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침내 어느 작가가 나에게 보내 온 동화책을 읽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내 책을 팽개쳐 버렸다. 화가 치밀었다! 내가 왜 화가 났는지를 여러분에게 들려 주고 싶다. 그 작가는 자신의 책을 읽는 어린이들로 하여금, 아이들이란 늘 명랑하고 이루 말할 수 없이 행복하기만 한 존재라고 믿게끔 해서 그들 자신이 무엇을 시작해야 하는지도 모르게 하는 글을 쓰고 있었다! 그 엉터리 작가는 마치 어린 시절이 최상급 케이크 반죽으로 구워지기라도 하는 것처럼 글을 쓰고 있었다.
왜 어른들은 언젠가는 자신의 어린 시절을 깡그리 잊어 버리고서 슬프고 불행한 아이들도 더러 있다는 사실을 전혀 모르게 될까? (이참에 여러분에게 진심으로 당부하건대, 여러분은 절대로 어린 시절을 잊지 말기를! 나와 약속하지? 맹세하지?)
망가진 인형 때문에 흘리는 눈물과, 좀더 자라서 친구를 잃고 흘리는 눈물은 둘 다 차이가 없다. 무엇 때문에 슬퍼하든, 우리 인생에서는 그건 결코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중요한 것은 얼마나 슬퍼하는가이다. 하느님께 맹세컨대, 아이들이 흘리는 눈물은 결코 어른들이 흘리는 눈물보다 작지도 않거니와 때로는 어른들이 흘리는 눈물보다 훨씬 무겁다. 그렇다고 오해하지는 말기를! 우리는 쓸데없이 나약하게 굴어서는 안 된다. 내 뜻은 다만, 슬퍼할 때에도 정직해야 한다는 것이다. 철두 철미하게 정직해야 한다.
제가 아주 좋아하는 에리히 캐스트너의 <하늘을 나는 교실>의 머리말에 나오는 글입니다. 이 작가는 자기 머리말을 작품에 포함시키는 특이한 방식으로 글을 쓰므로 이 머리말은 소설의 일부분입니다. 저는 이 작가의 글에서 항상 어린이를 존중하고 같은 눈높이에서 사랑하는 어른의 시선을 느끼게 되어 감명받곤 하는데 위의 글을 작가가 자신의 생각을 직접적으로 드러낸 부분이라고 하겠군요. 이 이야기에 이어 부모에게 버려진 소년 요니의 이야기가 등장합니다. 그리고 김나지움 기숙사에서 생활하는 소년들의 이야기가 펼쳐지지요. 그들의 소년다운 용기도 아름답지만 어리석음과 무모함까지도 저는 눈부시게 여겨집니다. 그건 아마도 책을 읽는 동안만은 저도 캐스트너가 바라보는 방식으로 이 소년들을 보게 되어 그런 것 같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