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미니미니북) 더클래식 세계문학 미니미니북 9
윤동주 지음 / 더클래식 / 201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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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윤동주, 더클래식)-미니미니북 + 독서모임 후기

이번 달 성서교육회 독서모임 책이다. 내가 고른 책이기도 하다. 굳이 왜 시집이냐고 물으신다면, 시를 잘 몰라서라고 답한다. 다른 사람들은 시를 어떻게 읽는지 궁금했다. 학교에서 국어 수업을 할 때 제일 난감한 게 시 수업인데, 교과서 시를 버리지도 못하고 가르쳐야 한다는 생각에 마음이 너무 힘들었다. 그렇다고 내가 시를 잘 아냐고 묻는다면, 그건 아니라고 말할 수 있다. 교과서 시가 괜찮은 시인지(그 중에 괜찮은 시도 있다고 하니까) 안 괜찮은 시인지 구분도 잘 못하는, 시에 대해선 문외한이 바로 나다. 그래서 시를 알고 싶었다. 또, 시를 이해하고 해석하는 방법을 알고 싶었다. 시를 공부하고 싶었던 것 같다. 시를 좋아하면 알고 싶어지지 않을까? 그렇다고 내가 시를 좋아하지는 않는 것 같다. 어릴 때, 유치환 시를 외웠다. 김영랑, 김소월 시가 좋았다. 이육사의 이름이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듣고 그 시를 다시 보게 됐다. 알쓸신잡에서 심훈의 소설과 시를 함께 보며 ‘그 날이 오면‘을 다시 보게 됐다. 하지만 그뿐이었다. 길게 생각하지 않았다. 나는, 시를 오래 보고 싶어하지 않았다. 그런데 왜 시가 알고 싶어졌을까? 가르치려면 알아야 하니까. ‘가르침은 나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 걸까?‘ 이 질문은 여기에서 더 다루지는 않겠다.
수많은 시 중에 왜 윤동주 시였을까? 살아있는 사람의 작품을 다루고 싶지는 않았다는 게 첫 번째 이유, ‘동주‘라는 영화를 봤다는 게 두 번째 이유, 그 중에 집에 있는 책이 이 책이었다는 게 세 번째 이유다. 젊은 나이에 요절했지만, 지금까지 그의 시가 사랑받는 데는 이유가 있을 터.
사실 시를 읽는 동안 책장이 잘 넘어가지 않았다. 윤동주의 시적 감수성을 이해하기 어려웠다. 시는 여러 번 읽어야 그 의미를 깨달을 수 있는 법인데, 한 번에 이 시집을 다 읽어야 한다는 생각에 부담이 되었다. 거기다가 내가 고른 책이니 꼭 다 읽어야 한다는 부담이 나를 짓눌렀다. 이번 시즌부터는 책을 선택한 사람이 발제문을 준비하기로 해서, 발제문을 무엇으로 할까, 고민하기도 했다. 결국 내가 생각한 발제문은 ‘가장 마음에 들었던 시와 그 까닭‘, ‘내가 시를 이해하는 방법, 시를 가르치는 방법‘이었다. 나는 개인적으로 ‘길‘과 ‘팔복‘이라는 시가 좋았는데, ‘길‘에서는 마지막 연이 마음을 울렸다.

내가 사는 것은, 다만,
잃은 것을 찾는 까닭입니다.

누가복음 15장이 생각나기도 했다. 아, 이 시에 대해서는 함께 나누면 참 좋을 것 같다.

