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전 여자친구와 전화 통화도중 잠깐 말다툼을 한 적이 있다. 그녀는 내가 정작 음악, 그자체를 감상하기보단 그 뒷얘기에 더 관심이 많다는 얘기였다. 여기저기 가이드북이나 전기, 평론 등에서 읽은 얘기로 음악을 이해하려한다는 태도는 잘못되었단 것이었다.
물론 그녀말이 전적으로 옳다는건 나도 어느정도는 납득하고 있던 참이었다. 하지만 어떤식으로 음악을 이해하는 것이 음악 그 자체로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대중가요나 pop같은 경우는 멜로디가 귀에 쏙쏙 들어오거나 가사가 맘에 들면 그것으로 음악을 즐길 수 있다. 하지만 클래식인 경우 가사가 쉽게 접할 수 없는 언어로 쓰여져 있고 멜로디 또한 가볍게 들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보통 교향곡인 경우 40-70분 가량 되니까 집중해서 듣지 않으면 그냥 지나쳐버리기 일쑤이다.
어쨌든 음악을 이해한다는 것이 그것을 즐긴다는 말과 동격이라면 난 그 나름대로 음악을 이해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비록 가이드북이나 전기,평론따위에서 주워들은것이언정 거기서 명반이라 이름붙여진 음반들을 애써 찾아보고 들어보는 과정이 나에겐 꽤나 흥미진진한 것이니 말이다.
난 브람스를 들을때면 떠오르는 사람이 둘 있다. 한 사람은 '브람스를 좋아하세요?'의 프랑소와즈 사강이고 또 한 사람은 '국부론'으로 유명한 아담 스미스이다. 아담 스미스가 떠오르는 이유는 브람스와 아담 스미스 둘다 사색적이고 성실하며 단정한 인격의 소유자였을 뿐만 아니라 여성에게는 지극히 소심하여 평생 독신으로 살았기 때문이었다.
항상 브람스의 교향곡 1번을 들을때면 이 소심하고 사색적인 신사였던 브람스가 그가 평생 사모해오던 슈만의 미망인, 클라라 슈만과의 사랑이 실제로 이어졌다면 4악장은 반드시 지금과는 달라졌으리라는 막연한 상상을 해보게 되고 이건 나에게는 꽤나 재미있는 일이기도 하다.
많은 사람들이 브람스의 교향곡 제 1번과 베토벤의 교향곡 제 5번 운명과 종종 비교를 하곤 한다. 둘다 C단조의 조성이 같고 주제도 "고난에서 환희"로 이어지는 방식이 유사하다는 이유에서이다. 그래서 난 이 두 음악을 들을때면 괜히 한편의 영화를 설정하고 그 주인공으로 각각 베토벤과 브람스를 떠올린다. 베토벤의 운명교향곡의 주인공은 온갖 고난을 헤쳐나와 결국 적들을 패배시키고 승리의 찬가를 부르며 엔딩롤이 올라간다. 하지만 브람스의 교향곡의 주인공은 다르다. 고난을 겪는다는 점에서는 같지만 그는 심한 마음의 상처를 입고 스스로의 고독으로 침잠해 들어가게 되고 결국엔 쓸쓸한 미소와 함께 작은 평온을 얻는데서 끝이 난다.
항상 이런저런 잡다한 상상을 하며 음악을 듣는 습관 때문에서인지 최고의 음반을 선정함에 있어서도 이런 내 상상과 잘 맞아 떨어지는 분위기의 음반만을 고르게 된다. 이런 이유로 내가 생각하는 최고의 음반 둘을 골라보았다.
나만의 최고의 브람스 음반은
1. 첼리비다케,뮌헨필의 브람스 교향곡 1번(EMI)
2. 푸르트벵글러, 북독일교향방송악단의 브람스 교향곡 1번
이 둘을 선정했다.
첼리비다케의 브람스는 말그대로 내 상상과 딱 맞아 떨어진다. 평생 브람스와 브루크너에 전념해온터라 그 자신의 해석도 뛰어나지만 첼리비다케만의 비애가 잘 살아있다(다들 아시겠지만 베를린필 단원들이 무려 144회나 함께 공연해온 첼리비다케를 차버리고 단원들에게 큰돈을 안겨줄것 같던 카라얀을 지휘자로 선임한 사건으로 인해 한때 첼리비다케는 방랑아닌 방랑을 해본 경험이 있다)
그 고독과 비애는 브람스 연주에 탁월한 아우라로 나타난다. 특히나 2악장과 3악장의 선율은 첼리비다케의 울분이 느껴지는듯해 더더욱 감동적이다.
푸르트벵글러! 연주 그자체만으로 평가하자면 사실 첼리비다케도 이에 못 미친다. 1악장부터 푸르트벵글러만의 천재적인 템포조절과 광폭적인 힘이 그야말로 빛을 발한다고 말해야 할까? (저절로 어깨에 힘이 불끈불끈 들어가는 걸 느꼈다)
다른 지휘자들의 연주와는 확실히 다르다라는 걸 초보자인 나도 느낄 수 있었다. 조지 셀의 브람스는 너무 서두르는 듯한 느낌이 들었고 칼뵘은 유려하나 평범했고, 카라얀은 모든 점에서 빠지진 않으나 항상 2% 부족하다.(그의 베토벤,말러,시벨리우스 모두 뛰어난 명반이지만 항상 그에게는 뭔가가 빠져있다라는 느낌을 지울수 없었다.) 아르농쿠르는 웬지 너무 연약한 듯한 느낌이랄까?
굳이 둘 중에 한 음반만을 선택하라고 한다면 첼리비다케를 고르겠다. 푸르트벵글러의 브람스는 그야말로 특별하나 그건 푸르벵글러의 브람스 교향곡 1번이지 브람스의 브람스 교향곡 1번이라 할 순 없다라는 생각이 들어서이다. 푸르트벵글러의 베토벤은 그야말로 베토벤 그 자체이다. 힘이 넘치고 의지적이며 굳건하다. 또한 푸르트벵글러의 뛰어난 인품에 덧붙여져 더욱 위대하게 느껴진다. 樂聖 베토벤의 위대성을 표현해 내는데 있어서는 푸르트벵글러가 최고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브람스는 다르다. 베토벤이 강인한 의지와 힘으로써 상대를 압도해 나간다면 브람스는 절제와 고요한 미덕으로 상대를 어우른다. 그는 결코 상대에게 강요하지 않는다. 그것이 브람스의 매력이자 힘이다.(그의 생애를 살펴보면 그의 이런 미덕이 잘 나타나 있는데 그는 평생 타인과 논쟁하려 하지 않았다.-그의 라이벌이라 할 수 있었던 바그너와는 정말 그 성격이 정반대이다.)
한스 폰 뵐러가 그의 브람스 교향곡 1번을 듣고 베토벤의 10번 교향곡이 드디어 나타났다라고 외쳤을때 그는 어땠을까? 그의 성격상 아마 들어내놓고 좋아하진 않았을것이다.(바그너 였다면 희희낙락했겠지만) 그저 겸손한 태도로 조용하고 은근한 미소만을 띄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