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자 이진숙씨는 흥미로운 경력을 가지고 있다. 서울대 독문과를 석사 과정까지 마친 문학도가 러시아 여행길에서 들른 한 미술관에서 주옥같은 러시아 미술 작품에 너무나 감명을 받아 인생 계획을 180도 바꿔 알파벳도 몰랐던 러시아어로 미술을 공부하게 되었단다. 도대체 한 사람의 인생을 이렇게 순식간에 바꿔놓을만한 예술 작품이 어떤 것인지 어찌 궁금해지지 않겠는가. 그것도 우리에게 잘 알려진 르네상스 운운, 인상파 운운이 아니라 '러시아' 미술이라니? 이 책은 러시아 '미술사'라는 제목답게 이콘화부터 근현대 미술까지 시대순으로 차곡차곡 다루고 있다. 무슨 파니, 무슨 그룹이니 하는 설명이 굵직굵직하게 나오기는 하지만 기본적으로는 화가들에 대한 소개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진다. 어떤 화가를 소개하고 그 화가의 주요 작품을 살펴보며 작품 세계와 화가의 사생활을 설명하는 것은 물론 그 사람이 누구의 영향을 받았으며, 누구를 제자로 두었는가에 대한 설명까지 덧붙여 읽는 독자가 '큰 그림'을 볼 수 있도록 배려했다. 러시아에 이렇게 많은 훌륭한 미술작품이 있었다니! 무지를 챙피하게 생각할 겨를도 없이 책장을 넘길 때마다 시야를 가득 채우며 숨가쁘게 쏟아지는 작품들... 일랴 레핀이나 수리코프의 작품도 좋았지만 무엇보다 내 마음을 사로잡은건 역시 미하일 브루벨의 작품, 특히 악마 시리즈였다. <Seated Demon> <The Demon Fallen> 첫번째와 두번째 그림 사이의 간격은 약 10년. 화풍의 변화뿐만 아니라 너무나도 분명하게 화가의 심리적인 변화를 엿볼 수 있다. 안타깝게도 더욱 심해진 정신병까지. 이 책은 이렇게 그야말로 '이제까지 세상에 존재하는 줄도 몰랐던' 멋진 작품으로 가득하다. 마지막 책장을 덮고 바로 러시아행 비행기를 끊고 싶은 생각이 들었던 독자도 적지 않을 것 같다. 가끔은 책의 내용보다는 책 뒤에 숨어있는 저자의 열정이 더 큰 감동으로 다가오는 경우가 있다. 진중권의 미학 오디세이 시리즈가 그랬고, 이 책, 러시아 미술사가 바로 그렇다. 저자가 러시아 미술에 미쳐서 오랜 시간 공부와 연구를 거듭한 끝에 수많은 러시아 예술가들에 대한 사랑을 가득 담아 한 장 한 장 적어 내려간 책을 하루이틀만에 홀라당 읽어버리고 살짝 미안함마저 느낀다. 두툼하고, 도판도 많고, 그만큼 가격도 만만치않지만 절대 아깝지 않은 책이다. 책이란 참 좋은 것이야. 저자의 다음 책을 기대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