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년전 집앞의 은행에 상담을 하러 갔다. (상담이래야 대출상담이다. 돈다발을 맡기러 간거면 좋겠다만)

앞사람이 너무 오래 직원을 붙들고 상담을 하는 바람에 난 지루해졌는데 마침 은행 한구석에 고객들 읽으라고 책장에 헌책을 꽂아 놓은게 보였다.

'책이라고 멀쩡한 건 하나도 없구만. 다 20년은 되어 보인다. 그래도 뭐 볼만한 건......?' 이러면서 책장을 뒤지다가,

난 정말 20년도 더 된 책을 발견했던 것이다.

<짐 크노프>

이 책은 내가 중1때 읽었던 책이다.  이 책과 미하엘 엔데를 소개해 준 친구와 나는 중학시절 귀여운 우정을 쌓았었는데 ㅡ 그 친구를 대학 때 한번 보고 연락이 끊겼다. 선미야, 너 뭐하고 사니?ㅡ 내가 소중히 보관하던 이 책을 엄마가 헌책이라고 없애버려 무척 슬펐던 기억이 있다. (모모와 뮈렌왕자, 끝없는 이야기도 같이 사라져 버렸다)

그렇게 없어진 책들을 근래 출판사에서 다시 출간하여, 나는 반가운 마음에 그것들을 다 사 모았지만 여전히 옛날 판본에 대한 그리움이 남아 있었다. 특히 짐크노프는 아동도서로 나와서 디자인이 영 맘에 들지 않았다.

그런데 아무도 거들떠 보지 않는 은행 책장 한구석에, 이 책이 놓여져 있는 것이다. 마치 내가 발견해 주길 기다리기라도 한 듯, 아니 오래 전에 잃어버린 내 책이 세상 여기저기를 떠돌다 이곳에 와서 나를 기다리고 있는 것 같았다.

'이 책은 나를 위한 거야, 내가 아니면 아무도 이 책을 거들떠 보지 않을걸? 여기 이렇게 버려져 있다가는 언젠가 폐품 처리 될 거야. 얜 내꺼야'

나는 감히 이런 생각을 했고 마침 갖고 있던 종이가방에 태연하게 이 책을 떨어뜨렸다. (그러니까 훔친 것이다)

그리고는 얼마 후 난 그 은행에 내가 가진 책 중 신간으로 남들이 읽을 만한 것을 살짝 은행 책장에 꽂아 놓고 왔다.

내가 한짓이 착한 짓이라곤 생각하지 않지만 후회도 않는다. 지금 생각하면 은행직원에게 그 책을 달라고 하고 대신 다른 책을 꽂아놓겠다고 하면 거절하진 않을 거란 생각도 들지만 그땐 아무 생각 없었다. 그저 내 추억을 내 손에 붙들고 싶은 생각만 있었을 뿐.

물론 이 책을 지금 보면 옛날만큼 재밌지는 않고, 군데군데 헛점도 눈에 띄지만 내 어린시절을 풍요롭게 해 주었다는 것만으로 모든 걸 용서해 줄 수 있다.

**스타리님, 밀키웨이님, 님들도 미하엘 엔데를 좋아하시는 듯하여 같이 추억을 나누자고 제목에 감히 님들의 이름을 적었습니다. 오셔서 즐감하시면 저도 기쁘겠어요.

 

 

 

이것이 바로 문제의 그 책

(깍두기를 범죄의 유혹에 빠지게 한)

 

 

 

 

 

 

 

 

 

 

 


뒷표지다.

(1978년 발행된 책. 그러니까 26살이다)

 

 

 

 

 

 

 

 

 

 

 

 


 

 

주인공, 기관사 루카스.

기차를 운전하느라 그을음이 묻어 시꺼멓다.

 

 

 

 

 

 

 

 

 

 


 

 

 

 

 

 

 

 

 

 

 

짐 크노프가 소포로 배달되다.


