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자책] 스탠퍼드식 최고의 수면법 - 적게 자도 피곤하지 않은 90분 숙면의 기적
니시노 세이지 지음, 조해선 옮김 / 북라이프 / 201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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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탠퍼드식 최고의 수면법](니시노 세이지/조해선 옮김, 북라이프)-전자책 대여

나는 잠에 매우 민감한 편이다. 잠을 잘 못 자면 나도 모르게 짜증을 낸다. 아기가 신생아 때 잠을 못 자서(정확하게는 두 세 시간마다 일어나야 해서) 매우 힘들었다. 안 그래도 모자란 잠, 산후도우미 이모는 더 자라고 하는데 엄마는 엄마의 필요를 위해 나를 깨울 때 너무 속상했다(산후우울증이었는지도 모르겠다. 갑자기 모든 것이 바뀌는 것은 나에게 엄청난 스트레스였다.). 2016년에 혼자 감당하기 어려웠던 큰 사건을 겪고나서 결혼 직전까지 6개월 동안 불면증에 시달렸다. ‘못 잔다‘는 건 나에겐 너무나 큰 고역이었고, 현재도 마찬가지다.

알라딘 2+1 전자책 대여 이벤트에 낚여서(?) 책 목록을 훑어보던 중 이 책이 눈에 들어왔다. 어떻게 하면 잘 잘 수 있을까? 하루의 1/3 정도를 잠에 보내는데, 나는 개운하게 일어난 적이 거의 없었다. 전쟁 따위의 무서운 꿈을 자주 꾸고, 일어나면 몸이 긴장하고 있다는 게 느껴졌다. 몸이 너무 굳어 있는 느낌이었다. 출근을 해야 한다는 압박감에 ‘못 일어나면 어쩌지?‘를 늘 생각하며 잠에 들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잘 자고 싶다는 소망이, 일어나서 개운하다고 느끼고 싶다는 소망이 이 책을 대여하도록 이끌었나 보다.

이 책은 수면에 관심이 많은 나에게 매우 흥미로운 책이었다. 책이 술술 넘어갔다. ‘수면부족‘이라 쓰지 않고 ‘수면부채‘라는 말을 써서 잠이 모자란 상태가 얼마나 해로운 상태인지 말한다. ‘자고 싶은 만큼 자도 수면 부족을 해소하려면 3주가 걸린다!‘(22쪽) 또, ‘수면(자는 시각)과 각성(깨어 있는 시간)은 한 몸이다.‘(8쪽)라는 말도 흥미로웠다. 이 책에서 계속 강조하고 있는 것은 ‘렘수면*논렘수면 주기와 상관없이 수면의 질은 수면이 시작된 직후 90분으로 결정된다.‘(9쪽)는 내용이었다. 그래서 ‘‘첫 번째 논렘수면‘ 단계에서 깊이 자려면 어떻게 해야 좋을지를 고민‘(24쪽)하는 것이 중요하며, 나폴레옹처럼 ‘단시간 수면자가 아닌 보통 사람은 적어도 6시간 이상 자는 편이 가장 좋다.‘(25쪽)고 한다. 수면 후 90분을 잘 보내기 위해서는 체온을 낮추어야 한다는 내용도 매우 흥미로웠는데, ‘잠들 때에는 심부 체온을 낮추고 피부 온도를 높여 차이를 좁히‘(48쪽)는 방법을 소개한다. ‘그러려면 먼저 피부 온도를 높인 다음 열을 발산해 심부 체온을 낮춰야 한다.‘(55쪽) 체온뿐 아니라 뇌도 수면에 중요한 역할을 한다. 나는 신랑이 옆에서 자거나 이야기를 해주거나 노래를 불러주면 나도 모르게 잠이 드는데 그것은 아마도 잠들기 위해 뇌가 ‘단조로운 상태‘가 되기 때문인 것 같다. 수면의 질을 높이려면 각성 방식도 달라져야 한다는 내용도 흥미로웠다. 수면과 각성에서 더 나아가서 졸음(오후 슬럼프)까지 다루며 수면의 전반적인 것을 이야기해주는 게 아주 좋았다.
이 책에는 여러 가지 재미있는 실험들도 많았고, 그동안 잠에 대해 갖고 있었던 잘못된 편견을 깨주기도 했다. 잠에 관심 많은 사람이라면 한 번쯤 읽어봐도 좋을 책이다.
알게 된다고 해서 다 실천하는 것은 아니다. 나에게 무엇보다 필요한 것은 ‘족욕‘과 ‘같은 시간에 잠자기‘이지만 참 잘 안 된다. 실천도 하지 않으면서 하루를 피곤하게 시작한다고 징징거리는 것은 정말 이중적인 태도다. 언제쯤 지행합일이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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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자책] 하마터면 열심히 살 뻔 했다
하완 지음 / 웅진지식하우스 / 201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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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마터면 열심히 살 뻔했다](하완, 웅진지식하우스)-전자책 대여

