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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렌 굴드, 피아노 솔로 ㅣ 동문선 현대신서 102
미셸 슈나이더 지음, 이창실 옮김 / 동문선 / 2002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몇 일전 평소 읽고 싶었던 책들을 인터넷 서점으로부터 구입하게 되었다.
그 중 하나가 미셀 슈나이더 작 <글렌 굴드, 피아노 솔로>였다. 이 책에 대한 기대감은 꽤나 큰 것이었고, 또 책의 판형도 굉장히 앙징맞게 만들어 진 터라 한참 동안을 요모조모 살펴보았다.(난 맘에 드는 책이 있으면 책장을 넘기며 냄새를 맡거나 쓰다듬는 등 묘한 버릇이 있다.)
그렇게 얼마간의 유희를 즐긴 후 살며시 첫 장을 넘겼다. 첫 장에는 평소 굴드가 가장 좋아하는 시인이었던 T.S Eliot의 황무지에서 발췌한 시가 나를 반겼고 이는 내가 이 책에 대한 기대감을 더욱 부채질 하는 계기가 되었다.
결과론적으로 평하자면 책 자체는 그저 그런 쪽이었다. 나쁘진 않았으나 그렇다고 뛰어나지는 못한 凡作 이었다고 할까. 굴드에 대한 전형적인 시각에서 절대 벗어나지 못한…
난 이 책에서 전혀 다른 모습의 굴드를 보기를 원했다. 굴드에 대한 여러 평전이나 수많은 기사에 노출되어버린 <기괴한 천재> 굴드가 아닌… 이 책을 통해서만 접할 수 있는 또 다른 모습을 보기를..
나의 이런 기대감을 이 책은 충족시켜 주지 못했고, 아쉬운 작은 후회는 그저 오랫동안 듣지 않았던 굴드의 골트베르크 변주곡을 다시 한번 듣게 해주었다는 것으로 달래야 했다.
굳이 골트베르크 변주곡을 좋아하지는 않더라도 클래식에 조그마한 관심이라도 가졌던 사람에게는 글렌 굴드는 꼭 거쳐야만 하는 이름으로 남아 있다. 그의 음악에서도 뿐만 아니라 그가 그토록 증오해 마지 않던 음악 외적인 부분에서 더욱 그러하다. 어느덧 글렌 굴드라는 이름은 고도자본주의의 체제하에 ‘잘 팔리는’ 문화적 상품이 되어버렸고, 그의 이런 기괴한 모습과 행적은 그의 아이콘으로 확고하게 자리잡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죽기 얼마전 굴드는 수줍게 이렇게 말했다.
“나의 사생활은 간소하고 단조롭다. 그러므로 이 삶에 대한 책은 짧고 매우 지루할 것이다.”
어쩌면 그건 그의 바램이었고 부탁이었을지도 모른다.
1964년! 32살의 젊은 피아니스트는 관객으로부터 영원히 떠나갔다. 그리고 그건 청중과의 결별이 아닌 관객과의 결별이었다. 자신의 연주장에 음악을 듣기 위해서가 아닌 연주회 이후에 벌어질 저녁 만찬을 기대하는 사람들, 다음날 자신이 굴드의 연주회에 있었다는 말을 하기 위해 거기 와 있는 그런 관객과의 결별을 선언했던 것이다.
대부분의 평전과 기사는 그가 청중을 싫어했다고 쓰고 있다. 하지만 난 그게 사실이 아니라고 믿는다. 그는 분명 심기증 환자여서 다른 사람과의 접촉을 매우 싫어한 것은 사실이다. 분명 그는 타인과의 육체적인 접촉은 매우 싫어했다 아니 매우 두려워했다. 하지만 그가 타인과의 일체적인 모든 단절을 원했던 건 절대 아니었다. 루체른에서 그의 연주에 심취한 한 늙은 클라브생 연주자를 알게 되었을 때 그는 그녀가 연주회에서 연주할 수 있도록 애써 힘써주었고, 그녀의 부족했던 재정적인 측면에서도 많은 걱정을 해주었다. 그런 일은 관심이 없다면 결코 할 수 없는 일이다. 자신의 연주를 진정으로 이해하고자 하며 사랑했던 청중을 결코 외면할 수 없었던 굴드였다.
타인과의 육체적 접촉을 할 수 없었던 굴드가 글쓰기,장난 전화,라디오,TV, 텔레파시에 집착하게 된 것은 그렇게라도 타인과의 교감을 원했던 자연스러운 선택이었다.
Persona라는 말을 기억하시는지… 정신 분석학자였던 융이 자주 언급했던 말로 사실은 고대 그리스 연극에서 쓰던 탈을 의미했다. 오늘날의 사회는 한 개인에게 수많은 페르소나을 요구한다. 가정에선 가족의 일원으로써, 사회에선 그 각기 구성원으로써 그 자신의 위치와 지위에 알맞은 페르소나를 받아들이게끔 강요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수많은 페르소나를 짊어지고 살아가다 보면 어느날 정작 자신이 누구인가 하는 정체성의 혼란을 가져오게 된다.
