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도 변함없이 중고샵을 기웃거리다가...-_-
(누가 저 좀 말려주세요. 이거 완전 마마호환보다 더 무서운 중독인 듯 ㅠㅠ)
낯익은 이름을 발견하고 예전의 추억이 화르륵...

이제는 기억도 가물가물한 대학시절; 매학기마다 시간표 짜느라고 학기초마다 야단법석을 떨었었다. 필수로 들어야 하는 전공이야 어쩔 수 없다 치고, '교양' 과목을 얼마나 만만한 것으로 듣느냐에 따라;;; 한 학기 삶의 피로도가 결정되므로...

그래서 친구들과 궁리끝에 내린 결론이 '각 과의 개론을 몽땅 듣자!' 였다 -_-;; 개론 위의 단계로 넘어가면 시쳇말로 빡세지므로;;; 개론 중에서도 특히 A 폭격기를 찾아다니기로 결심한 것이다. 하지만 A 폭격기는 그만큼 경쟁률도 치열하기에, 느려터진 학교 컴을 달래가며 칠전팔기로 겨우겨우 신청에 성공한 것이 바로 '문학 개론 - 담당 교수: 박동규'였다. 

3 학점에 2시간 수업 한 번, 1시간 수업 한 번이지만 1시간짜리 수업은 아예 안한다고 했다. 
게다가 시험문제도 가르쳐주며 학점도 엄청 잘준다는 소문이 자자했다.
앗싸 신난다 놀고 먹는 시간이구나~ 하며 첫 강의를 들어갔다.  


 

 

 

 

 

 

 

강의실 문을 들어오는 교수님은 호리호리한 체구에 머리가 하얗게 센 중년 남자분이었다.
얼굴은 그다지 나이가 많이 들어보이지는 않았지만 머리가 워낙 세어서 연령을 가늠하기가 어려웠다. 

어쨌든 소문대로 첫강의는 정말 최고였다!!
교과서도 없고 (문학은 교과서로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고 하셨다 우하하),
세 시간 중 두 시간만 수업을 하며, 시험문제도 다 가르쳐줄테니 걱정하지 말라는 교수님은 그야말로 천사의 강림이었다.
강의가 끝난 후 '아 이번학기 3학점은 거저 먹는구나...'하면서 가방을 싸던 내 옆구리를 친구가 쿡쿡 찔렀다.

'야, 너 저 교수님 누군지 알아?'
'누구긴 누구야 국문과 교수겠지'
'너도 몰랐구나? 글쎄 박목월 아들이래!'
'뭐????????? 청록파 3대 시인이라고 달달 외웠던 그 박목월? 도대체 언제적 시대 사람인데 아들이 아직 살아있냐?'

아...그랬다...박동규 교수는 '참고서에 나오는 그 박목월 시인'의 아들이었다. TV 출연도 잦고 나름대로 유명한 교수님이었는데, 그걸 모르고 수강신청을 한 사람은 우리뿐인 듯 했다. 이런;; 일단 알고 나니 그 다음부터는 가끔 TV 틀면 나오고, 신문에서도 글이 보이고 하더라 -_-;;

어쨌든, 이렇게 얼떨결에 등록한 문학 개론이었지만, 누구의 아들인 것과는 상관 없이 그 강의는 정말 인상적이었다.
교수님이 항상 빈 손으로 양복 바지 주머니에 손을 집어넣고 휘적휘적 걸어들어와서는 칠판에 '여름' 혹은 '낙엽' 같은 한 마디를 분필로 휙휙 쓴 다음 메모 한 장 보지 않고 두 시간동안 그 주제에 대해 강의(라기보다는 이야기)를 하시는데 그야말로 막힘이 없었다.

한 마디라도 놓칠세라 노트 필기를 해야 하는 다른 수업에 비해 그냥 멍하니 앉아서 입을 헤-벌리고 듣기만 하던 문학 개론 수업은 얼마나 오아시스같은 존재였는지! 지금도 비소설에 비해 소설을 딱히 좋아하는 편은 아니지만, 당시에는 더더욱 관심이 없었던 터라 그 강의를 들으면서 '아...진짜 글을 쓰는 사람은 하나를 보아도 나와는 다른 생각을 하는구나.' '저걸 보고 어떻게 저런 생각을 하나...' 그야말로 감탄의 연속이었다.