에세이는 매우 매우 오랜만에 읽은 것 같다. 잘 안 읽는 분야의 책을 왜 읽었냐고 묻는다면, 책 제목이 재미있어서였다. 열심히 살지 않겠다는 글쓴이의 신념(또는 결심)이 드러난달까.

‘노력이 우리를 배신할 때‘. ˝노력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얻을 수 없어.˝, ˝노력하지 않고 얻은 성공은 비겁한 거야.˝(10쪽) 라는 교육, 나도 지금껏 받아왔는지도 모르겠다. ‘열심히 노력했다고 반드시 보상받는 것은 아니다. 그리고 열심히 안 했다고 아무런 보상이 없는 것도 아니다.‘(11쪽) 노력을 하는 것은 노력에 합당한 보상을 얻기 위해서라는 것이 사람들의 인식임을 보여준다. Give & Take. 입력이 있으면 산출이 있는 법이다. 적어도 대학생 때까지는 이 원리가 통했다. 공부하면 공부하는 대로 점수가, 학점이 나왔으니까. 하지만 이후로는 가끔 노력해도 노력한 만큼 나오지 않을 때가 종종 있었다. 그러면서 보상에 대해 계속 생각했던 것 같다. 2012년에 요엘을 묵상하면서 보상에 관해 정리했던 게 생각났다.
1. 내게 있어 보상과 하나님께 있어 보상은 다를 수 있는데 그 점을 간과.
2. 꼭 보상이 있지 않더라도 하나님을 볼 수 있는 믿음(=그리 아니하실지라도)이 있는데 그걸 놓침.
3.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게 아니라 말씀으로 사는 건데, 떡(보상)에 집중.
8년 전이 지금보다 훨씬 생각이 깊었던 것 같다는 생각이 드는 것은 느낌적인 느낌일까. 어쨌든, 그때 보상에 대해 진하게 묵상했음에도, 그 뒤로는 말씀을 잊고 산 건지 책을 보면서 노력이 우리를(나를) 배신한다는 생각을 은연 중에 해왔다는 것을 깨달았다. 지난 묵상을 떠올리면서 생각을 다시 가다듬는다.
‘내가 이 나이에 정말 부끄러워해야 할 것은 내 나이에 걸맞은 것들을 소유하지 못한 게 아니라, 나만의 가치나 방향을 가지지 못하고 살아왔다는 사실이다.‘(20쪽) 이것은 참 부끄러운 일이다. 나 역시 그러하니까. 기독교적 가치관을 가지고 살아왔다고 생각했는데, 실제로는 매우 인본적이었고 다른 사람의 눈치를 많이 봤다. 소유의 문제보다 ‘나만의 가치나 방향‘이 없었다는 게 더 다가온다. 이 글은, ‘나만의 가치나 방향‘에 따라 내가 소유하는 것도 달라진다고 말하는 것 같다. 또, 내가 소유하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살펴보면 나의 가치와 방향이 무엇인지 알게 되는 것 같기도 하다.
‘힘이 들어간다는 건 경직된다는 것, 유연하지 않다는 것, 자연스럽지 않다는 것, 욕심을 내고 있다는 것, 겁을 먹고 있다는 것이다.‘(34쪽) 힘이 들어간다는 것을 겁을 먹고 있다는 것까지 생각을 확장시킬 수 있다는 것에(그 통찰력에) 놀랐다. 늘 긴장 상태에 있는 나는 늘 겁을 먹고 있구나.
이외에도 좋은 글들, 생각할 거리를 던져주는 글들은 많았다.