마치 자신의 배역에 너무 빠져 정작 자신을 잃어버린 한 아리따운 여배우의 삶에서처럼…
그런 짊어져야 할 다양한 페르소나를 감당할 수 없는 사람들이 있다. 굴드가 그러했다. 굴드는 언제나 굴드 그 자신이길 원했다. 그가 청중 앞에서 연주하길 싫어했던 것도 아마도 그런 이유에서 였을 것이다. 그는 외면에 치중하는 연주회를 비판하기 위해 늘 자신이 예로 들었던 바흐의 <파르티타 5번>을 들었다. 그는 이 연주가 ‘가장 피아노다우며’, ‘바흐가 아닌 리스트-바흐’의 연주라고 강조했다
이에 책의 저자인 미셀 슈나이더는 이렇게 덧붙였다.
“말하자면 대중 앞에서 연주를 할 경우 연주가 지니게 되는 왜곡이 잘못이라는 것이다. 즉 구와 절로 이루어진 악보의 음들을 뚜렷이 구분하기 위한 지나친 리듬의 강조나 크레센도, 디미누엔도, 강약의 불연속성이 자신의 연주를 ‘더럽혔다’는 것이다. ‘차이코프스키 홀의 2층석까지 음악이 들려야’ 했으니까, 장소에 따라 연주가 달라짐은 사실이다. 호로비츠 역시 자신의 연주 기법은 큰 연주홀에서의 연주를 위해 다듬어 졌음을 인정한다….. 중략”
물론 저자는 굴드의 연주회 녹음이 그의 스튜디오 녹음보다 훨씬 생동감있고 아름다웠다는 것으로 글을 마무리 짓고 있기 하지만 말이다.
자신을 솔직하게 드러낸다는 것은 참으로 힘든 일이다. 정작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 솔직한 나를 대면하기도 힘든 실정이다. 이미 너무 많은 페르소나에 잠식되어버려 이미 잊혀져 버렸으니까…
굴드는 그런 솔직한 자신을 끊임없이 요구했다.
그가 청중앞에서의 연주를 그만두고 스튜디오 녹음에 매달린 것도 그것과 결코 무관하지 않다고 나는 생각한다.
굴드를 비난하는 사람들의 주요 논지는 그의 Studio에서의 일련의 작업들이 짜집기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수많은 연주를 통해 가장 잘된 것만을 기술적으로 결합한 인공물에 지나지 않다는 것이다.
그들의 논점이 전혀 틀린 것만은 결코 아니다. 굴드는 그런 일련의 작업들을 무수히 많이 했다.
하지만 그런 편견에서 조금만 벗어나 한번 크게 살펴보자
만약 당신이 사랑하는 사람에게 연애 편지를 써야한다면.. 당신의 진심을 사랑하는 그녀에게 절실하게 전달하고 싶다면 당신은 그 편지를 단 한번만에 써버릴 수가 있을까? 결코 아닐 것이다. 수없이 고쳐 써야하고, 때로는 쓴 편지를 모두 찢어버리고 다시 써야 하는 경우도 분명 있을 것이다. 굴드에게 그 작업들은 바로 그런 것들이었다. 최고의 것, 최선의 것만을 선택해 완벽한 것으로 만들어 낸다. 그것이 굴드의 목적이었다. 타인과의 교감을 직접 나눌 수 없는(그 자신의 특이한 병명으로인해) 간접적인 방법으로만 가능했던 굴드에게 그것은 삶의 희열이었다. 자신을 감추지 않고 왜곡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보여줄 수 있다는 것, 그리고 그의 이런 진심을 수없이 퇴고해낸(?) 창작물로 타인에게 전할 수 있다는 것. 그건 분명 굴드에게 매력적인 일이었을 것이다.
바흐의 골트베르크 변주곡. Aria라고 불리는 단 하나의 주제가 끝없이 변주되다가 다시 한번 주제가 재현되면서 종결을 맞는 골트베르크 변주곡은 그에게는 더할 수 없이 딱 맞아 떨어지는 것이었다. 단 하나의 자신이 여러 모습으로 변주된다. 그 모습 하나하나가 그 자신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하지만 정작 나는 나일 뿐이다. 많은 다른 모습이 겹쳐진다해도, 다른 모습으로 왜곡 되어진다해도, 그 자신의 정체성을 잃어버려서는 안 된다는 것, 그것이 다시 한번의 Aria로 굴드에 의해 표현되는 것이다.
굴드의 삶은 고독하고 우울했다. 항상 혼자였고 또 혼자이길 바랬다. 혼자일 때 그는 왜곡되지 않은 그 자신으로서 있을 수 있기 때문이었다.
“혼자 있으십시오. 은총이라고 할 수 있는 명상 속에 머무르십시오.”
“가장 소리가 잘 들렸던 장소들은, 내가 나의 목소리를 더 이상 들을 수 없었던 곳들이었다.”
그의 이런 내면의 고백들이 더 이상 나에겐 낯설지 않다.
ps> who am I 라는 제목은 굴드가 자동차로 여행을 하다 페튤라 클라크라는 한 여가수의 동명의 노래를 듣고 충격을 받아 그 노래를 듣기 위해 경선을 따라 죽 자동차로 질주했다는 에피소드에서 따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