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7년 12월 선정도서.친절한 복희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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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절한 복희씨
박완서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7년 10월
평점 :
감히 큰소리치건데 아무리 훼밍웨이라도 나이 스물에 '노인과 바다'를 쓸 수는 없었을 거다. 그 곳의 나이 개념이 어떤지는 모르겠지만 환갑을 목전에 뒀기 때문에 가능했던 소설이다. 나이 한 살을 더 보탠다고 해서 반드시 연륜이 생기는 건 아니기에, 필력이 더 총총해지고 삶의 깊이와 시각이 더 서늘해지는 작가를 가지는 건 행운이다.
하물며 근현대의 미칠 듯한 소용돌이 속에서 '아녀자'로 살아남아 '여류작가'로 늙어가는 박완서씨가 있다는 건 우리 한국아줌마의 행운이다. '아녀자'니 '여류작가'니 절로 눈살이 찌푸려지는 낱말로 그녀에게 존경을 표한다는 게 심히 민망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어머니와 동년배인 그녀가 있어 난 아, 다행이다, 정말 다행이다, 되뇌게 된다.
내 어머니는 30년생으로 경상북도 예천에서 태어났다. 양반가의 핏줄이라고 하지만 산골짝 마을에서 훈장이나 하던 할아버지에게 뭔 재산이 있었겠는가. 자식 욕심은 많아 줄줄이 아홉을 낳았고, 그 중 장녀가 울어머니였다. 태어날 때부터 약해빠졌다고 제때 출생신고도 안했던 여식이지만, 장남과 동생들 뒷바라지하라고 열두 살부터 공장에 내보내졌고, 그러느라 혼기를 놓치자 뒤늦게 10살이나 많은 노총각에게 시집보내졌다. 아들 둘을 연년생으로 낳은 뒤엔 먹고 사느라 난닝구 보따리 행상을 했고, 나를 낳은 직후 서울에 올라와 억척스러운 동대문 아줌마가 되었다. 못 배운 게 한이 되어 자식 셋을 모두 대학에 보내고 시집장가 보내고 이젠 드디어 살만하다 싶을 때, 꼭 그럴 때 돌아가시는 게 부모님인 거고, 우리 어머니도 그랬다. 이게 우리 어머니의 평균치의 밥상에 대해 내가 얘기할 수 있는 대강이다.
그런데 박완서씨는 나보다 더 내 어머니 이야기를 구구절절 풀어낸다. 어쩌면 그녀는 내 어머니의 동숙이인가 보다. '촛불 밝힌 식탁'을 읽으며 비로소 알았다. 우리 어머니가 그리 바라셨던 게 '불빛을 확인할 수 있는 거리'였다는 것을. 어머니는 오빠나 나의 사정을 알아들었다고 생각했지만, 당신이 그리 서둘러 간 걸 보면 받아들이지 못했었다는 것을. 하기에 친절한 복희씨를 읽는 건 불편했다. 어머니가 안방을 잠그던 날의 기억이 바로 어제처럼 징그럽게 떠올랐기 때문이다.
우리에겐 그렇게 박완서씨가 있다. 자식 키우는 입장이 되어서야 뒤늦게 제 어미의 품을 그리는 머리 까만 짐승들에게, 너무나 늦게 철들기 시작한 딸들에게 이 땅의 어머니들 이야기를 가만 가만 펼쳐내주는 박완서씨가 있다. 그래서 이 땅의 어머니들은, 이 땅의 딸들은 참 다행이다. 정말 다행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