최선의 선택, 후회 없는 선택을 해야 해. 물론 그런 생각이 완전히 틀린 것은 아니지만 모든 것이 나의 선택에 달려 있다는 생각은 참으로 오만한 생각이었다.(32쪽)
무언가를 해야만 의미 있는 시간이 아니다. 때론 아무것도 하지 않는 시간이 더 큰 의미가 있다. 나에겐 그런 시간이 필요했다.(47쪽)
자신만의 취향이란 어쩌면 무수히 많은 실패를 통해 만들어지는 건 아닐는지.(65쪽)
그것(내가 진짜 하고 싶은 일)은 ‘찾는‘ 게 아니라 ‘찾아오는‘ 것이었다.(83쪽)
한 가지 분명한 건, 영원히 회사에 다니는 사람은 없다는 것이다. 언젠가는 모두 퇴사를 한다.(90쪽)
혹시 지금 뒤처지고 있는 건 아닐까 불안하다면 아마도 뒤처진 게 맞을 거다. 하지만 뒤쫓을 필요는 없다. 자신만의 속도와 길을 찾는 게 더 중요하다. 느린 건 창피한 게 아니다. 인정하자. 우린 뒤처졌다.(126쪽)
나 자신을 대단한 사람이라고 생각했을 때가 자존감이 가장 낮았고, 나 자신이 별거 아니라고 인정하고 나서야 자존감이 지금의 ‘보통‘ 수준으로 올라온 것이니 인생은 참으로 아이러니하다.(143쪽)
속지 않으려면 끊임없이 나 자신에게 물어야 한다.
‘지금 내 욕망은 어디서 온 것일까?‘
‘나의 삶은 불행한 것일까?‘
‘나는 세상에 속지 않고 살아가고 있는 것일까?‘(148쪽)
무언가를 얻었을 땐 얻은 것에 집중하느라 잃은 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고, 무언가를 잃었을 땐 잃은 것에 집중하느라 얻은 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한다.(154쪽)
이야기를 잃어버리고 결과만으로 어떤 사람을 평가 내리는 습관은 부메랑처럼 돌아와 내 삶을 평가한다.(158쪽)
그러나 나는 결과에만 관심이 있었고, 과정은 그 결과를 얻기 위해 견뎌야 하는 인내의 시간 정도로 생각했다. 과정 그 자체로도 충분히 재미있을 수 있다는 사실을 망각한 채 말이다. 그러니 쉽게 지칠 수밖에. 재미없는 걸 계속할 수 있는 사람은 드물다. 내가 부러워했던 사람들은 과정 자체를 즐기는 사람들이 아니었을까?(164쪽)

이 글들 하나 하나 곱씹으면서 글을 쓴다면 서평이 매우 길어질 것 같아서 여기에서 멈춘다.
이 책을 읽고 사람들은 다들 무언가를 얻기 위해 살아간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무엇을 얻으려고 하나?‘를 생각한다. 노력에 대한 ‘보상‘, 나의 가치와 방향에 따른 ‘소유‘, 얻고 싶은 ‘결과‘. 무언가를 얻고 싶은 욕망 자체를 비난할 수는 없다. 인간은 원래 그런 존재니까. 욕망에 흔들리지 않는 가치와 방향, 그것을 찾기 위해 지금껏 분투해왔던 것 같다. 나는 욕망에 흔들리는 것을 죄악시했고, 현대사회는 마음껏 욕망에 흔들리라고 말한다. 내가 얻고자 했던 것이 무엇인지 나열해보면 내가 어떤 욕망에 흔들리는지 알 수 있을 것 같다. 여기까지 쓰고 보니 정리가 된다. 욕망이 가치와 방향이다.

보상에 대한 이전의 묵상들을 다시 읽어보며, 서평을 마무리한다.