독서모임에서 다른 선생님들이 윤동주를 이해한 내용을 듣고서야 윤동주의 시를 조금 더 이해하게 되었다. 그 점이 참 감사했다. ‘서시‘에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가 다 나오는 줄도 몰랐고, 서시와 종시가 존재한다는 것도 몰랐다(윤동주는 큰 그림을 그리고 있었던 것이다. 그 큰 그림을 알려면 시를 여러 번 읽어봐야 할 것 같다.). 윤동주가 저항시인인지도 잊고 있었다. 일제 시대에 우리 글로 시를 쓴다는 게 얼마나 용기있는 일이었을지 생각하지 못했다. (초록은 동색이라고) 윤동주가 직접적으로 독립운동을 하지 않았지만, 독립운동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어울렸던 것을 용기라고 생각하지 못했다. 말하기도, 시를 쓰기도 부끄러운 감정들을 용기있게 시로 써내려갔다. 치열하게 살았던 윤동주의 삶이 오늘날을 사는 우리의 삶이어야 하지 않을지. 윤동주는 제 식대로 용기있게 살았는데, 부끄러운 것은 윤동주가 아니라 나다. 부끄러운 것을 부끄럽게 여기지 않고, 괴로워해야 할 것을 괴로워하지 않는 나.
‘태초의 아침‘과 ‘또 태초의 아침‘이 연결되어 있다는 것도 독서모임을 통해서 알게 되었다. ‘‘또 태초의 아침‘에서 가죽옷이 아닌 ‘무화과 잎사귀로 부끄런 데를 가‘린 이유는 무엇이었을까?‘라는 질문으로 시작된 시 나눔도 정말 멋졌다. 시 하나를 가지고 시 모임을 해도 참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다들 어쩜 이렇게 윤동주를 잘 이해하고 있으신지. 나에게 없는 눈이어서 부러웠다. 어쨌든 내가 보지 못한 부분을 볼 수 있어서 윤동주의 시를 조금이나마 더 이해할 수 있었다는 게 참 좋았다.
(결국 시를 이해하는 방법은 나누지 못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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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ook] 스토너
존 윌리엄스 지음, 김승욱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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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토너](존 윌리엄스/김승욱 옮김, 알에이치코리아)-전자책

사람의 마음이 말랑말랑해지려면 문학을 읽어야 한다. 요즘 내 마음이 딱딱한 것은 문학을 멀리해서일까. 대단한 책이라는 추천이 많은데, 나는 사실 잘 모르겠다. 내가 소설을 읽는 목적은 오로지 재미라서일까. 머리 식히고 시간 때우기용으로는 소설만한 게 없다.

[스토너]도 권일한 선생님의 책 목록 중에 있었다. [스토너]는 [대지] 같았다. 몇 년 전에 읽었는지 기억도 나지 않는[대지]를 읽고 ‘한 나라의 흥망성쇠‘라는 한 문장으로 요약(?)했는데, [스토너]도 ‘한 사람의 흥망성쇠‘를 다루는 것 같다는 공통점 때문이다. 이 책은 스토너가 태어나서 죽기까지의 내용을 다루고 있다.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나 영문학 교수로 살게 된 스토너의 인생 이야기. 전체적으로 논하기에는 내가 소설을 감상하는 수준이 그에 미치지 못하기에, 부분적으로나마 마음에 남았던 구절들을 언급하며 서평을 이어 나가려 한다.

