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루벨의 앉아있는 데몬
Tchaikovsky! 그를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

난 그를 결코 살인자가 될 수 없었던 오이디푸스로 이해하고자 한다.

소포클레스의 비극에서 처음 등장한 이 불행한 사나이는 피할 수 없는 저주받은 운명의 굴레에서 끝내 벗어나지 못하고 자신의 이름(오이디푸스는 퉁퉁부은 발이란 뜻이다)이 빚어내는 숙명처럼 마음의 안식을 갖지 못한 채 영원히 세상을 떠돌아야만 했다.


차이코프스키 또한 그러했다. 다만 그가 오이디푸스와 달랐던 점은 그는 아버지를 결코 죽일 수 없었다는 것. 그를 너무나 사랑했기에 그를 증오하기 보다는 스스로를 불사르기를 주저하지 않았다는 것, 그것만이 달랐을 뿐이었다.


차이코프스키를 이해하는 데 있어서 <열정과 냉정사이>라는 소설의 제목만큼 합당한 말을 찾기도 어렵다는 걸 느낀다. 그를 평생 사로잡고 있었던 고통의 근원도 그것이었고, 그의 위대한 예술을 낳게 한 것도 바로 그것이었다.

평행하게 달리는 이 두 선로(열정,냉정)는 언젠가는 만날 것 같은 희망으로 끝없이 내닫게 만들지만, 실상은 영원히 달려도 결코 만날 수 없는 숙명을 처음부터 갖고 태어난 것이다.

 

그를 결코 헤어날 수 없는 숙명의 굴레로 밀어놓은 그날(1850)의 아침으로 돌아가 보자.

1850년 어느덧 10살의 나이가 된 차이코프스키는 그가 살던 조그만 시골 마을 보트킨스크를 벗어나 당시 로마노프 왕조가 지배하던 러시아 제국의 수도 <성 페테르부르크>의 법률학교에 입학할 예정이었다. 간단한 입학 수속을 마친 후 사랑하는 어머니 알렉산드라가 타고 있던 마차가 막 그의 곁을 떠나려던 참이었다. 어머니의 곁을 떠나려 하지 않았던 차이코프스키를 만류하기 위해 사람들은 그의 가녀린 어깨를 꽉 쥐고 있어야만 했다. 어머니가 타고 있는 마차가 그의 시야에서 조금씩 멀어지기 시작하자, 참을 수 없는 열정과 격정에 사로잡힌 어린 차이코프스키는 사람들을 뿌리치고 달려나가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어머니가 타고 있는 마차의 휠에 자신의 몸을 던졌다!

그의 이 유년시절의 기억은 영원히 그의 뇌리에 새겨졌고, 마차에 자신의 몸을 내던지고도 막을 수 없었던 어머니와의 이별은 4년 후 어머니가 콜레라로 사망함으로써 영원한 고별을 맞게 되었다.


프로이트는 말한다. 사람은 누구나 유년기에는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를 가지고 있으나 그것이 성장기간 중 자연히 해소가 됨으로써 근친상간이라는 심리학적,도덕적 장벽에서 해방될 수 있는 것이라고.. (어머니가 또 다른 아이를 갖게 되어 자신이외의 다른 존재가 어머니의 사랑을 독차지 하게 되거나 성장 기간중 자신이 아닌 아버지가 어머니를 소유하고 있다는 걸 자연스럽게 깨닫게 되면, 그는 자신의 사랑이 어머니를 결코 독점할 수 없다는 걸 자각하게 된다)

 

하지만 차이코프스키의 경우처럼 어머니에 대한 지나친 애정이 정상적인 방법으로 해소되지 못하고 억압되어, 심리적 근원으로 고착되어 버린 경우에는 심각한 정신 병리학적 증상을 갖게 되는 것이다.

 

그가 평생 수치와 슬픔의 원천으로 느꼈던 그의 동성애적 기질과 조울증은 이런 유년기의 고통과 더불어 찾아온 것이었다. 몸을 던져서도 막을 수 없었던 어머니와의 이별은 그에게 <여성과의 사랑은 결코 이루어 질 수 없고 결국 이별로 끝이 날 수 밖에 없다>라는 것을 숙명적으로 받아들이게끔 했다.

 

한 때 그 자신도 이 저주받은 숙명을 그를 열렬히 사모하던 음악원의 제자 ‘안토니나 이바노브 밀류코바’와의 결혼으로 타개해 보려 했으나 진실한 사랑이 아닌 도피처로 선택한 결혼은 9주만에 파국으로 끝이 났고, 계속되는 밀류코바의 성관계 요구(그에게 여성과의 성관계는 곧 어머니와의 성관계를 의미했고 이는 근친상간에 다름 아니었다)는 그를 쇼크 상태로 몰아가기에 충분했다. 결국 이는 페테르부르크의 강가에 몸을 던지는 자살시도로 이어진다. 비록 자살은 미수로 끝이 났지만 48시간가량 혼수상태에 빠지게 되었고 그 이후 계속되는 고열과 환각으로 그의 정신과 육체는 피폐해지고 만다.

 

결국 의사는 그에게 러시아를 떠나라고 충고했고, 그는 스위스의 Clarens로 휴양을 떠나게 된다. 밀류코바는 그 이후로도 다른 남성과의 관계에서 3명의 아이를 낳는 등 끊임없이 바람을 피웠고, 차이코프스키는 그녀와의 이혼을 원했으나, 그녀는 그와의 결혼 상태를 지속하기를 원했다.(이런 법률상의 결혼관계는 그녀가 정신질환으로 사망할때 까지 이어졌다)

비록 결혼은 파국을 맞이하였으나, 그는 결코 그녀를 비난하지도 증오하지도 않았다.

그건 그가 반드시 짊어져야만 했던 슬픔의 유산이었기 때문이리라.

 

혹자는 그가 이혼을 꺼려했던 것은 밀류코바가 그의 동성애 기질을 폭로하기를 두려워하였기 때문이라고 하나 그의 성격을 미루어 짐작해 보건데 그것 때문은 아니라고 난 믿고 있다.

 

(이에 대한 근거로 차이코프스키의 평전에 나오는 짧은 일화를 소개하고자 한다. 그의 유년 시절 가정교사였던 Fanny Durbach가 증언한 바에 의하면 차이코프스키와 그의 형 니콜라이가 학업을 게을리 하자 따끔하게 훈계를 하게 되었는데 “아버지는 너희들의 교육을 위해 앉을 새도 없이 열심히 일하시는데 너희들은 그런 고마움을 조금도 모르고 학업을 게을리 해서야 되겠냐?”는 것이었다. 훈계가 끝이 나자 잠시 지루함에 몸을 떨었던 니콜라이는 만면에 행복한 미소를 띄우고 놀러가 버렸으나 차이코프스키는 하루종일 생각에 빠진 상태로 일찍 침실로 올라가 버렸다. 잠시후 가정교사 페니는 침실 안에서 들리는 차이코프스키의 흐느끼는 울음소리를 듣게 되었다. 울음과 함께 차이코프스키는 그가 아버지를 얼마나 사랑하는지를 작은 목소리로 신에게 고백하기 시작했고 곧 그의 두 눈은 고통의 눈물로 빨갛게 충혈되어 버렸다. 그리고 그 이후에도 그는 죄책감으로 한동안 괴로워했다고 한다.

또한 밀류코바와의 결혼 또한 그녀를 상처 입히지 않으려는 순수한 기사도 정신의 발휘에서 비롯된 것이었다.(당시 차이코프스키는 푸쉬킨의 예브게니 오네긴을 감명깊게 읽은 터라 오네긴이 자신을 사모하는 순수한 처녀의 편지를 묵살함으로써 그녀가 마음에 깊은 상처를 입는 것에 심히 공감하고 있던 터였다. 한없는 사랑을 상대에게 고백하나 끝내는 받아들여지지 못하는 그녀의 심정이 아마 자신과 다를 바가 없다는 것을 느꼈을 터였다.)

 

하지만 그의 순수한 기사도 정신의 발휘는 종내는 비극으로 치닫고 말아 결국 두 사람의 마음에 깊은 상처로 남았고, 여성으로의 애정을 원했으나 열렬히 사모했던 그에게서는 결코 얻지 못했던 밀류코바는 그 후 무절제한 생활과 심적 고통으로 야기된 정신질환으로 정신병원에서 숨을 거두고 말았다.