2013.8.13. 유일한 보상, 하나님나라
1. 요즘은 양용의 교수님의 ‘하나님 나라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라는 책을 읽고 있습니다.
2. 하나님 나라라고 하면,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 6:33) 말씀이 먼저 떠오릅니다.
3. 문득, 저에게 ‘더해주실 이 모든 것’을 얻기 위해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4. 이 세상에서는 사람들이 수고한 만큼 그에 상응하게 보상하는 정비례의 원리로 셈합니다(물론, 불법이 난무하기도 합니다.). 이 원리에 익숙한 저는 하나님 나라에서도 그렇게 셈할 거라고 착각하고 있었나 봅니다. 상이든 벌이든 모든 갚아주심이 다 은혜라고 하면서도, 실제로는 주신 것과 주실 것의 (눈에 보이는) 양과 질을 따져보고 있었던 제 모습을 봅니다.
5. 하지만 하나님 나라에서는 누구에게나 그 수고보다 못하지 않은, 그리고 사실은 수고보다 훨씬 더 많이 보상해 주시는 은혜의 원리가 적용됩니다.
6. 또, 이 세상에서 제자로서의 삶을 살기 위해 남보다 많이 포기하고 수고할 때, 희생한다는 생각이 들거나 하나님이 주실 보상을 바라고 할 때가 종종 있습니다.
7. 하지만 기억해야 할 것은, 우리의 모든 소유권을 포기하고 주님을 따르는 것의 유일한 보상은 하나님 나라 그 자체라는 사실이며, ‘기쁜’ 마음으로 하나님 나라를 소유하기 위해서 애써야 한다는 것입니다.
8. 레위인에게 기업은 하나님이었습니다. 그 어떤 더해주실 것보다도 유일한 보상 하나님 나라를 얻기 위해 고군분투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2013.9.8. 결과는 하나님의 것
1. 학습지도 연구대회 예선 전 일주일 동안 연습을 한 번도 하지 않았을 정도로 대회에 나가기 싫었습니다.
2. 예선대회 전날에도 본선대회에 안 나가고 싶어 대충 쓸지 말지 고민을 많이 했습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대충 쓰는 건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것 같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냥.. 순종하기로 했습니다.
3. 원하진 않았지만 예선에서 붙고, 본선을 준비하면서 결과를 놓기로 했습니다. 이미 처음부터 내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4. 본선 결과가 좋지는 않았지만, 하나님의 계획은 선하신 것을 믿었기에 아쉽지 않았습니다.
5. 이 대회를 겪으면서 최근 몇 년간의 대회들을 돌아보게 되었습니다. 노력한 대로 주어지지 않았던 평가 결과에 적잖게 실망하고 분개했었습니다.
6. 그동안 하나님께서는 제가 노력하는 대로, 혹은 그 이상으로 부어 주셨습니다. 그래서 노력하면 따라오는 결과를 당연하게 여기고 있었습니다.
7. 대회의 결과를 내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하나님 나라와 그의 의는 사라지고, 그 대회가 하나님의 것이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고, 하나님의 선하심을 신뢰하지 않고.
8. 순종과 함께 하나님의 것으로 돌려드리는 것, 하나님의 선하심을 신뢰하는 것. 이것이 어떤 상황에서든 잊지 않아야 할 지표임을 생각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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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이 개혁신앙이다
라은성 지음 / 페텔(PTL) / 201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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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이 개혁신앙이다](라은성, PTL)

개혁주의 성경공부 모임에서 읽은 책이다. 600쪽이 넘는 벽돌책이라 다 읽는 데 두 달 가량 걸렸다. 같이 읽으니 읽을 수 있는 거지, 혼자 읽었다면 책장에 고이 모셔져 있었을 책이다.