결국 그 강의에서 원래 목적이었던 A를 받았는지는 잘 기억이 안나지만 -_-;;
대학 4년간 들은 모든 강의 중 가장 인상깊은 수업으로 지금까지 기억하고 있다.


 

 

 

 

 

 


문학 개론과 함께 또 하나 진짜 인상깊었던 수업은 최완수 교수님의 '동양 미술사'였다. ('서양 미술사'를 신청하려다가 손이 느려서 못하고 ㅠ_ㅠ 동양 미술사로 선회;;) 이 교수님은 항상 두루마기를 입고, 양 손에는 수북히 슬라이드를 들고 오시는 바람에 그 미묘한 부조화가 특히 기억에 남았다. 

학기 중간에 필수 코스로 간송 미술관 견학을 갔는데, 가면서도 '아 좋은 주말에 이게 무슨 꼴이람. 이 강의 잘못 신청했어. 성북은 왜 이렇게 먼거야' 이러면서 친구랑 계속 투덜투덜, 도착해서 교수님이 설명해주시는 것도 듣는 둥 마는 둥. 아이고 이제는 다시 들을 기회도 없을텐데.  

그러고 보면 그 때 모든 학과의 개론을 돌려가며 들었기에;;; 참 좋은 수업이 많았다. 아무리 교양이라도 해도 좀 더 열심히 듣고 책도 읽어보고 했으면 지금보다 훨씬 교양있는 인간이 되었을텐데 왜 그렇게 대리 출석 부탁하고, 수업 시간에 다른 리포트 쓰고, 강의 시간 내리 졸기만 했는지 안타깝기 짝이 없다. 이제서야 보충 좀 해보겠다고 이것저것 책 사서 읽고 있으니 이건 코미디도 아니고 뭔지 ㅋㅋㅋㅋ

하지만 한편으로 생각하면, 대학 시절 이런걸 다 깨닫고 있었다면 그건 나름대로 또 얼마나 싱거웠겠나 싶기도 하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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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nine 2009-04-30 18: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러니까 좋았던 수업 얘기군요. 그렇게 오래동안 학생들의 기억에 남는 강의하기란 쉽지 않을텐데 말이지요. 다른 과 개론을 돌려가며 듣는 아이디어가 참 좋아요. 저 다닐 때만해도 전공과 좀 상관없는 과목들으면 유별나게 보고 그랬었는데.
이런 얘기, 재미있어요 ^^

Kitty 2009-05-01 14:41   좋아요 0 | URL
개론 돌려듣기 안들어본 과목이 없다죠. ㅎㅎ
경제학, 법학, 경영학, 심리학 등등 인문사회학부터 음악, 미술 등 예체능까지 무슨 고등학교도 아니고 ㅋㅋ
교수님 이름 보고 문득 옛날 생각나서 써봤는데 재미있게 봐주셨다니 감사해요 ^^

글샘 2009-04-30 23: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87년 1학기에 교수님 강의를 들었는데요...
처음엔 교수님 촬영 스케줄때문에 휴강이 많았고
나중엔 거의 수업이 없었죠. 87년이었으니...
한 서너 번 들었는지..
기말고사도 레포트로 대체했던...
그러고 보면, 키티님이 제 좀 후배일 듯 ㅋㅋ

Kitty 2009-05-01 14:45   좋아요 0 | URL
아 글샘님도 강의 들으셨군요. 87년이라시니 서..선배님!! 넙죽 (--)(__)(--)
맞아요. 3학점인데도 주 2시간 강의에 중간고사는 문제 가르쳐주시고 기말고사는 없었어요.
원래 바쁜 분이라서 그러셨군요.
저는 처음에 누군지도 모르고 ^^;;; 나중에 보니 TV에 자주 나오시더군용 ㅎ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