차이코프스키는 제네바 호수 근처의 작은 도시 Clarens에서 휴양을 갖던 차에 그의 음악을 사모하던 러시아의 부유한 미망인 ‘나데츠나 폰 메크’ 부인에게서 한 통의 편지를 받게 되었다. 그녀는 <절대로 만나지 않는다>라는 다소 기묘한 조건으로 그에게 매년 6000루블의 후원금을 약속했고, 그는 이 조건을 흔쾌히 받아들이게 된다. 그는 폰 메크 부인과의 만남으로 경제적인 독립을 하게 되었고, 비로소 예술에의 열정을 음악에만 쏟아 부을 수 있게 되었다. 그에게 폰 메크 부인은 그의 음악에의 의견, 믿음, 인상, 희망, 절망, 열정을 숨기지 않고 고백할 수 있는 해방구와 같은 존재였고, 이는 바로 그에게 <상실된 어머니의 존재> 그것에 다름 아니었다.

폰 메크 부인은 차이코프스키보다 9살이나 연상이었고 11명의 자녀를 갖고 있는 푸근한 어머니 같은 여자였다. 또한 이성적으로 관계를 맺지 않아도 된다는 것은 그에게 정신적인 안도감을 가져다주었고, 이는 곧 음악으로의 열정으로 나타나 그동안 미루어 두었던 교향곡 4번을 비롯해 바이올린 협주곡 등이 바로 이 클라렌스에서 쓰여졌던 것이다.


차이코프스키의 바이올린 협주곡 1번 op.35는 이런 상황에서 탄생했다.

죽음까지도 생각하게 만들었던 불행했던 결혼 생활과 그 자신이 그토록 혐오했지만 결코 벗어나지 못했던 숙명을 감싸안은 채 바이올린의 현은 노래해야 했다. 그의 고통과 의지를 그리고 미래에의 희망을..

차이코프스키의 바이올린 협주곡은 3악장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개관을 살펴보면

 

제 1악장: Allegro moderato-Cadenza

소나타 형식으로 제시부,전개부,종결부로 구성되어 있다. 우선 오케스트라 서주가 앞으로의 주제를 암시한다. 그런데 이 1주제가 놀랍기 그지없다. 이 곡이 작곡될 당시(1878년) 그는 죽음까지 결심했을 정도의 극도의 심적 고통을 겪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귀족적이며 당당하기까지한 오케스트라 서주를 보여주는데, 마치 삶을 향한 그의 확고하고도 강인한 의지를 표현하는듯하다. 오케스트라 서주에 이어 곧 바이올린 독주에 의한 전개부가 펼쳐지는데 정말 화려하고 현란하기 그지없는 바이올린 테크닉의 향연 그 자체라 말할 수 있다. 또한 독주자와 함께 펼쳐지는 강렬한 오케스트라 Tutti는 아름다운 선율과 함께 압도적인 폭발력을 보여주는데, 독주자가 반주없이 즉흥적으로 펼치는 Cadenza에선 마치 자신의 슬픔을 과장하지 않고 담담하게 바이올린 현에 담아 나즈막하게 그의 고통을 토로하는듯하다. 간간히 미묘하게 떨리는 바이올린의 Vibrato는 마치 심연에서 터져 나오려는 울음을 애써 참아 넘기려는 의연함으로 나타나 더욱 깊은 감동을 우려낸다. 그리고 종결부에선 다시한번 주제가 반복되고 절정으로 치달으며 끝을 맺는다.

 

제 2악장: Andante-Canzonetta

A-B-A형식의 3부형식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는 어디까지나 悲歌이고 영혼의 통곡이다. 1악장에서 애써 삼키려고만 했던 울음은 끝내 참아내지 못했고 조금씩 터져 나오기 시작한다. 그리고 슬픔은 어느새 비탄의 강이 되어버려 곡 전반에 걸쳐 만연히 흐르게 된다.

 

제 3악장: Allegro Vivacissimo-Finale

자유로운 소나타 형식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제 1주제는 2박자의 격렬한 러시아 민속 무곡 트레파크의 음율로 되어있으며 제 2주제는 러시아 농민의 악곡 가락으로 구성되어 매우 활기차고 발랄한 바이올린 음색을 들려준다. 마치 미래에의 희망과 삶의 환희를 암시하는 것처럼...

 

제 3악장은 2악장과는 구분이 되어 있지 않은 듯 급작스럽게 등장하게 되는데 이것은 차이코프스키의 철저하리만치 진중한 심리적 흐름을 따른 작곡법에 무관하지 않다고 나는 생각한다.

당시 그를 지배하는 정서는 자신의 슬픔을 인내하고 이겨나가려는 의지가 가장 큰 부분을 차지하고 있었고, 그 다음엔 어느새 지워버릴 수 없는 낙인이 되어버린 차이코프스키의 내적 고통, 마지막으로 미래를 향한 작은 희망이 그 뒤를 따랐다. 연주시간을 보더라도 1악장의 대략 18-19분대, 2악장이 9분대, 3악장이 6-7분대이다. 물론 독주자의 즉흥 연주가 이루어지는 카덴짜로 인해 1악장이 가장 길다고는 하지만 작곡 당시 차이코프스키는 카덴짜 부분도 작곡해 두었으므로 이것으로 인해 1악장이 가장 길어졌다고는 보기 힘들고, 그의 작곡의도가 1악장을 가장 염두에 두었다고 보는 것이 옳다고 본다.

견딜 수 없는 고통이 그를 엄습하고 있었으나 이를 반드시 이겨내야겠다라는 그의 강인하고도 확고한 의지가 그의 정서 밑바닥에 유유히 흘렀기 때문이었고, 3악장의 급작스러운 전개 또한 인간의 심적 변화를 유심있게 살펴보았다면 전혀 당황스럽지 않게 느껴질 것이다.

고통은 단계를 밟아 나가듯이 서서히 그치는 것이 결코 아니다.

심적 동기나 의도가 있다면 인간은 그 고통이 언제 있었냐라는 듯이 그 고통을 심연 깊숙이 숨겨버릴 수 있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비록 슬픔의 고통은 낙인이 되어 영원히 지워지지 않을망정 잠시 잊어버릴 수는 있는 것이기에...


차이코프스키의 바이올린 협주곡 OP.35!

몸을 내던져서도 막을 수 없었던 어머니와의 영원한 고별!

받아들여지지도 이해될 수도 없었던 사랑을 해야 했던 그는 아버지 또한 너무나 사랑했기에 증오할 수 없었다.

그저 두 눈을 찔러버린 채 영혼의 안식을 찾아 영원히 세상을 떠돌아야 했던 오이디푸스처럼 그 또한 안식을 찾아 세상을 한없이 여행해야만 했다.(차이코프스키의 만년은 끝없는 여행으로 점철되어 있다. 물론 그것은 연주여행을 겸한 것이기도 했지만, 그를 한 곳에 안주할 수 없게 만들었던 심적 불안감도 크게 한 몫 했으리라는건 쉽게 짐작할 수 있다. 당시 동성애는 매우 심각한 범죄행위였고 그 또한 제어할 수 없는 자신에 대한 수치감과 분노로 얼룩져 있었다.-이로 인해 차이코프스키가 콜레라가 아닌 동성애로 인한 강요된 자살로 생을 마감하게 되었다는 설이 강력히 대두되고 있다.)

나에게 이 차이코프스키의 바이올린 협주곡은 그가 사랑해 마지 않았던 어머니께 바치는 고해성사 처럼 들린다.


마지막으로 Swinburne의 작별이란 시로 글을 마감하고자 한다.


작별


우리 일어나 작별하세. 그녀는 모를 것이니.

큰 바람인 듯 바다로 가세.

모래와 물거품 온통 흩날리며. 여기 있는들 무슨 소용이랴?

아무 소용 없네, 이 모든 것들이 그러하고,

온 세상이 눈물처럼 쓰라리거늘.

이것들이 그러함을, 그대 아무리 보여주려 애써도,

그녀는 알지 못하네.


그러니 두려워 말고 함께 가세

노래 시간은 끝났으니

이제 침묵을 지키세

지난 모든 일도, 소중한 일도 끝났으니,

우리가 그녀늘 사랑하는 것처럼 그녀는 그대들도 나도 사랑하지 않네.

정녕, 우리가 그녀의 귀에 대고 천사처럼 노래해도,

그녀는 듣지 않네.


