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 미친 코리아~!
<대한민국이 미쳐가고 있다>의 매력
2006.06.05 / 한승희 기자 

<불타는 필름의 연대기: 대한민국이 미쳐가고 있다>라는 다큐멘터리가 전국 순회 상영 중이다. 16가지의 칼날 같은 목소리가 미친 코리아를 증언한다.

강원도 원주시 북원여자고등학교 1학년생인 박소라 씨는 “청소년으로 이 나라를 살아가면서 답답한 게 너무 많다”고 말한다. 인터넷에 뜨는 이야기들은 정신이 없고, TV에서 보는 뉴스는 일관성이 없다는 게 그의 생각이다. 언제는 황우석을 위대한 과학자라고 하더니, 몇 달 지나니 희대의 사기꾼이라고 하지 않던가. 국사책이나 사회책에 나오는 얘기는 아니어서 학교 선생님들도 속 시원히 대답해주질 않는 게 불만이었다. 그러던 중 엄마 아시는 분이 ‘좋은 다큐보기모임 나무’라는 지역 다큐멘터리 동호회 총무여서 독립 다큐멘터리를 접하게 됐다고 했다. 몇 번 상영회에 가다보니 관심이 커졌고, 얼마 전엔 아주 긴 제목의 다큐멘터리를 친구들을 데려가서 함께 보게 됐다. “저는 정치에 웬만큼 관심 있어서 확 어렵지는 않았어요. 황우석 얘기, 화상경마장 얘기, 농촌문제 얘기에 가장 공감했어요.” 박소라 씨는 학교로 돌아가 담임선생님에게 그 긴 제목의 다큐멘터리의 DVD를 구입하자고 요청했다. 이런 영화는 많은 사람들이 봐야한다는 게 그의 생각이다.

박근혜는 퇴원했고, 지방선거는 끝이 났다. 하지만 ‘대한민국이 미쳐가고 있다’라는 긴 부제가 붙은 <불타는 필름의 연대기>라는, 역시 긴 제목의 다큐멘터리를 보고 있노라면 이 나라의 엉망진창이란 새 사람을 뽑는다고 해서 금세 나아질 것 같지 않다. 지난해 12월 19일 이마리오 감독이 한국독립영화협회 홈페이지 다큐멘터리 마당에 올린 “대한민국이 미쳐가고 있습니다. (중략) 하여 이름을 뭐라고 부르던 간에 프로젝트 작업을 제안합니다. 의견들 주세요”란 게시물을 올렸고, 이 취지에 적극 공감하는 전국구 독립영화 감독과 미디어 활동가 16명이 곧바로 의기투합했다. 그들은 각자 대추리, 새만금, 줄기세포, 화상경마공원, 카지노, 비정규직, 기륭전자, 양심적 병역거부, 사학법, APEC, WTO, 여성농민, 한미 FTA, 전략적 유연성 등 대한민국이 미쳐가고 있는 징후를 찾아 단편 다큐멘터리를 완성해 지금의 옴니버스영화로 엮어냈다. “대한민국이 미쳐가고 있는 게 아니라, 이미 미쳤기 때문에 부적당한 제목이라는 의견도 있었고 너무 선정적으로 비춰지지 않을까 하는 우려도 있어 부제로만 썼다”고 총연출을 맡은 이마리오 감독은 말하지만 영화를 상영하기 시작한 5월 셋째 주말 한나라당 박근혜 대표가 5.31 지방선거 유세 중 피습을 당함으로써 이보다 더 적절히 지금, 여기 대한민국의 자화상을 담을 제목은 찾기 어려워지게 됐다. ‘미친 대한민국의 16가지 일그러진 자화상’은 서울을 시작으로 부산대학교, 원주 청소년 문화의 집, 인천 노동자 영상패 씨, 청주교대, 성남 문화의 집, 울산 근로복지회관, 마산 MBC 시청자미디어센터, 대구 동성아트홀, 대전 아트시네마 등 전국 각 지역의 성격이 다른 상영관에서 관객들을 만나고 있는 중이다.

