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자가 일생동안 저지르는 일의 대부분은 비록 다른 핑계를 내세우지만
결국은 여자 때문이다.
Written by Hermann Hesse
지독스레 무더웠던 이번 여름에 난 내방 구석탱이에서 꿋꿋히 버텼다. 일단 바캉스를 가지 않은 이유에 대해서 나름대로의 해명을 하자면, 우선 수십만 아니 수백만 일수도 있는 온갖 사람들의 궁뎅이를 담그었을 것이 분명한 해수욕장이 싫어서이며,(특히나 작은 것도 아니고 큰 것을 하시고는 씻지도 않은 채, 그냥 물에 뛰어든 사람도 분명 있을 터이다.) 깊은 계곡물 곳곳마다 떠내려 오는 정체모를 밥풀때기가 싫어서이다.
바캉스(vacance)는 “무엇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것”이라는 뜻의 라틴어 바카티오(vacatio)에서 유래되었다고 하는데, 과연 우리는 제대로 자유를 만끽하고 있는 건지 모르겠다. 인간이 싫어서 산수를 찾았더니, 오히려 도심이 더 한산한 격으로, 쓰레기차를 피하려다 똥차에 치이는 꼴인 셈이다.
anyway, 선풍기 하나로 잘 버텨나가던 중 전력과다 사용으로 그만 shutdown이 되버렸다. 가뜩이나 더운데 전기마저 나가버리자 도저히 견딜 수 없게 된 나는 시원하고 신선한 공기를 찾아 백화점을 찾게 된 것이다.
백화점에서 가장 시원한 곳은? 당연 명품관이다. 돈을 가장 잘 쓰는 이들이 많이 들리는 곳인 만큼 온갖 편의가 제공된다. 마땅히 에어컨도 가장 빵빵하게 나오는 법인데, 밍숭맹숭 개기다 보면 괜스레 눈치 아닌 눈치를 받게 된다. 점원의 눈치를 받지 않으려면 당연히 살 것 같이 굴어야 하는 법이다.
당당하게 점원에게 이것저것 보여 달라며 시간을 잘 죽여 나가던 중에, 그만 그 녀석을 만나고 말았다. a.testoni-아! 테스토니다. 그냥 아 테스토니가 아니라 아! 테스토니다. 절로 입에서 탄성이 나온다. 구두가 다 거기서 거기지 뭐 별다를 수가 있나 하지만 별다를 수가 있다. 미묘한 detail이 여타의 것과는 전혀 다르다. 타비아니(Taviani) 형제가 감독한 영화 굿모닝 바빌론에서 어느 아버지가 아들에게 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 “장인은 손과 판타지다!”비록 가격대가 어마어마하게 붙어 있어도 일단 이런 것을 한번 보게 되면, 다른 것은 눈에 잘 안 들어오는 법이다. 여러 매장을 돌아도 계속 머릿속에서 아른거리며 영상이 밟힌다.
‘홈쇼핑에선 79000원에 신사화가 두 켤레인데... 제 아무리 볼로냐 공법에, 꼼꼼하게 숙련된 장인의 손을 거쳤다고는 하지만, 그 내구성이나 실용성에서 79000원짜리 10켤레만 하겠어? 조금만 침착하게 생각해봐. 응? 니가 그걸 사려고 하는 것은 베블런이 말했던 현시적 소비를 하려는 것이고 부르디외가 꼬집은 것처럼 "구별짓기"를 하려는 거라구. 한마디로 헛짓하는 거란 말이야. 그냥 두 눈 질끈 감고 나가는 거야! 별로 어렵지 않다구. 한 발자국씩 떼면 되는 거야. 왼발, 오른발, 왼발... 잘한다! 아기가 걸음마 하듯이 그렇게 하면 되는 거야.’
난 가까스로 두 눈 질끈 감은 채 매장을 탈출하는데 성공했다.
20여분이 지난 후 a. testoni 매장으로 결국 다시 돌아오고 말았지만...
왜 이런 헛짓을 하고만 걸까? 다 알면서도 왜 욕망에 굴복하고 만 걸까? 난 내가 납득할 만한 그럴듯한 이유를 찾기 시작했고, 잠시 후 보잘것없지만 나름대로 흡족할만한 해답을 찾아냈다. 내가 헛짓인걸 뻔히 알면서도 이 짓거리를 굳이 한 것은 누군가에게 잘 보이기 위해서이며, 내가 잘 보이고 싶어 하는 대상은 결국 여자밖에 없다. 군대에 있을 때 난 어둑칙칙한 나일론 군복에 촌스러운 오렌지색 체육복을 입고 족구를 했어도 전혀 수치스럽거나 불편함을 느끼지 못했다. 근데 왜 군대에 있을 때랑 지금이랑 다를까? 그건 바로 여자의 존재 때문이다.
이런 저런 핑계를 내세우지만, 내가 저지른 일의 대부분은 결국 여자 때문이다.
Hesse여! 그대는 단 한 번도 날 실망시키는 법이 없구려.
집에 가서 헤세의 선집이나 다시 한 번 찬찬히 읽어볼 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