그러니 우리 가세, 가세, 그녀는 보지 않을 것이니,

모두 한 번 더 노래하세. 분명 그녀도,

그녀도, 지난 날의 추억을 떠올리고,

우리를 살짝 돌아보며, 한숨 지을 것이니. 그러나 우리,

가버리네, 사라지네, 그 곳에 있었던 적도 없는 듯,

아아 보는 이들 모두 나를 불쌍히 여겨도,

그녀는 보지 않네.

 

맺음말: 아무래도 차이코프스키의 비애를 제대로 소화해내기 위해선 단순히 연주자의 기교만으로는

            부족하다는 것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아픔은 겪어본 사람만이 그 아픔을 이해하는 법!

            레오니드 코간이 연주하는 차이코프스키의 바이올린 협주곡은 나에게 더할 수 없는 최고의

            얀주다!

            코간에 대한건 저번에 쓴 글에 언급했으니 덧붙일 말은 없다고 본다.

            재미있는 사실 하나는 차이코프스키가 이 바이올린 협주곡을 당대 최고의 바이올리니스트

           였던 아우어는 기교적으로 불가능 하다고 단정하여 사실상 이 협주곡은 연주되어지지 못했

           다.

           그런데 아우어의 제자였던 하이페츠와 밀슈타인이 이 협주곡으로 명성을 쌓게 되었으니니        참  역사의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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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누구에게나 남들에게는 말할 수 없는 고통스런 경험을 한 두 번쯤은 겪으며 살아가기 마련이다. 그건 나에게 있어서도 마찬가지여서 꽤 아픈 추억들을 갖고 있다. 

각자 가지는 경험들은 너무나 개인적임으로 타인에게는 별 것 아닌 그저 그런 흔한 일로 치부되어 버릴 지도 모르지만, 그 고통을 감내해 내어야만 하는 당사자들에겐 그건 결코 흔히 벌어지는 그저 그런 평범한 일상은 될 수 없는 것이다. 


난 고통을 겪으며 두 가지 진실에 다다를 수 있었다.

하나는 고통은 결코 인간을 성숙시켜 주지 못하며, 또 다른 하나는 반드시 흉터를 남긴다는 것이다.

그것이 육체적 상처이건 정신적 상처이건 그 상처가 깊은 상처라면 반드시 지울 수 없는 흉터가 남기 마련이다.

 내가 아픈 일을 겪어야만 했을 때 주위사람들은 흔한 위로의 말을 건넸었다.

“괜찮아질꺼야. 시간이 지나면 다 잊혀질꺼야. 힘내렴!”

시간이 지나서 다 잊혀질 고통이었다면 처음부터 그렇게 괴로워하지 않았을 터이다. 그저 마음 한 켠에 잠시 미루어 두었을 터이지....


고통은 인간을 침묵하게 만든다.

참을 만한 고통을 겪으면 사람은 주위사람들에게 도움을 청한다. ‘도와달라고. 내 고통을 알아달라고..’ 하지만 결코 참을 수 없는 고통이 닥치면 사람은 침묵하게 된다. 너무나도 힘겨운 고통과의 투쟁에 주위를 돌아다 볼 여유조차 가질 수 없기 때문이다. 그저 나를 잃지 않기 위해 발버둥치는 것만으로도 너무 힘겹기 때문이다.


역경은 인간을 강인하게 만든다지만 고통은 인간을 나약하게 만든다.

그게 내가 아픔을 겪으며 깨달은 유일한 진실이었다.

그 후 8년이란 시간이 지나 어느 평온한 오후였다. 하던 일을 잠시 멈추고, 라디오을 살며시 켰다.

베토벤의 피아노 소나타 8번 의 2악장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너무 잘 알려진 곡이어서 그 멜로디를 이미 다 알고 있었음에도 눈물이 터져 나오려고 하고 있었다.

그 순간 <비창>은 이미 아물어져 있다고 믿었던 내 상처를 헤집어 놓고 있었던 것이었다.

미시마 유키오의 소설 <금각사>에는 이런 구절이 나온다.


인간이 가장 잔인할 수 있는 순간은 이처럼 햇살이 빛나고 꽃이 어우러져 피어있는 지극히 평온하고 아름다운 지금이 아닐까...


베토벤의 비창은 바로 그런 잔인한 미소로 나에게 다가왔던 것이었다.

울 수 있었다면 울었을 것이다. 하지만 마음껏 목놓아 울 수 없었다. 그건 수치감 때문이 아니라 자존심 때문이었다.

‘난 이미 상처를 잊었고 그건 이제 나에게 아무 일이 아니라고.. 그냥 과거일 뿐이라고... ’

하지만 정말 잊어버린 걸까? 난 결코 잊지 못했다. 단지 잊은 척하려 했을 뿐이었다.

왜냐하면 고통을 견딜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견뎌내는 것, 잊어버리는 척 하는 것 외엔 없기 때문이란 걸 이미 알고 있던 터였다.


<Pathetique>!

베토벤이 작곡한 32개의 피아노 소나타 중에서 가장 대중의 사랑을 받는 작품은 비창,월광,열정 이 3개의 소나타이다. 그 중 베토벤이 직접 표제를 단 작품은 이 비창이 유일하다.

pathetique는 라틴어 pathos라는 어원에서 유래 되었다. 파토스는 정념,열정,비애 등을 일컫는 말로 인간의 마음이 수동적으로 받아들일 수 밖에 없는 상태를 의미한다. 이는 어디까지나 이성을 의미하는 Logos 에 반하는 것으로 중세 스토아학파에서는 파토스를 질병으로 보았다. 왜냐하면 이성으로는 통제할 수 없는 격앙된 감정 상태를 표현하기 때문이었다.

더 재미있는 것은 Patience(인내)의 어원도 이 파토스에서 유래되었기 때문이다.

비애,애수,슬픔은 인내하고 견뎌내는 것 이외에는 다른 해결 방안이 없기 때문이리라.

베토벤이 청각 상실의 고통을 더 이상 견뎌내지 못해 자살을 시도 한 적이 있다는 건 너무나 잘 알려진 사실이다.

여기 베토벤이 썼던 <하일리겐슈타트의 유서>의 한 부분을 잠깐 실어 보겠다.

 

“나는 여러 번 사람들과 사귀기를 좋아하는 성미 탓에 사람들의 모임에 발을 들여놓은 일이 있었다. 하지만 내 옆의 사람은 멀리서 들려오는 피리 소리를 듣고 있는데 나는 아무것도 들을 수 없다든가, 또 그 사람은 양치는 목자의 노랫소리를 듣고 있는데 내게는 아무것도 들리지 않을 적에, 그 굴욕감은 어떠하였으리랴, 그러한 경험들로 말미암아 난 거의 절망하기에 이르렀다.....중략... 참으로 비참한 생명이다. 하지만 자극을 받기 쉬운 몸뚱이여서, 아주 조그만 변화일지라도 나를 최선의 상태에서부터 최악의 상태로 던져버리는 것이다!

인종(忍從)! 이제 내가 길잡이로 택해야 할 것은 바로 참고 견디는 것이라고,,, 나는 그렇게 하였다. 바라건대 , 참고 견디고자 하는 나의 결심이 영원히 계속되기를.. 준엄한 운명의 여신들이 나의 목숨을 가져가기를 원하게 될 때까지.”


억겁의 시간도 그 고통을 잊게 만들어 줄 수 없다면 조용히 인내하는 수 밖에 없다. 그것이 우리의 삶인 것이다.


“이 세계에는 눈물 조차도 흘릴 수 없는 슬픔이란 것이 존재한다. 그것은 누구에게도 설명할 수 없고,혹시라도 설명이 가능하다고 해도 , 아무도 이해할 수 없는 그런 종류의 것이다.그런 슬픔은 다른 어떤 형태로도 바뀌어 지지 않고, 다만 바람없는 밤의 눈처럼 그냥 마음에 조용히 쌓여가는 그런 애달픈 것이다... 무라카미 하루키..”


혹시 지금 그런 고통을 겪고 계신 분이 있다면

 당신의 절망의 말이 바람에 씻겨 먼지처럼 날아가버리기를 진심으로 기도 드립니다.

 

ps> 혹시 루돌프 제르킨의 비창 들어 보셨습니까?

      제 상처를 뒤집어 놓은 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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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느와르
La Fille aux Cheveux de Lin


4월의 어느 화창한 봄날...