이 책은 기독교강요를 바탕으로 개혁신앙을 고백하는 신앙고백서들을 인용하며 무엇이 개혁신앙인지 설명해주는 책이다. 비록 맞춤법이 틀리는 곳이 종종 있어 읽기에 약간 거슬리는 부분이 있기는 하지만 크게 방해되는 정도는 아니다. 처음 읽을 때는 재미있게 읽었다. 무엇을 개혁신앙이라고 부르는지, 용어 정리를 명확하게 해주어서 좋았다. ‘지금도 철학과 신학의 경계선이 불분명하고 신념과 신앙의 구분이 모호합니다. 이런 현상은 개혁신앙을 위태롭게 합니다.‘(20쪽) 개념을 명확하게 정해놓지 않으면 이 사람이 이해하는 개념과 저 사람이 이해하는 개념이 달라 서로 의사소통이 이루어지지 않는다. 개혁주의를 표방하는 교단에 몸담고 있지만 실제로 개혁주의를 배우고 있지 않다는 생각이 드는 것은 그런 이유가 가장 클 거다. 개혁주의 교회를 오래 다닌다고 해서 개혁주의에 대해 아는 것은 아니다(물론 이 책에서는 개혁주의와 개혁신학, 개혁신앙을 구분해서 설명하고 있다.). 개혁주의를 표방한다는 예장 합동은 스펙트럼이 너무 너무 넓다. 개중에 고신과 대신이 매우 보수적이라고는 하지만, 지금 고신이 그렇게 보수적인지는 잘 모르겠다. 교리를 가르치지 않으니 이미 교단의 의미는 사라졌다. 목회자의 성향이 어떤지에 따라 덜 보수적인 교단의 교회가 보수적인 교단의 교회보다 더 보수적인 곳이 되기도 하는 형국이다.
그렇다면 무엇을 가리켜 개혁신앙이라 하는가? ‘개혁신앙인(또는 개혁파)이 로마 가톨릭으로부터 핍박받고 루터파로부터 버림을 받으면서 작성한 고백서가 있습니다. 이것을 가리켜 우리는 ‘개혁신앙‘이라 부릅니다.‘(37쪽)라고 설명하시며 교회사를 통해 어떻게 개혁주의가 형성되었는지 서술하신다. 네덜란드로 이동했던 개혁파들이 자신들이 믿는 바를 고백하여 정체성을 밝히기 위해 여러 가지 교리들을 확립하는데, 그것이 ‘벨지카 신앙고백서‘(벨직신경), ‘하이델베르크 교리문답서‘, ‘주네브 교리문답서‘(제네바 교리문답서)를 채택하는 일이었다. 또 돌드레히트 종교회의를 통해 채택된 ‘돌드레히트 신조‘(도르트 신조)에 기초한 신학이다. 이 돌드레히트 신조를 ‘5대 항목‘이라 부르기도 하는데, 이것이 그 유명한 TULIP이다. 벨지카 신앙고백서, 하이델베르크 교리문답서, 돌드레히트 신조를 연합을 위한 세 형식, 일치를 위한 세 형식이라 부르고, 이 형식들이 영국을 제외한 대륙에서 개혁신학을 따라 살았던 분들이 고백하고 가르쳤던 것이다(40쪽). 그렇다면 ‘웨스트민스터 기준서‘들은? 영국, 스코틀랜드, 웨일즈의 청교도와 장로교도가 고백한 내용들이다(50쪽). 신앙고백서들이 어떻게 만들어지고 채택되었는지만 알아도 내가 지금 무엇을 믿고 있는지를 정리하는 데 큰 도움이 된다고 생각한다. 개혁주의, 개혁신앙이라고 외치는 신학교에서, 벨직 신경, 하이델베르크 교리문답서, 제네바 교리문답서, 웨스트민스터 기준서들을 실제로 가르치고 있는지도 의문이고(주변에 신학생 지인들이 많고 들리는 바가 많아서 생기는 합리적 의문이다. 신학교를 졸업해도 기독교 강요를 끝까지 다 안 읽는다고 하니 말이다.), 교단 총회에서도 이런 신조대로 고백하고 있는지 의문이다. 신학교에서는 저 신조를 믿는 사람을 받아들이는 것을 전제로 해야겠지만, 실제로는 신앙의 결이 달라도 다 받아들이고 있고, 그러니 교단의 의미가 없어지는 것은 아닌지. 요즘 교회, 신학교, 총회가 무엇을 하는 곳인지에 대해 생각이 많다.
궁금증도 생겼다. 성도의 교제는 어느 교단, 교파까지일까. 이단만 아니면 다 가능한가? 알미니안에 반대해서 생긴 도르트신조를 생각하면, 현재 알미니안을 받아들이는 교회는 이단으로 인정되고 있지 않으니 이 간극을 어떻게 극복할 건지?
아무튼, 개혁신앙을 추구하는 사람이라면 한 번쯤 읽어봐야 할 책이다. 개혁주의 성경공부 모임에서 웨스트민스터 대교리문답을 공부하고 있기는 하지만, 사실 나도 잘 모른다. 믿음대로 순종하려면 내가 믿는 바가 무엇인지 분명하게 말할 수 있어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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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자책] 아이야, 천천히 오렴 - 아이와 엄마의 ‘처음들’의 기록
룽잉타이 지음, 이지희 옮김 / 양철북 / 201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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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야, 천천히 오렴](룽잉타이/이지희 옮김, 양철북)-전자책