<불타는 필름의 연대기>는 지난 몇 년간 시사주간지와 TV 시사프로그램에서 수차례씩 다뤘던 우리 사회의 현안을 형식에 제한을 두지 않고 연출자마다 자유롭게 만들었다. 건국 이래 단 두 번 발동했던 긴급 조정권을 지난해 정부가 대한항공 파업에 발동시켰다는 것을 모르고 살던 사람이라면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도 적지 않은 게 사실이고, 각 편당 분량이 짧기 때문에 각각의 화두에 대해 깊은 정보를 주지 못하는 것도 한계라면 한계일 수 있다. 하지만 TV 보도 다큐멘터리가 가치중립성을 유지하느라, 혹은 유지하는 척 애쓰느라 화끈하게 말하지 못했던 목소리를 어디서도 듣지 못한 생생한 발성법으로 담았다.

농협 삼양동 지점에서 비정규직으로 일하는 누나를 카메라 앞에 세운 태준식 감독의 <또 다시, 불>은 한 달에 7,80만 원 받고 일하면서도 눈 밖에 나지 않으려고 정규직보다 일찍 출근하고 늦게 퇴근하는 누나에게 평범하면서도 예리한 질문을 던진다. “누나 출근할 때 무슨 생각해?" 비정규직은 과연 노동자답게 일하는가? 우리 사회는 과연 인간답게 일할 수 있는가? 나루 감독의 <난자체취 의혹-난자, 그를 말하다>는 한 나라를 들었다 놓았던 황우석 사태에 대해 논문조작 여부만 붙잡고 늘어지는 언론을 비판한다. 카메라 구입비용이 궁했을 때 실제 수백만 원의 난자 매매 제의를 받아본 적이 있었다는 나루 감독은 “나도 희생자가 될 수 있었다”는 절박함으로 생명과 인권에 대해 토로한다.

다양하고 생생한 목소리를 담았다는 것만큼이나 중요한 이 다큐멘터리의 미덕은 방송 다큐멘터리에 견줄 만한 속보성이다. 보통 한 편의 독립 장편 다큐멘터리가 상영되기까지는 1, 2년 남짓한 시간이 걸리는데 반해, <불타는 필름의 연대기>는 아이디어부터 상영까지 단 5개월이 소요됐을 뿐이다. 상영 직전 발생한 사건 클립까지 편집에 끼워 넣는 순발력이 이슈성과 현장감을 더했다. 이 프로젝트에 참여한 연출자이자 지역 순회 상영회에 여러 차례 함께한 나루 감독은 “바로 며칠 전 뉴스에서 접한 사건을 뉴스에서 볼 수 없는 시각으로 다루고 있다는 데 관객들이 호응이 큰 것 같다”고 전한다. 이는 프로젝트 기획 당시부터 배급과 상영을 함께 추진한 독립영화 진영의 역량 향상과도 무관하지 않다. 한국독립영화협회 배급분과의 김화범 씨는 “지역 순회 상영회와 단체 상영회 등 오프라인 상영회를 추진하면서 2주 정도의 시차를 두고 온라인 배급도 하고 있다. 6월부터는 위성 채널 R-TV와 인터넷을 통해 볼 수 있으며, 6월 10일에는 DVD를 바로 출시할 예정이다. 우리는 보다 빨리, 보다 많은 관객들이 공감대를 만들기 원한다”고 말한다. 전 푸른영상 회원으로 <김종태의 꿈> <동강은 흐른다> 등을 연출한 김성환 감독은 현재 지역 다큐멘터리 활동가로 원주에 머무르고 있다. 원주 청소년 문화의 집에서 상영된 <불타는 시간의 연대기>를 보면서 그는 반성과 다짐을 했다. “원주에 내려온 지난 2년 반 동안 작업을 많이 못했다. 우선 이 작업에 참여한 많은 감독들에게 고맙다는 말을 하고 싶고, 이제 뭘 해야 하는지 알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한 독립 다큐멘터리 감독의 즉흥적인 제안으로 시작된 <불타는 시간의 연대기>는 ‘연대하는 목소리’ ‘연대하는 배급’ ‘연대하는 관객’을 만들어내며 제목만큼이나 화끈한 성과를 쌓아가는 중이다. 나라를 걱정하는 마음이 한 편의 걸출한 작품으로 탄생했다. 나라 걱정은 정치인들만 하는 게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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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늘빵 2006-06-10 12: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건 어디가야 구입할 수 있나요?

키노 2006-06-12 21: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독립영화협회에 문의해보셔야 할 듯 합니다.^^;; 저두 확실히는 모르겠습니다..

하루(春) 2006-06-13 09: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목 한 번 쥑이네요. ^^ 매력적이다.

키노 2006-06-13 21: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ㅎㅎ 저두 그렇게 생각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