회색빛 아스팔트의 도로위에서 난 파도처럼 쉴새없이 밀려드는 짜증을 감당해 낼 수 없었다. 난 운전 중에 욕을 입에 달고 다니는 사람들을 아주 싫어하는 편이지만 그 날은 나도 여지없이 그 부류에 섞여 있었다. 러시아워 시간도 아닌 한 낮! 고통도 미리 예상하고 있었다면 견딜만한 것이리라. 하지만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지루한 기다림의 고통은 나를 미치기 일보 직전까지 몰아갔다. 치밀어 오르는 분노를 제어하고자 가만히 혼자 숫자를 세어보았으나 그건 전혀 해결책이 되어 주지 못하고, 어느 순간 헤아리던 숫자까지 까먹어버리자 그건 나에게 극약처방으로 나타났다. 끔찍하리만치 계속되는 욕설의 퍼레이드! 나 자신도 내가 그렇게 많은 욕설을 기억하고 있다는데 놀라고 말았다. 경상도,전라도 사투리,영어,일본어,중국어,, 심지어는 스페인어 욕설까지!


한참을 떠들어대다 시선을 옆으로 돌렸다. 그 순간 난 아직 짙푸르지는 않은 연한 초록빛의 플라타너스 잎새 사이로 반짝이는 황금빛 물결을 보았다. 햇살이 아직은 연약한 플라타너스의 잎새를 통과해 마치 에메랄드처럼 찬란하게 빛나고 있었던 것이다. 그 찰나에 벌어진 자연의 기적에 난 넋이 나가고 말았다. 한참동안 멍하니 지켜보던 난 뒷 차 운전사의 욕설에 비로소 자연이 빚어내는 장엄한 침묵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비트겐슈타인은 전쟁의 참호 속에서 신의 존재를 믿지 않는 자는 없다라고 말했다지만 그 날 난 자동차의 시트 속에서 신의 존재를 느꼈다. 그 후 난 일순간의 기다림을 참지 못하고 천박하리만치 저열한 내 인격을 고스란히 드러낸 데에 수치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웃음이 나올 정도로 유치한 일이었지만 그 순간 난 기도를 올리기도 했던 것이다.

“오 신이시여! 단 몇 분간을 참지 못하고 당신을 언급하여 욕한 나를 용서해 주십시오..(그 때 난 God damn!이란 욕도 했었다)”

어찌됐든 그 다음부턴 탄탄대로였다. 무사히 난 집으로 돌아왔고, 그 후로도 자연이 나에게 보여주었던 그 신비한 황금빛 감동을 지울 수가 없었다. 내 손은 무심코 오디오로 손을 뻗히게 되었고 손에 잡힌건 드뷔시의 전주곡집이었다.


옛날 그리스 사람들은 인간의 자유의지를 믿지 않았다. 모든 것은 다 신의 뜻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용기가 솟아오를땐 그건 전쟁의 신 마르스가 자신에게 용기를 주었기 때문이었고, 사랑의 열정이 넘쳐흐를 땐 그건 비너스가 자신에게 사랑을 느끼게 했기 때문이라고 믿었다. 내가 드뷔시의 전주곡집을 손에 든 것도 그런 영감이 아니었을까 한다.(가끔 황당한 상상도 재미있다)


역시나 그건 탁월한 선택이었고 드뷔시의 <아마빛 머리의 아가씨>는 내가 한 낮의 아스팔트에서 느꼈던 그 감동과 똑같은 감동을 느끼게 만들어 주었다. 아마빛이라... 난 지중해 사람도 아니고 지중해 음식도 하나 할 줄 모르는 지극히 평범한 대한민국 사람이라 실제로 아마유를 본 적은 없다. 다만 보았다면 백과사전에 얼핏나온 작은 사진을 잠시 보았을 뿐이다. 그 때의 사진을 지금 가만히 떠올려보면 그건 금빛에 가까운 밝은 갈색이었던 걸로 기억하고 있다. 그런 아마빛 머리를 가진 아가씨라... 너무 아름다울 것 같았다. 잔인하리만큼 아름다운 4월의 봄날과 아마빛 머리의 아가씨라... 르느와르의 그림이 떠오른다.


다들 아시다시피 드뷔시는 음악에 색조를 입히고자 시도한 인상주의파 작곡가이다. 쇤베르크와 함께 20세기 전반 음악사에 가장 독보적인 존재라 해도 절대 과언이 아니다. 기존의 7음계나 9음계의 전통적 작곡기법에서 벗어나 온음음계와 동양적인 5음계를 주로 사용했고 화성과 화음의 발전에 큰 영향을 끼쳤다. 이란 영화를 보면 데일 터너(덱스터 고든이 연기했으나 사실은 재즈 피아니스트 버드 파웰의 이야기이다)가 자신에게 가장 영향을 끼친 사람이라면 찰리 파커와 드뷔시라는 말을 읊조린다.


그 때까지는 아무도 하지 않았던 일이었지..어느날 찰리 파커(재즈사에서 전설적인 인물이다)가 하고 있었고 나도 곧 그걸 하게 되었지.. 그런데 사람들이 그걸 Bebop이라고 부르더군.. (잠시 싱긋이 웃으며) 그건 드뷔시가 가장 처음에 했다고..”


드뷔시의 음악의 총화라면 역시나 피아노 음악이다. 그 자신도 한 때 뛰어난 피아니스트가 되고자 했었고 가장 자신있어 하던 것도 피아노였다. 전주곡집 또한 피아노의 기술을 훈련시키고자 하는 의도에서 작곡되었고 전주곡 1집은 8개의 손가락 터치를 집중적으로 훈련시키기 위한 것이었고, 전주곡 2집은 페달링을 위시한 음색을 훈련시키기 위한 목적으로 작곡되었다. 그 자신은 3부작(전주,간주,종주)으로 마무리 지을려고 했으나 전주곡집만으로도 자신이 표현하고 했던 모든 것을 완성해내었다고 믿어서인지 전주곡이 마지막 작품이 되었다. 사실 드뷔시의 작품은 듣기에도 까다로운 음악이지만 실제 연주에 있어서도 상당한 기교를 필요로 하는 매우 까다로운 작품이라고 알려져 있다. 지속적인 페달링을 유지하면서 섬세하고 영롱한 음색을 창조해 내는 작업은 매우 힘이 드는게 사실이다. 드뷔시 자신도 자신의 작품을 표현하는데 있어 <페달링의 기술은 사람이 숨쉬는 것과 마찬가지이다>라고 자신의 악보를 출판했던 Jacques Durand에게 거듭 강조했을 정도로 페달링의 기교의 중요성을 역설했을 정도이다.


하지만 나같은 평범한 사람에게는 실제 연주해야만 하는 피아니스트의 고충은 전혀 알지 못하니까 그저 드뷔시가 창조해낸 아름다운 음색을 감상하는 것만으로도 너무 행복할 따름이다. 드뷔시의 음악에는 모두 표제가 달려있는데 전주곡집 또한 예외가 아니다. 실제로 드뷔시는 곡을 완성하고 난 이후에 표제를 달았다고 하니까 그 자신이 갖고 있던 실제 이미지를 의도해서 작곡한 것은 아니라고 본다. 자신 또한 스스로 말하기를 자신의 음악이 본능적이고,비 이성적이며 단지 충동만이 있다라고 했으니까 완성된 작품을 보고 즉흥적으로 표제를 달았다고 난 믿고 있다.(아니라고 한다면 뭐 반론할 근거를 갖고 있는건 아니다)


표제와는 상관없이 음악을 감상하는 것도 괜찮겠지만 분명 드뷔시가 고심해서 지은 표제일터니 그 표제가 상징하는 이미지를 연상하며 음악을 감상하는 것이 더 좋을 듯 싶다. 아마빛 머리의 아가씨의 경우는 프랑스의 고답파 시인 <르콩트 드 릴>의 동명의 시에서 영감을 얻었다고 하니 그 표제를 무시하고 그냥 듣는건... 좀 그렇지 않을까?

드뷔시의 아마빛 머리의 아가씨를 듣고 르콩트 드 릴이 썼다는 동명의 시를 구해보고자 열심히 뛰어다녔으나(?) 구하진 못했다.

