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리 국어사전 - 남녘과 북녘의 초.중등 학생들이 함께 보는
토박이 사전 편찬실 엮음, 윤구병 감수 / 보리 / 2008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어린이사전으로서의 완성도, 정말 뛰어나다. 보리답게 세밀화를 넣은 정성은 가히 탄복이 나오고. 북녘말을 넣은 마음씨도, 동식물도감 수준에 달하는 뜻풀이도 나무랄 데 없다. 그런데 말이다. 난 정말 많은 기대를 했던 것이다. 보리 국어사전은 심지어 '중립적'이기까지 할 거라고 기대를 품었던 게다.

무슨 소리냐고? 에, 그러니까 혹시 여성민우회에서 하는 '호락호락 캠페인'을 아시는지? 여성이 여성에게 쓰는 호칭 바꾸기를 목적으로 하는 이 캠페인은 기존의 호칭안에 불평등한 가족문화가 내재되어 있음을 깨닫고, 새로운 말을 통해 새로운 문화를 만들자는 목적으로 진행되고 있다.
생각해보면 억울하지 않은가? 시부모는 아버님, 어머님인데, 친정부모는 왜 딸랑 아버지, 어머니인지. 남편의 손아래 형제에게는 아가씨, 도련님, 서방님, 존대를 해야 하는데, 아내의 손아래 형제는 처제, 처남일 뿐이며 말을 낮춰도 되는지.

그런데 어디 가족내 호칭뿐이랴? 이 세상에 불평등한 말은 얼마나 많은가. 누구는 의사 선생님, 변호사 선생님이고, 누구는 기사 아저씨, 수위 아저씨인가. 우리집은 큰애가 딸이고 작은애가 아들인데도 내가 우리 딸아들이라고 하면 이상하다는 실소를 받아야 하는가.

이렇게 까칠한 나로선 문득문득 마뜩찮은 뜻풀이를 보게 된다. 마귀는 사람에게 해를 끼치는 못된 '귀신'인데, 마귀할멈은 요술을 부리면서 못된 짓을 '일삼는' 늙은 '여자'란다. 마녀는 마술을 부려서 사람에게 해를 끼친다는 '여자'인데, 마인이나 마왕의 뜻풀이는 굳이 안 실었다. 늑대는 늑대일뿐이지만, 불여우에는 못된 꾀로 남을 흘리는 여자를 빗대어 이르는 말이라는 설명이 친절히 덧붙었다.

나는 자꾸만 '보리'에게 바라게 된다. 다른 국어사전에는 언감생심 기대도 안 했기 때문에 바라지도 않았다. 하지만 보리라면, 다른 누구가 아닌 보리라면, 우리말을 더 평등하게 가꾸는 일에도 이바지할 수 있지 않을까? 여자로서, 아줌마로서, 딸과 아들을 함께 키우는 애엄마로서, 난 자꾸만 자꾸만 '보리'에 바라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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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from 조선인과 마로, 그리고 해람 2009-11-13 11:00 
    보리출판사 게시판에 올린 글, 보강하여 다시 올립니다.  안녕하세요. 우선 김미혜 토박이사전편찬실 대표님이 '간행물문화대상' 저작상을 수상하신 것, 축하드립니다. 신문기사를 보고 당연한 성과라며 저 혼자 흐뭇해 했습니다. 그러다 문득, 지난 달 일이 생각나 잊기 전에 몇 글자 끄적이고자 합니다. 아이 초등학교 입학선물로 이래저래 각종 사전을 구비해두었으나, 실제 활용하는 사전은 '한자어 속뜻사전'과 '보리 국어사전' 뿐입니다. 특히
 
 
순오기 2008-07-16 09: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호~ 충분히 공감되는데요~~ 추천 한방!
나름대로 아이들에게 그런 부당함이나 편견을 바꿔야 한다는 걸 인식시키려고 노력하지만...아직도 멀기만 합니다.ㅜㅜ

마노아 2008-07-16 16: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 감탄했어요. 그런 부분은 생각을 못했네요. 변화를 바라는 마음으로 추천이에요!

조선인 2008-07-17 08: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순오기님, 우리 딸아들은 좀 더 평등하게, 평화롭게 ^^
마노아님, 전 마노아님에게 Thanks to 했답니다. 으쓱~

마노아 2008-07-17 14:41   좋아요 0 | URL
아앗, 그랬군요. 캄사함돠~

조선인 2008-07-18 09:00   좋아요 0 | URL
홍홍

bookJourney 2008-07-18 18: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가씨, 도련님, 서방님, 존대에, 처제, 처남은 말을 낮추는 ... 결혼하고 처음 느꼈던 불합리였지요. 물론, 찍소리도 못하고 존대하며 살지만 말이에요. ㅠㅠ

조선인 2008-07-21 08: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불행 중 다행(?)은 애아빠에겐 처제나 처남은 없고 처형만 있다는 거죠. 호호호

hanicare 2008-09-01 11: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가씨,서방님,도련님은 어떤 집 종이 주인 자식들에게 쓰는 말이죠.
홍길동이 배다른 정실자손인 형에게 도련님이라고 불러야 해서 울분을 토한다는.
일단 시집은 시댁이고 처댁은 처가이지 않습니까.

하긴 며느리라는 말 자체가 아들에게 기생한다는 뜻이니 뭐....
이 땅의 여자들은 시집과 동시에 시집의 종(?)쯤 되는 지위로 격하되는 것일까.

제 아무리 정치적으로 올바른 척, 진보적인 척,의식있는 척 하는 국내산 남자들도 자기 집 엄마와 얽히면 십중팔구 수구보수가 되더라. 후훗.

조선인 2008-09-01 16: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시댁, 처가, 며느리, 이런 말도 다 교정되어 있는 국어사전이 나오면 정말 좋을텐데 말이죠.

sulfur 2009-04-15 01: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한 가지. 원래는 처제한테도 쉽게 말 놓는 거 아니래요. 적당히 높여주는 거라고 하던데요. 잘 몰라서 사람들이 그러는 거죠.

조선인 2009-04-15 08: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sulfur님, 국립국어원에서는 기사아저씨가 아닐 기사선생님이 더 맞을 거라고 친절히 설명해준 바 있습니다만 현실과는 참 멀잖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