 

어린이들을 납치하는 용을 사로잡아 끌고가는 장면. 그러나 나중에 이 용은 놀라운 변신을 하지.(여기에 이 책의 철학이 있다)

 

 

 

 

 

 

 

 

 

 

 

 


 

짐과 공주의 약혼식. 정말 깜찍하지 않은가?

이 책은 글도 글이려니와 그림을 빼면 매력이 절반으로 줄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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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arrysky 2004-09-03 22: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 깍두기님, 제목 보고 얼른 달려왔어요!! ^^
내 사랑 짐 크노프~!! 저는 처음 보는 판본인데 이게 아마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번역된 판본인가 보네요. 차경아님이 번역하시고.. 제가 갖고 있는 건 얘와 요새 나온 '기관차 대모험'이든가 그 중간쯤에 나온 걸 거여요. 저런 멋진 그림도 없었는데..
너무 반갑네요. 깍두기님께서 슬쩍 하신 그 맘 저도 알 것 같아요. ^-^ (앗, 이럼 안 되는 건가..;;) 친절히 보여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깍두기 2004-09-03 22: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스타리님 오셨네~~~~저는 제 글 못보실까봐 방명록에 글까지 남겼는데^^
좋은 걸 같이 좋아하면 괜히 기분 좋아요. 그렇죠?

panda78 2004-09-03 23: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그림이 없는 판본으로 있어요.. 아쉽군요. 에이스 전집에 이거 두 권 들어있었거든요. 짐 크노프랑 그 다음권이랑요.
저도저도 그 마음 충분히 이해가 됩니다. 신간 가져다 놓으셨으니.. 괜찮지 않을까요? ^^;;;

깍두기 2004-09-03 23: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책이 꽤 여러번 여러 출판사에서 나왔었나 보네요? 알라딘에서 이 책 아시는 분 많이 만나네요. 평소에 제 주위엔 아무도 없어서 전 저만 이 책을 읽은 줄 알았어요^^

밀키웨이 2004-09-04 00: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그림을 다시 보게 될 줄 몰랐습니다.
이 그림 기억하시는 분이 없었답니다....ㅠㅠ
지금도 언니가 그렇게 미울 수가 없습니다.
갑자기 불타는 사명감에 낙도에 있는 교회로 바리바리 실어서 보내버린 저의 추억의 옛 책들.
그 속에 들어간 짐 크노프와 탓신다와 호첸플로프....가 정말 넘넘 보고 싶습니다.
저 또한 새로 다시 모아보지만....ㅠㅠ
아시죠?
그 때의 그 맛이 결코 아니라는 것을요.

아...정말정말 보고 싶었던 그림..이리 보니 눈물이 날락 합니다.



깍두기 2004-09-04 00: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밀키님, 반가워요. 오랜만이네요^^
내가 좋아하는 걸 남들도 좋아하면 왜 이리 좋은 걸까요? 저도 와락 눈물이 날라하네.

로드무비 2004-09-04 09: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삽화가 정말 근사하군요.
마음에 꼭 드는 책입니다.
잘하셨어요!^^

진/우맘 2004-09-04 12: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ㅎㅎ 너무 예쁜 도둑질이네요. 그렇게 이쁜 도둑이라면, 용서가 될 듯.^^

깍두기 2004-09-04 13: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렇죠, 잘했죠?(이건 너무 했나?) 용서해 주실거죠?
님들이 용서해주면 지은 죄가 없어질 것 같은....^^

아영엄마 2004-09-04 16: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 미하일 엔데의 작품이군요. 저는 못 읽어본 책일듯.. 저도 다니는 소아과에 갖고 싶은 동화책이 한 권 있는데 그걸 다른 책과 바꾸면 안되겠냐고 물어보는 것이 부끄럽고 용기가 안나서 결국 포기했답니다.쩝~ 님은 새로운 책으로 갖다놓으셨으니 마음의 짐으로 담아 두지 마셔요!

깍두기 2004-09-04 22: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난 여기서 웬지, 고해성사를 하고 죄사함을 받는 듯한 느낌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