대신 마르셀 프루스트의 이 시로 대신 해본다. 아마 드뷔시의 아마빛 머리의 아가씨를 감상하는데 충분한 도움을 줄 수 있을 듯 싶다.


금 빛은 오래 머물 수 없는 것


자연의 첫 푸름은 금 빛입니다.

오래 머물기 가장 어려운 색깔이지요


자연의 첫 잎은 꽃 잎입니다.

하지만 한 시간을 미처 머물지 못합니다.

꽃은 곧 잎으로 바뀌니까요

 

낙원은 슬픔으로 가라앉고

새벽은 낮으로 퇴색해 버리는 것!


금 빛은 오래 머물 수 없는 것이지요


<아마빛 머리의 아가씨>는 드뷔시의 곡 중에서 <달빛>과 더불어 가장 멜로디 라인이 아름다운 곡 중 하나이다. 매우 청초하고 아름다운 음색과 멜로디를 갖고 있지만 조용히 듣다 보면 웬지 모를 슬픔을 내재하고 있다는걸 느낄 수 있다. 금 빛이 오래 머물 수 없는 것처럼 아마빛 머리의 아가씨의 아름다움도 지속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인간이 갖고 있는 그 모든 것은 오래 머무를 수 있는 것이 하나도 없다. 청춘,사랑,열정,행복,기쁨 그 어느 것도 영원히 우리 곁에 머물 수 없다. 영원히 흘러가는 시간의 강 속에서는  모든 것이 다 퇴색되어 버리고 만다. 그것이 우리 인간만이 갖고 있는 슬픔이 아닐까 한다.

유한할 수 밖에 없는 우리의 존재가 슬픔을 낳는 것이다.

밀란 쿤데라의 소설 <참을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이란 책에 보면 이런 구절이 있다

 

“둘이서 같은 침대에서 잔다고 해도 눈을 감는 건 결국 혼자니까..”


함께 있어도 고독해지고 슬퍼지는 것. 우리의 존재자체가 슬픔이기 때문이리라...



ps>드뷔시의 전주곡집에는 꽤나 훌룡한 연주가 많다고 보는데 나한테 있어서 결정반은 아직 없다

     기제킹,미켈란젤리.굴다 모두 다 좋은 연주이지만 약간씩의 미스터치도 있고 미스터치를 빼고서

     라도 얼마간의 아쉬움이 남는 연주들이다.

    만약 버드파웰이 전주곡집을 녹음했다라면... 그건 나에게는 최고의 드뷔시 전주곡집이 되었을텐

    데... 정말 아쉽다.

    재즈 피아니스트를 은연중에 무시하는 분들도 계시는데 호로비츠가 재즈 피아니스트인 아트 테

   이텀의 연주를 듣고 20세기 최고의 피아니스트라고 극찬한 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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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키노 > 넥타이 종류별 매는 방법

출처 : daelimtextile.com
V존의 인상을 결정하는 요소 중에서 중요한 것들 중의 하나가 넥타이 매듭법이다.
셔츠의 카라 형태나 넥타이 폭의 너비,또는 생지의 두께에 의해서 그에 적합한 매듭법으로 V존을 연출할줄 안다는것는 "넥타이를 맨다"는 고유의 의미를 높여 주는 것의 하나라 여겨진다.
셔츠카라 사이의 열림이 거의 수평에 가까운 와이드카라 셔츠가 유행한다고 할 때 그것에 어울리는 형태의 넥타이를 잘 선택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어떤 매듭법으로 연출하느냐에 따라서 전체적인 분위기와 느낌이 확연히 달라지게 되므로 일반적으로 많이 사용하는 몆가지 넥타이 매듭법에 대해서 잘 알아 놓는 것도 자신의 개성과 패션 감각을 높이는 방법의 하나라 생각된다.
넥타이의 매는방법을 188여가지나 적어놓은 책도 있다고 한다. 그러나 실용적인 면에서 가장 일반적으로 많이 사용되는 매듭법은 포인 핸드넥타이 기준으로는 플레인 놋트, 윈저놋트, 하프윈저놋트, 크로스놋트, 더블놋트, 브라인드 폴드놋트, 보우타이를 기준으로는 >베이직놋트와 더블 베이직놋트 이며, 아스콧타이는 논 놋트이다.


※딤플 (Dimple) 이란?
딤플 이란 보조개라는 말로 넥타이를 맷을 때 매듭밑에 만드는 옴폭한 홈을 뜻한다.
넥타이매듭에 있어서 크게 두가지 흐름이 있는데 하나는 영국인과 앵글로 어메리칸들이 선호하는 방식이고 또 하나는 프랑스식인데 전자는 매듭밑에 딤플을 만드는 매듭법이고, 후자는 딤플을 만들지 않는다기보다는 딤플을 의식하지않고 가볍게 살짝 매는 방법이다. 이 딤플에는 넥타이를 비교적 가늘게 맷을 때 잘 어울리는 「센터 딤플」과 비교적 굵은 와이드 타이에 잘 어울리는「더블 딤플」두가지 타입이 있다.
센터 딤플은 매듭 바로 밑 중앙의 한군데, 더블 딤플은 매듭 바로 밑 중앙의 양단에 홈을 만드는 방법으로 당연히 센터 딤플 보다 더블 딤플이 고도의 테크닉을 요구한다.
딤플이 없이 꽉 조여진 매듭의 넥타이를 착용한 사람을 보면 여유가 없는 듯한 느낌과 단지 넥타이를 매고 있다는 느낌을 받는 것에 비해 넥타이매듭 하단에 우아한 딤플을 연출한 모습은, 보다 넉넉하게 여유있고 풍성한 느낌을 받는다.
 
 
가장 기본적으로 포플러한 매듭방법으로19세기 중엽 넥 웨어의 주류를 이루던 나비 매듭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시도로 등장하였다.
오늘날 세계적으로 가장 활용 범위가 넒은 매듭법으로 우리 나라에서도 윈저 놋트, 하프윈저 놋트와 함께 가장 선호 되는 넥타이 매듭 법이다.
이 매듭법은 대검을 좌우 어느 쪽에도 걸지 않고 한 바퀴 만 감아 내려 매는 것으로 매듭 모양이 길고 가늘게 형성되므로 '얼굴이 마르고 삼각형에 가까운 사람에게 잘 어울리는 매듭법'이며 경쾌하고 산뜻한 느낌을 준다.
응용범위가 넓어서 확실히 익혀둔다면 어떤종류의 넥타이도 잘 멜 수 있게 한다.
       
 
  매듭의 중심이 흐트러지기 쉬우므로 좌측 끈에 밀려 한쪽으로 밀리지 않도록 주의.
매듭의 밑 쪽 중심에 만드는 딤플이 심플하게 보이도록 한다.
 
 
 
 
  밝은 색조의 무지, 또는 극히 작은 무늬의 타이로 다소 재치있고 장난끼 섞인 느낌을 나타내 보고 싶을 때 시도해 봄직한 매듭 법이다.
무지 또는 무지 감각의 넥타이로서 만드는 V존은 당연 대단히 심플한것 이 되지만 이 매듭법은 그 심플함에 조금 변화를 줄 수가 있다.
플레인 놋트와 같은형으로 매듭의 중앙을 비스듬하게 달리는 1가락의 줄기가 그 비결이라 크로스 된 매듭의 선이 충만한 생동감을 준다. 무지 넥타이는 자칫하면 단순히 넥타이를 매고 있을 뿐이라는 느낌이 되기가 쉬운데 이런 변화가 이미지를 변화시킨다. 넥타이 자체보다도 매듭의 독특함이 전체 이미지에 차지하는 비중이 크다 는 점에서 다른 매듭 법보다 한층 더 두드러진다. 따라서 이 매듭법을 사용할 경우에는코디네이트 전체를 조금 억제하고 이 매듭법 만으로 연출 한 다고 하는 생각을하면 좋다. 실용성도 비교적 높은 매듭법이다.
       
 
  심플함에 변화를 주는 이 크로스 놋트는 무늬가 큰 넥타이는 피하고 수수한 느낌의 넥타이를 해야 한다. 무늬가 너무 크면 색다르게 변환 매듭의 재미가 오히려 역효과로 되어 전체가 너무 두드러진 게 되어버린다. 또 하나 주의해야 될 것은 넥타이의 소재인데, 실크 타이로도 훌륭한 매듭을 할 수 있지만 울 타이라면 음영의 효과가 보다 강하게 된다.
 