8월 책뜰안애에 갔을 때 권일한 선생님이 추천해주신 책이다. 권일한 선생님이 추천해 주시는 책을 계속 읽으니 선생님의 감수성(?)이 어떤지 조금 알 것 같다. 선생님이 추천해주시는 책들은 전부 ‘마음이 몽글몽글해지는 따뜻함‘이 있다. 이 책도 따뜻한 책이다. 룽잉타이의 다른 책도 읽을 예정이다.

책 표지에 적혀 있는 부제(?)대로 ‘아이와 엄마의 ‘처음들‘의 기록‘이 적혀 있는 책이다. 글쓴이가 아이를 어떻게 키웠는지 먼저 경험한 내용을 글로 풀어주어 좋았다고 할까. 이 책은 여러 개의 에피소드로 이루어져 있는데, 그 중 마음에 와닿았던 부분들을 소개해 본다.
‘왕자와 결혼해서 행복하게 살았습니다‘에 나오는 부분이다. ‘어차피 긴 시간 성장해나가는 동안 이 아이는 인간 세상의 온갖 추악한 일을 수없이 목격할 것이다. 그런데 굳이 두 살 때부터 사람들 사이의 원한에 대해 알게 할 필요가 있을까.‘(21쪽) 아마 부모라면 누구라도 이렇게 생각할 것이다. 하지만 글쓴이가 고르는 책들마다 다 비슷한 내용이 펼쳐지고, 그런 책들을 아이 손이 닿지 않는 곳에 두다가 ‘엄마는 피식, 웃고 말았다. 이것이야말로 검열이 아니고 무엇일까? 책들을 미리 검사하고 금지시키는 것이니 말이다. ...(중략)... 검열도 별것 아니구나. 민중을 두 살짜리 어린아이로 여기는 것일 뿐.‘(22쪽)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여전히 검열이 필요한 ‘영역‘이 있다고 생각한다. 왜 그렇게 생각하냐고 묻는다면 서평이 길어지니까 여기까지.

˝그렇게 많은 너의 꿈과 계획이, 엄마가 되고 나서 모두 실현할 수 없게 된 거지?˝
엄마는 녹초가 된 몸을 소파에 기대며 힘없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응.˝
˝그래서, 후회하니?˝
...(중략)...
잠시 후 엄마가 입을 열었다.
˝아니, 그렇지는 않아.˝ 그리고 다시 침묵. ˝어떤 경험은..... 도저히 말로 표현할 수가 없거든......˝(29쪽)

