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맘때에는 외 - 2007년 제21회 소월시문학상 작품집
문태준 외 지음 / 문학사상사 / 200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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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매미


문 태 준

낮 동안 나무 그늘 속에서 매미가 울 적엔
밤이 되어도 잠이 얇다

나는 밤의 평상에 누워 먼 길 가는 별을 보고 있다
검게 옻칠한 관 속을 한 빛이 흐른다
빛에도 객수客愁가 있다
움직이는 빛 사이를 흐르며 나는
목숨이 다하면 가 머무르는 중음中陰을 생각하느니
이생과 내생 그 사이를 왜 습한 그늘이라 했을까
매미는 그늘 속을 흐르다 나무 그늘로 돌아온 목숨
매미는 누굴 찾아 헤매어 이 여름을 우나

죽은 이의 검고 굳은 혀 위에 손톱만 한
옥매미를 올려주는 풍습이 저 고대에 있었다
슬픈 상징이 있었다
-p.29쪽

꽃 진 자리에



문 태 준


생각한다는 것은 빈 의자에 앉는 일
꽃잎들이 떠난 빈 꽃자리에 앉는 일

그립다는 것은 빈 의자에 앉는 일
붉은 꽃잎처럼 앉았다 차마 비워두는 일-p.45쪽

중심이라고 믿었던 게 어느 날


문 태 준


못자리 무논에 산그림자를 데리고 들어가는 물처럼
한 사람이 그리운 날 있으니

게눈처럼, 봄나무에 새순이 올라오는 것 같은 오후
자목련을 넋 놓고 바라본다

우리가 믿었던 중심은 사실 중심이 아니었을지도
저 수많은 작고 여린 순들이 봄나무에게 중심이듯
환약처럼 뭉친 것만이 중심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의 그리움이 누구 하나를 그리워하는 그리움이 아닌지 모
른다
물빛처럼 평등한 옛날 얼굴들이
꽃나무를 보는 오후에
나를 눈물나게 하는지도 모른다

그믐밤 흙길을 혼자 걸어갈 때 어둠의 중심은 모두 평평하듯
어느 하나의 물이 산그림자를 무논으로 끌고 들어갈 수 없
듯이-p.5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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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팽이 2006-06-19 15: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꽃진 자리에...좋습니다...보관함으로..

비자림 2006-06-19 18: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댓글 브리핑에서 댓글을 보았을 때 '이건 분명 달팽이님이야' 하고 생각했거든요.
반가워요, 달팽이님! 아직 시집을 찬찬히 살피진 못했지만 문태준의 시가 가장 좋았어요.

치유 2006-06-19 19: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립다는 것은 빈 의자에 앉는 일
붉은 꽃잎처럼 앉았다 차마 비워두는 일"
꽃진 자리. 저두 너무 좋아요..^^-

달조차도 없는 흙길의 어둠은 모두 평평하듯이..

치유 2006-06-19 19: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갑자기 희디흰 옷 입은 뒷모습 아름다운 님이 지나가는 한폭의 그림이 보입니다..호호호~!

비자림 2006-06-19 22: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머, 어느새 보셨군요. 문태준 시인이 있을 법한 사찰을 한 번 알아 보려고 아까 좀 나들이 갔었거든요. 길눈이 어두워 찾진 못하고 그냥 왔지만.. 호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