 
  보우타이의 가장 기본적인 매듭 법이 이 베이직 놋트이다.
오늘날과 같은 보우 타이가 탄생한 것은 19세기 말경이라고 한다. 퇴폐와 향략의 세기말 적인 사회 풍조 중에서 당시의 상류 계급 남성들 사이에는 급진적인 넥타이에 대한 욕구가 있었었다.
그때까지 유행하던 크라바트를 대신할 새로운 칼라 장식에 대한 여러 가기 시도에 의해 생긴것이 펠트 형태의 천으로 묶는 나비 넥타이라는 것이었다. 나비 매듭으로 묶는 이 새로운 넥타이는 그 신선함으로 맺을 때 칼라의 모던한 이미지는 당시 사람들에게 강렬한 인상을 주기에 충분한 것이 였으며 이후 여러 가지 형태의 보우 타이가 났으나 그 매듭법만은 이 베이직 놋트뿐이였다고 한다. 포멀 웨어 착장시 빠지지 않는 보우 타이는 평상시 그다지 사용할 기회가 적어 완벽하게 매기까지 는 숙련을 요한다. 요즘은 아예 매듭지어져 있어 띠로 두르기만 하면되는 보우 타이도 시판되고 있으나 자신이 스스로 매어 그 방법을 알아 놓는것도 좋겠다.
       
 
  매듭을 중심으로 하여 좌우 균형을 이루도록 매는 것이 중요하다.
 
 
 
  일반적인 넥타이 매듭 법으로는 자주 사용되지 않는 매듭 법이지만 한 번쯤 변화를 시도해 봄직한 넥타이 매듭 법이다.
방법은 그림을 보면 알 수 있듯이 넥타이를 감아서 뒤쪽 앞으로 묶어 통상의 셔츠 속에 감추어져 있는 부분이 바깥쪽으로 보이게 하게 하 는 매듭 법이다.
전체적으로 소프트하게 마무리하므로 V존에 부드러움을 나타내고자 할 때 적합한 매듭법이다. 보통의 포인 핸드 타입의 넥타이보다는 아스콧 타이에 잘 어울리는 매듭이며 아스콧타이에 적 용하면 한층 부드러움이 더해져 니드 한 연출이 가능하다. 여름철에는 린넨 재킷에 코튼 또는 린넨의 타이를 논 놋트를 적용해 보는 것도 색다른 멋을 연 출할 수 있다. 특별히 큰 특징이 없는 자켓을 좀 니드 하게 입고 싶을 때 효과를 발휘 할 수 있는 매듭이다.
       
 
  좌우로 끌어넣은 부분이 서로 대칭이 되도록 유의할 것. 양쪽에 감겨진 2개의 매듭이 깨끗하게 삼각형을 이루도록 조정할 것. 강하게 꽉 조여 매면 이 작업이 어려우므로 주의한다. 가벼운 느낌을 내기 위해서는 아스콧 타이가 적격이지만 부드러운 실크 프린트 타이등에도 적용 할 수있다.
 
 
 
  윈저 놋트의 정갈함과 단정함이 좋기는 하지만 매듭이 너무 크다고 생각 될 경우 적합한 매듭 법이 하프윈저 놋트이다.
세미 윈저 놋트라고도 부르는 이 매듭 법은 가는 넥타이를 맺을 때 매듭 이 가늘고 길게 되는 것을 피하고자 할 때 적합한 매듭이다.
윈저 놋트는 매듭 중심에서 대검을 좌우로 2회 걸지만 하프윈저 놋트는 이것을 한번만 거므로 매듭 의 볼륨감이 윈저 놋트 보다는 다소 작다. 한쪽에만 대검을 걸기 때문에 좌우를 균등하게 만들기 위해서는 각 과정에서 꽉 조여야 할 필요가 있다. 생지가 두꺼운 넥타이는 윈저놋트와 거의 같은 볼륨감을, 심지를 넣지 않은 것 같은 얇은 넥 타이는 플레인 놋트 같은 심플함을 연출 할 수 있는 매듭 법이다. 단정하고 깔끔한 이미지로 비즈니스 정장에 가장 잘 어울리는 매듭법중 하나이다.
       
 
  윈저 놋트의 경우와 같이 두꺼운 넥타이는 매듭이 크게 되므로 피하는 것이 좋다.
 
 
  보우타이를 내는 방법 중 가장 손쉬운 방법 중의 하나이다.
원링 놋트라 부르는 것은 매듭 후 고리가 하나만 생기는 것에 연유한다. 매듭 후의 상태는 타이가 수평한 일직선이 되지 않고 한쪽으로 약간 기 울여지게 된다. 이것이 이 매듭의 특징이며 멋이다.
하지만 어느 정도에나 잘 어울리는 매듭으로 는 볼 수 없으며 가까운 동료들의 파티등에 적용하기 에 적당한 매듭이다. 이 매듭의 장점의 하나는 타이의 소재, 종류에 구애 받지 않는다는 점이다. 카라부분이 허전할 때 스카프나 치프, 리본 등을 이용해서 자신만이 타이를 연출해보는것도 개성 있는 패션 연출을 위한 지혜이다.
       
 
  보통의 보우타이로 충분하지만 목뒤에서 길이 조정이 가능한 타입의 보우타이가 적격이다. 매듭의 끈부분이 너무 짧거나 길면 검선이 밑으로 쳐기지게 되어 이 매듭의 장점이 반감되므로 주의
 
 
  세계적인 베스트 드레서 였던 영국의 윈저공이 창안한 넥타이 매듭 법으 로 폭이 넓은 매듭이 특징이다.
윈저공 (1936년 에드워드 8세로 즉위했으나 미국인 이혼녀 심프슨 부인 과의 사랑으로 국민적 반대에 부딪쳐 10개월만에 왕위를 버리고 윈저공 이 됨)이 왕세자 시절 당시 궁정 외교가 성행하여 친선사절로 세계 각지 를 돌아다녔는데 그의 옷차림은 신문과 잡지 그리고 귀족 영화를 통해서
세계로 퍼져나가 강렬한 인상을 남겼었다. 그가 한번 입었던 옷차림은 그것이 점잖은 것이든 파격적인 것이든 그대로 정석으로 받아들여져 당시 귀족은 물론 세계 비즈니스맨들에게 대 유행되었다. 이 윈저 놋트도 윈저공 자신이 즐겨 입는 스프레드 칼라(Spread colla)셔츠의 깃 사이를 정리하 기 위해 이 매듭을 고안했다고 전해지지만 정작 윈저공 자신은 이것을 부정하였다한다. 윈저 놋트가 가장 잘 어울리는 것은 역시 브리티시 스타일이다. 매듭이 역간 수평으로 퍼지는 매듭법이므로 특히 윈도우 칼라에 잘 어울린다. 얼굴이 비교적 길거나 턱이 홀쭉한 서구인들이 얼굴모양을 짧게 보이게 하기 위한 매듭이다.
       
 
  대검을 걸칠 때 조르는 상태를 양쪽 걸린 부위의 조임이 균등한 상태를 유지 할 것. 또 매듭이 너무 크면 품위가 없이 보이게 되므로 두꺼운 넥타이는 피하는 것이 좋다. 매듭의 밑쪽 중심에 하나 또는 두 개의 딤플을 만들면 매듭자체가 주는 강한 인상이 보다 부드러워 지고 여유 있어 보인다.
 
 
  비즈니스 슈즈가 아닌 캐주얼 슈트나 주말에 드레스다운을 즐길 때 사용되는 매듭 법이다.
매는 법은 플레이 놋트와 같다. 플레인 놋트로 넥타이를 맨 후, 대검과 소검을 좌우로 뻗쳐 놓는다.
통상의 플레인 놋트에서의 매듭은 밑을 향하여 원추형을 만들고 있다. 그러나 이것을 좌우로 잡아 당겨서 원추형을 반대로 향하게 한다. 이로써 대검과 소검은 좌우로 나누어져 나란히 내려지게 되는데 이런 작업으로 보통의 넥타이가 변해 유니크한 것으로 변신하는 모양은 정말 감동적이다. 넥타이를 사용한 드레스다운은 어느 정도 패션에 흥미를 가지고 있으면 바로 생각이나는 테마이 기도 하며 평소와 다른 새로운 느낌을 연출 할 수 있다.
       