나는 다른 엄마들에 비해 덜 힘들게 육아를 하고 있는 게 사실이다. 그래서 그 시간 동안 지금처럼 서평도 쓰고, 책도 읽고, 피아노도 친다. 하지만 내가 아기와 놀지 않는 시간 동안은 분명, 아기와 멀어지고 있다. 아기가 옆에 있는 순간은 힘들지만 괜찮은 순간이다.
‘아이를 가진 제자에게‘에서 글쓴이는 이렇게 편지를 썼다. ‘두 사람의 아이이니, 아이를 낳는 것 역시 두 사람 모두의 일이야.‘(35쪽) 멋진 말이라고 생각했다. ‘아이 엄마가 가장 큰 ‘권한‘을 지니게 되고, 어느 누구라도 ‘생모‘의 권리를 존중해주어야 하지. 아기는 먼저 엄마의 아들이고, 그다음으로 자신의 손자라는 사실을 내 어머니는 분명히 알고 계셨어. ...(중략)... ˝물론 결정은 엄마인 너의 몫이야.˝ ...(중략)... 사랑과 관련된 일이라면 무슨 일이든 풀어나가기가 어렵지 않아. 두려워해야 할 것은 증오야. 사랑이 아니라.‘(37쪽) 감사하게도 나는 시댁이 매우 가까운 편이라, 시어머니께서 아기를 매일 봐주신다. 내가 키우고 싶은 방식과 어머니가 키우고 싶으신 방식은 다르고, 물론 충돌할 때가 있다. 제일 스트레스 받았던 것은 신생아 때였는데, 모유를 먹인지 얼마 지나지 않아 아기가 울면 모유를 먹여야 하는 거 아니냐는 말을 들을 때였다(지금 생각해도 스트레스다.). 모유 먹이는 간격을 점차 늘려가야 하는데 아기가 배고파서 우는 것이 아니었음에도 그런 말을 들을 때마다 머리가 아팠다. 친정 엄마랑도 이 문제로 날선 분위기를 만들 때가 많았는데, 한국에서는 ˝물론 결정은 엄마인 너의 몫이야.˝라는 말을 듣기가 참 어려운 것 같다. 그럼에도 그런 말들을 하시는 건 아이를 사랑해서일 거라 생각하면 마음이 조금 누그러지기는 한다(아기가 울면 불안해지기 때문에 빨리 울음을 달래려는 목적으로 모유를 먹이라고 말한다면 싫겠지만.).
신기했던 이야기는 ‘여와 이야기‘였다. 여와는 중국 고대 신화 속의 여신인데, ˝여와는 기뻐하며 진흙인형에게 이름을 지어주었단다. 아주 단순한 이름이었지. ‘사람‘이라고 말이야.˝(41쪽)라고 이야기를 해주었다. 여와란 이름 자체에서 ‘여호와‘를 자연스럽게 떠올릴 수 있었고, 글쓴이가 마지막에 말한 부분에서 확실하게 알 수 있었다. 중국에도 이런 신화가 있다는 게 참 신기했다. 노아의 방주 이야기처럼 여기 저기 퍼져 나간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이 이야기를 해주는 와중에 아이의 발견은 실로 놀라운 것이었다. ˝엄마, 엄마 눈 속에, 눈동자에, 내가 있어. 안안이 있어. 정말이야......˝(41쪽)
아이를 키우면서 분명 아이와 나의 갈등은 존재할 것이다. 아이가 하기를 바라는 행동이 있을 것이고, 아이는 그 행동을 하기 싫어할 수 있다. 그럴 때 내가 글쓴이처럼 ˝좋아, 엄마가 강요하지 않을게. 하지만 네가 컸을 때 엄마가 억지로 시키지 않았다고 거꾸로 엄마를 원망하지는 말아줘.˝(105쪽)라고 말하면 아이는 이해할까? 이해해주면 좋겠다. 열아홉의 안안처럼 ‘하지만 지금 나는 나와는 다른 엄마의 문화를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그런 엄마가 자랑스럽다.‘(107쪽)고 말해주면 좋겠다. 아기에게 나의 시간을 좀더 내주어야겠다. 나에게 책 읽는 시간이,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있는 시간이 줄어들더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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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미니미니북) 더클래식 세계문학 미니미니북 9
윤동주 지음 / 더클래식 / 201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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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윤동주, 더클래식)-미니미니북 + 독서모임 후기

