 와중에 무엇인가 거들게 하려면 끊임없이 말해야 하잖아요.

조선인 2004-08-24 07: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따우님, 제가 화장을 안 한다는 사실에 얼마나 안도하는지.
실론티님, '무엇인가 거들게 하려면 끊임없이 말해야 한다' 바로 그거거든요.
흑흑흑 왜 이리 동병상련이 많은지.

waho 2004-08-25 22: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음...무지 공감하며 추천 한표!
전두 꼭 현관문 잠궜는지 기억이 안나서 다시 가서 확인하고 와여하는데...요즘은 울 남편 이 답답한지 가스도 잠그고 문도 잠그고 그래요.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