 
  대검과 소검이 거의 같은 길이가 되게 매도록 한다. 진즈의 차림에 맞추거나 닛트 폴로의 칼라에도 잘 코디네이트되며 전체적으로 와일드한 느낌을 나타낸다.
 
 
  더블크로스 놋트는격조 높은 중후한 느낌을 주는 매듭 법으로 유럽의 신사들이 애용하는 방법이다.
이 방법의 특징은 뭐니뭐니해도 매듭부분에 있다. 교차되어 균형을 이룬 Z형 매듭에서 넥타이의 섬세한 풍요로움이 살아 난다 하겠다.
매듭법은 큰 날을 좌우한번씩 감은 후 그 위에 다시 두 번 감은 후 감은 매듭 속으로 넣어 앞으로 내린다. 이 매듭법을 사용하면 옷깃이 꽉 조이는 느낌이 들게 되므로 착용감을 크게 느끼게 한다. 와이드칼라셔츠나 깃을 높이 세운 레귤러칼라의 드레스셔츠에 잘 어울리며 윙 칼라의 셔츠에 적 용하면 보다 격조 높은 세미 포멀함이 연출된다. 무지 넥타이 또는 화려한 모티브의 실크 타이에 잘 어울린다.
       
 
  매듭 위에 넥타이가 교차하고 있는 것을 잘 보이도록 조절할 것 매듭이 여러 겹이 되므로 너무 두꺼운 넥타이는 피하는 것이 좋으며 타이의 폭도 넓은 것보 다는 좁은 것이 적합하다.
 
 
  넥타이 매듭 법 중에서 가장 오래전부터 있어 왔던 매듭 법이다
17세기, 화려함이 즉에 달했던 루이 14세 시대에 생겨난 매듭 법으로 당 시는 현재와 같은 보우타이가 아니고 오히려(차라리) 리본 타이에 가까 운 것을 맷다고 한다.
당시에는 낵타이를 매는 이렇다 할 매듭 법도 없었고 넥타이의 길이도 현재처럼 어떤 정도로 통일 되어져 있었던 것이 아니었으므로 멋쟁이들은 되도록 독특한 방법으로 매고자 했었다. 여러 가지 방법으로 갖은 시행착오를 겪기도 했는데 이 더블 베이직 놋트는 이러한 배경에서 탄생 한 것이었다.
       
 
  베이직 노트보다 고름을 하나 더 잡아매는 이 방법은 매우 세련된 브이 존을 연출한다. 특히 좁고 길쭉한 보우타이를 사용하면 멋지게 묶이는데 양끝의 처짐에 각별히 신경써야 한다. 양끝이 적당히 흘러 내리도록 묶는 것이 세련된 모양으로 만드는 방법이다.
 
 
  플레인 놋트의 변형 매듭 중의 하나가 발룬 놋트인데 매듭의 윗 부분 을 당겨 올려 부풀게한 것이 특징이다.
매듭 윗부분에 부풀어오르게 한다는 의미로 발룬 놋트라 부른다. 매듭 법은 플레인 놋트와 동일하다. 우선 플레인 놋트를 기본으로 매듭을 만든 후 꽉 조여 형을 완성한 후 윗 부분을 조금 당겨 올린 후 다시 매듭을 조이면 된다. 매듭이 느슨하게 되면 야무지지 못한 느낌과 싸구려 넥타이를 매고 있는 듯한 인상을 받게되므 로 주의한다. 능숙하게 매면 매듭의 풍성함은 마치 열기구 같은 폼으로 만들어 V존의 즐거움을 넓혀준다. 열기구 같은 화려한 폼, 이것이 발룬 이라는 명칭의 뉴앙스이다.
19세기에는 당시의 셔츠의 크고 높은 깃에 어울리는 방법으로 실제로도 자주 사용 되었다고 한다. 보통의 플레인 놋트에서는 작아서 바란스가 나빠 좀더 훌륭한 매듭을 만들고 싶은 경우 에 유효한 매듭 법이다.
       
 
  매듭 윗 쪽 부분을 당겨 올릴 경우에 정 중앙으로 수직으로 당겨 올릴 것. 넥타이는 질이 좋은 약간 두꺼운 실크소재의 것을 사용하면 매무새가 깨끗하다.
 
 
  가는 넥타이 매듭 법으로 플레인 놋트보다도 작은 볼륨감을 나타내고 싶거나 심지가 부드러워서 쭉 펴지는 화사한 넥타이를 맬 때 적격인 매듭 법이다.
매듭 법은 플레인 놋트의 대검고리를 1회 더 감아서 2중 고리로 한다고 생각하면 된다.
2중 고리로 인하여 볼륨감도 어느 정도 나오고 매듭도 단단히 결속되므로 심플한 V존을 연출할 수 있다.보통의 비즈니스 슈트에 약간의 좁은 듯 한 롱 칼라 셔츠에 잘 어울리는 매듭으로 여가 에서 비즈니스까지 실용도가 높은 매듭법의 하나이다. 오히려 대단히 형태가 좋은 깃 언저리를 만들 수가 있다. 얼굴형이 두터운 사각형이나 긴 삼각형에 잘 어울린다.
       
 
  대검이 이중 고리로 되므로 첫 번째 고리가 두 번째 고리 밑 부문에 조금 보이게 된다. 이것이 이 매듭법의 특징이므로 그것을 감추기 위한 조정은 불필요하다. 오히려 이 작은 삐져나옴이 포인트이다.
 
 
  블라인드 폴드 놋트는 V존을 장식하는 넥타이 매는 법 중에서 넥타이 자체의 존재감이 가장 강하게 어필되는 넥타이 착용법이다. 이제까지 와는 전혀 다른 느낌의 V존을 형성하여 강렬한 이미지를 표현한다.
매는 법은 플레인 놋트 상태에서 대검을 매듭의 뒤쪽으로 돌려 앞으로 빼낸는 것이다.
이 매듭 법은 실제로 그리스의 해운왕 오나시스가 즐겨하던 넥타이 매듭 법으로 실용도 높다고 할 수 있다. 실제로 시험해보면 알겠지만 단지 조금의 변화도 이처럼 전혀 다른 V존의 연출이 가능하다. 이 매듭 법은 중후한 분위기를 연출하고 싶을 때라든가 파티 등 모임의 자리에서 세 미 포멀 한 느낌을 나타내고자 할 때 적절한 매듭 법 중의 하나이다.
       
 
  이 매듭법은 스포티한 복장에서는 역효과가 난다. 또한 사용하는 넥타이도 보통의 가는 트래드 한 무늬의 폭이 너무 넓지 않은 넥타이가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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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렌 굴드, 피아노 솔로 동문선 현대신서 102
미셸 슈나이더 지음, 이창실 옮김 / 동문선 / 2002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몇 일전 평소 읽고 싶었던 책들을 인터넷 서점으로부터 구입하게 되었다.

그 중 하나가 미셀 슈나이더 작 <글렌 굴드, 피아노 솔로>였다. 이 책에 대한 기대감은 꽤나 큰 것이었고, 또 책의 판형도 굉장히 앙징맞게 만들어 진 터라 한참 동안을 요모조모 살펴보았다.(난 맘에 드는 책이 있으면 책장을 넘기며 냄새를 맡거나 쓰다듬는 등 묘한 버릇이 있다.)

그렇게 얼마간의 유희를 즐긴 후 살며시 첫 장을 넘겼다. 첫 장에는 평소 굴드가 가장 좋아하는 시인이었던 T.S Eliot의 황무지에서 발췌한 시가 나를 반겼고 이는 내가 이 책에 대한 기대감을 더욱 부채질 하는 계기가 되었다.

결과론적으로 평하자면 책 자체는 그저 그런 쪽이었다. 나쁘진 않았으나 그렇다고 뛰어나지는 못한 凡作 이었다고 할까. 굴드에 대한 전형적인 시각에서 절대 벗어나지 못한

 

난 이 책에서 전혀 다른 모습의 굴드를 보기를 원했다. 굴드에 대한 여러 평전이나 수많은 기사에 노출되어버린 <기괴한 천재> 굴드가 아닌 이 책을 통해서만 접할 수 있는 또 다른 모습을 보기를..

나의 이런 기대감을 이 책은 충족시켜 주지 못했고, 아쉬운 작은 후회는 그저 오랫동안 듣지 않았던 굴드의 골트베르크 변주곡을 다시 한번 듣게 해주었다는 것으로 달래야 했다.