이번 달 성서교육회 독서모임 책이다. 내가 고른 책이기도 하다. 굳이 왜 시집이냐고 물으신다면, 시를 잘 몰라서라고 답한다. 다른 사람들은 시를 어떻게 읽는지 궁금했다. 학교에서 국어 수업을 할 때 제일 난감한 게 시 수업인데, 교과서 시를 버리지도 못하고 가르쳐야 한다는 생각에 마음이 너무 힘들었다. 그렇다고 내가 시를 잘 아냐고 묻는다면, 그건 아니라고 말할 수 있다. 교과서 시가 괜찮은 시인지(그 중에 괜찮은 시도 있다고 하니까) 안 괜찮은 시인지 구분도 잘 못하는, 시에 대해선 문외한이 바로 나다. 그래서 시를 알고 싶었다. 또, 시를 이해하고 해석하는 방법을 알고 싶었다. 시를 공부하고 싶었던 것 같다. 시를 좋아하면 알고 싶어지지 않을까? 그렇다고 내가 시를 좋아하지는 않는 것 같다. 어릴 때, 유치환 시를 외웠다. 김영랑, 김소월 시가 좋았다. 이육사의 이름이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듣고 그 시를 다시 보게 됐다. 알쓸신잡에서 심훈의 소설과 시를 함께 보며 ‘그 날이 오면‘을 다시 보게 됐다. 하지만 그뿐이었다. 길게 생각하지 않았다. 나는, 시를 오래 보고 싶어하지 않았다. 그런데 왜 시가 알고 싶어졌을까? 가르치려면 알아야 하니까. ‘가르침은 나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 걸까?‘ 이 질문은 여기에서 더 다루지는 않겠다.
수많은 시 중에 왜 윤동주 시였을까? 살아있는 사람의 작품을 다루고 싶지는 않았다는 게 첫 번째 이유, ‘동주‘라는 영화를 봤다는 게 두 번째 이유, 그 중에 집에 있는 책이 이 책이었다는 게 세 번째 이유다. 젊은 나이에 요절했지만, 지금까지 그의 시가 사랑받는 데는 이유가 있을 터.
사실 시를 읽는 동안 책장이 잘 넘어가지 않았다. 윤동주의 시적 감수성을 이해하기 어려웠다. 시는 여러 번 읽어야 그 의미를 깨달을 수 있는 법인데, 한 번에 이 시집을 다 읽어야 한다는 생각에 부담이 되었다. 거기다가 내가 고른 책이니 꼭 다 읽어야 한다는 부담이 나를 짓눌렀다. 이번 시즌부터는 책을 선택한 사람이 발제문을 준비하기로 해서, 발제문을 무엇으로 할까, 고민하기도 했다. 결국 내가 생각한 발제문은 ‘가장 마음에 들었던 시와 그 까닭‘, ‘내가 시를 이해하는 방법, 시를 가르치는 방법‘이었다. 나는 개인적으로 ‘길‘과 ‘팔복‘이라는 시가 좋았는데, ‘길‘에서는 마지막 연이 마음을 울렸다.

내가 사는 것은, 다만,
잃은 것을 찾는 까닭입니다.

누가복음 15장이 생각나기도 했다. 아, 이 시에 대해서는 함께 나누면 참 좋을 것 같다.

독서모임에서 다른 선생님들이 윤동주를 이해한 내용을 듣고서야 윤동주의 시를 조금 더 이해하게 되었다. 그 점이 참 감사했다. ‘서시‘에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가 다 나오는 줄도 몰랐고, 서시와 종시가 존재한다는 것도 몰랐다(윤동주는 큰 그림을 그리고 있었던 것이다. 그 큰 그림을 알려면 시를 여러 번 읽어봐야 할 것 같다.). 윤동주가 저항시인인지도 잊고 있었다. 일제 시대에 우리 글로 시를 쓴다는 게 얼마나 용기있는 일이었을지 생각하지 못했다. (초록은 동색이라고) 윤동주가 직접적으로 독립운동을 하지 않았지만, 독립운동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어울렸던 것을 용기라고 생각하지 못했다. 말하기도, 시를 쓰기도 부끄러운 감정들을 용기있게 시로 써내려갔다. 치열하게 살았던 윤동주의 삶이 오늘날을 사는 우리의 삶이어야 하지 않을지. 윤동주는 제 식대로 용기있게 살았는데, 부끄러운 것은 윤동주가 아니라 나다. 부끄러운 것을 부끄럽게 여기지 않고, 괴로워해야 할 것을 괴로워하지 않는 나.
‘태초의 아침‘과 ‘또 태초의 아침‘이 연결되어 있다는 것도 독서모임을 통해서 알게 되었다. ‘‘또 태초의 아침‘에서 가죽옷이 아닌 ‘무화과 잎사귀로 부끄런 데를 가‘린 이유는 무엇이었을까?‘라는 질문으로 시작된 시 나눔도 정말 멋졌다. 시 하나를 가지고 시 모임을 해도 참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다들 어쩜 이렇게 윤동주를 잘 이해하고 있으신지. 나에게 없는 눈이어서 부러웠다. 어쨌든 내가 보지 못한 부분을 볼 수 있어서 윤동주의 시를 조금이나마 더 이해할 수 있었다는 게 참 좋았다.
(결국 시를 이해하는 방법은 나누지 못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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