 

굳이 골트베르크 변주곡을 좋아하지는 않더라도 클래식에 조그마한 관심이라도 가졌던 사람에게는 글렌 굴드는 꼭 거쳐야만 하는 이름으로 남아 있다. 그의 음악에서도 뿐만 아니라 그가 그토록 증오해 마지 않던 음악 외적인 부분에서 더욱 그러하다. 어느덧 글렌 굴드라는 이름은 고도자본주의의 체제하에 잘 팔리는 문화적 상품이 되어버렸고, 그의 이런 기괴한 모습과 행적은 그의 아이콘으로 확고하게 자리잡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죽기 얼마전 굴드는 수줍게 이렇게 말했다.

 

나의 사생활은 간소하고 단조롭다. 그러므로 이 삶에 대한 책은 짧고 매우 지루할 것이다.

 

어쩌면 그건 그의 바램이었고 부탁이었을지도 모른다.

 

1964년! 32살의 젊은 피아니스트는 관객으로부터 영원히 떠나갔다. 그리고 그건 청중과의 결별이 아닌 관객과의 결별이었다. 자신의 연주장에 음악을 듣기 위해서가 아닌 연주회 이후에 벌어질 저녁 만찬을 기대하는 사람들, 다음날 자신이 굴드의 연주회에 있었다는 말을 하기 위해 거기 와 있는 그런 관객과의 결별을 선언했던 것이다.

대부분의 평전과 기사는 그가 청중을 싫어했다고 쓰고 있다. 하지만 난 그게 사실이 아니라고 믿는다. 그는 분명 심기증 환자여서 다른 사람과의 접촉을 매우 싫어한 것은 사실이다. 분명 그는 타인과의 육체적인 접촉은 매우 싫어했다 아니 매우 두려워했다. 하지만 그가 타인과의 일체적인 모든 단절을 원했던 건 절대 아니었다. 루체른에서 그의 연주에 심취한 한 늙은 클라브생 연주자를 알게 되었을 때 그는 그녀가 연주회에서 연주할 수 있도록 애써 힘써주었고, 그녀의 부족했던 재정적인 측면에서도 많은 걱정을 해주었다. 그런 일은 관심이 없다면 결코 할 수 없는 일이다. 자신의 연주를 진정으로 이해하고자 하며 사랑했던 청중을 결코 외면할 수 없었던 굴드였다.

타인과의 육체적 접촉을 할 수 없었던 굴드가 글쓰기,장난 전화,라디오,TV, 텔레파시에 집착하게 된 것은 그렇게라도 타인과의 교감을 원했던 자연스러운 선택이었다.

 

Persona라는 말을 기억하시는지 정신 분석학자였던 융이 자주 언급했던 말로 사실은 고대 그리스 연극에서 쓰던 탈을 의미했다. 오늘날의 사회는 한 개인에게 수많은 페르소나을 요구한다. 가정에선 가족의 일원으로써, 사회에선 그 각기 구성원으로써 그 자신의 위치와 지위에 알맞은 페르소나를 받아들이게끔 강요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수많은 페르소나를 짊어지고 살아가다 보면 어느날 정작 자신이 누구인가 하는 정체성의 혼란을 가져오게 된다.

마치 자신의 배역에 너무 빠져 정작 자신을 잃어버린 한 아리따운 여배우의 삶에서처럼

 

그런 짊어져야 할 다양한 페르소나를 감당할 수 없는 사람들이 있다. 굴드가 그러했다. 굴드는 언제나 굴드 그 자신이길 원했다. 그가 청중 앞에서 연주하길 싫어했던 것도 아마도 그런 이유에서 였을 것이다.  그는 외면에 치중하는 연주회를 비판하기 위해 늘 자신이 예로 들었던 바흐의 <파르티타 5번>을 들었다. 그는 이 연주가 가장 피아노다우며, 바흐가 아닌 리스트-바흐의 연주라고 강조했다

이에 책의 저자인 미셀 슈나이더는 이렇게 덧붙였다.

 

말하자면 대중 앞에서 연주를 할 경우 연주가 지니게 되는 왜곡이 잘못이라는 것이다. 즉 구와 절로 이루어진 악보의 음들을 뚜렷이 구분하기 위한 지나친 리듬의 강조나 크레센도, 디미누엔도, 강약의 불연속성이 자신의 연주를 더럽혔다는 것이다. 차이코프스키 홀의 2층석까지 음악이 들려야 했으니까, 장소에 따라 연주가 달라짐은 사실이다. 호로비츠 역시 자신의 연주 기법은 큰 연주홀에서의 연주를 위해 다듬어 졌음을 인정한다.. 중략

 

물론 저자는 굴드의 연주회 녹음이 그의 스튜디오 녹음보다 훨씬 생동감있고 아름다웠다는 것으로 글을 마무리 짓고 있기 하지만 말이다.

 

자신을 솔직하게 드러낸다는 것은 참으로 힘든 일이다. 정작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 솔직한 나를 대면하기도 힘든 실정이다. 이미 너무 많은 페르소나에 잠식되어버려 이미 잊혀져 버렸으니까

굴드는 그런 솔직한 자신을 끊임없이 요구했다.

그가 청중앞에서의 연주를 그만두고 스튜디오 녹음에 매달린 것도 그것과 결코 무관하지 않다고 나는 생각한다.

굴드를 비난하는 사람들의 주요 논지는 그의 Studio에서의 일련의 작업들이 짜집기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수많은 연주를 통해 가장 잘된 것만을 기술적으로 결합한 인공물에 지나지 않다는 것이다.

그들의 논점이 전혀 틀린 것만은 결코 아니다. 굴드는 그런 일련의 작업들을 무수히 많이 했다.

하지만 그런 편견에서 조금만 벗어나 한번 크게 살펴보자

 

만약 당신이 사랑하는 사람에게 연애 편지를 써야한다면.. 당신의 진심을 사랑하는 그녀에게 절실하게 전달하고 싶다면 당신은 그 편지를 단 한번만에 써버릴 수가 있을까? 결코 아닐 것이다. 수없이 고쳐 써야하고, 때로는 쓴 편지를 모두 찢어버리고 다시 써야 하는 경우도 분명 있을 것이다. 굴드에게 그 작업들은 바로 그런 것들이었다. 최고의 것, 최선의 것만을 선택해 완벽한 것으로 만들어 낸다. 그것이 굴드의 목적이었다. 타인과의 교감을 직접 나눌 수 없는(그 자신의 특이한 병명으로인해) 간접적인 방법으로만 가능했던 굴드에게 그것은 삶의 희열이었다. 자신을 감추지 않고 왜곡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보여줄 수 있다는 것, 그리고 그의 이런 진심을 수없이 퇴고해낸(?) 창작물로 타인에게 전할 수 있다는 것. 그건 분명 굴드에게 매력적인 일이었을 것이다.

 

바흐의 골트베르크 변주곡. Aria라고 불리는 단 하나의 주제가 끝없이 변주되다가 다시 한번 주제가 재현되면서 종결을 맞는 골트베르크 변주곡은 그에게는 더할 수 없이 딱 맞아 떨어지는 것이었다. 단 하나의 자신이 여러 모습으로 변주된다. 그 모습 하나하나가 그 자신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하지만 정작 나는 나일 뿐이다. 많은 다른 모습이 겹쳐진다해도, 다른 모습으로 왜곡 되어진다해도, 그 자신의 정체성을 잃어버려서는 안 된다는 것, 그것이 다시 한번의 Aria로 굴드에 의해 표현되는 것이다.

 

굴드의 삶은 고독하고 우울했다. 항상 혼자였고 또 혼자이길 바랬다. 혼자일 때 그는 왜곡되지 않은 그 자신으로서 있을 수 있기 때문이었다.

 

혼자 있으십시오. 은총이라고 할 수 있는 명상 속에 머무르십시오.

가장 소리가 잘 들렸던 장소들은, 내가 나의 목소리를 더 이상 들을 수 없었던 곳들이었다. 

 

그의 이런 내면의 고백들이 더 이상 나에겐 낯설지 않다.

 

ps> who am I 라는 제목은 굴드가 자동차로 여행을 하다 페튤라 클라크라는 한 여가수의 동명의 노래를 듣고 충격을 받아 그 노래를 듣기 위해 경선을 따라 죽 자동차로 질주했다는 에피소드에서 따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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