‘자신이 알고 있는 것과 학생들에게 가르칠 수 있는 것 사이의 간격이 너무 커서 그 간격을 좁히고 싶다는 생각조차 들지 않는 모양이었다.‘(11쪽) 스토너가 대학교 1학년 때 만났던 영문학 교수 아처 슬론에 대해 글쓴이는 이렇게 평가하고 있다. 내가 가르치는 일을 하는 사람이기에 이 문장이 들어왔는지도 모르겠다. 늘, 내가 알고 있는 것과 내가 가르칠 수 있는 것 사이의 간격이 너무 크다는 생각을 한다. 20대에는 내가 모르는 것을 가르치고, 30대에는 내가 아는 것을 가르치고, 40대에는 학생들이 아는 것을 가르친다고 했던가(정확하게 기억나지는 않는다.). 내가 아는 것이 무엇인지, 내가 가르칠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 진지하게 생각할 틈조차 없는 현실이다. 신기하게도, 그 ‘간격‘ 속에서도 스토너는 아처 슬론에게 매료되었다. ‘스토너는 농장에서 허드렛일을 하거나 창문 하나 없는 자신의 다락방에서 흐릿한 램프 불빛에 눈을 깜박이며 공부를 할 때 자신도 모르게 슬론 교수의 모습을 자주 떠올렸다.‘(11쪽) 그후로 스토너는 달라진다. 마치 가드너가 말한 ‘결정적 경험‘을 한 사람처럼. 아처 슬론의 수업을 듣기 전까지 수동적이었던 인생이 자의적으로 바뀌었다. 이 부분을 글쓴이는 ‘나중에, 훨씬 더 나이를 먹은 뒤에 그는 학부의 마지막 두 해를 되돌아보며 마치 다른 사람의 기억을 돌아보듯 까마득한 기분이 들었다.‘(13쪽)고 묘사한다. 캠퍼스의 연인들에게 친밀함을 느꼈던 것은 스토너가 책과 사랑에 빠졌기 때문은 아닌지. 그렇기에 자신의 장래를 ‘웅장한 대학 도서관‘으로 생각하고 두려움 없이 앞으로 나아갈 수 있었던 것 같다. 사랑은 두려움을 내어쫓는다. 내가 두려움이 많은 것은, 사랑하지 않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스토너는 후에 아처 슬론과 같은 교수가 된다. ‘신입생들에게 처음 영문학을 가르치면서 허둥거리던 그 시절부터 그는 자신이 영문학에 대해 느끼는 감정과 강의실에서 전달하는 내용 사이에 커다란 틈이 있음을 항상 의식하고 있었다. 그때는 시간이 흘러 경험이 쌓이면 그 틈이 사라질 것이라는 희망을 품었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았다.‘(62쪽)
스토너는 이디스를 만나 첫눈에 반한다. 결혼에 성공했지만 불행히도 둘 관계는 썩 좋지 못했다. 이디스를 보면서 나를 보는 것 같기도 했다. 긴장과 불안을 밀어내기 위해 ‘한층 더 힘들게 새로운 한계까지 자신을 혹사‘(43쪽)시킨다든지, 겉으로는 멀쩡해 보이지만 속으로는 온갖 피로와 불안을 안고 있다든지. 그것은 아마 자신의 감정을 어떻게 다루어야 하는지 배우지 못한 데서 감정을 다른 곳으로 발산시키려 하는 반대급부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신의 것임에도 자신의 것이 아닌 양 시간 속에 묻어버린 감정, 몸(32~33쪽에 이디스의 어린 시절 이야기가 나온다.), 이런 것들이 스토너와의 관계에서 이디스의 마음을 열지 못하게 했던 것 같다. 물론 스토너도 이디스의 마음을 여는 방법을 잘 몰랐기에 섣불리 접근할 수 없었을 것이다. 스토너가 이디스의 감정을 얻을 수 있었다면, 이후의 삶은 달라졌을 것이다. ˝자신에 대해 더 많은 것을 알기 위해서는 사랑에 빠져보아야 해요.˝(103쪽) 이디스는 사랑에 빠진 적이 없었다.
스토너와 이디스 사이에 태어난 딸 그레이스는 이디스와 감정적 교류가 거의 없었다. 그래서인지 그레이스는 엄마가 매우 오랫동안 집을 비우고 돌아왔을 때 ˝엄마, 보고 싶었어.˝가 아니라 ˝모양이 달라졌어요.˝라고 말했다. 스토너가 이디스의 마음을 열지 못한 채로 결혼생활을 시작했던 것처럼 이디스는 그레이스의 마음을 열지 못한 채 그레이스를 소유하려 했다. 그 순간부터 그레이스는 불행해지기 시작했다. 스토너는 이디스의 감정을 알았지만, 이디스는 그 감정을 인정하지 않았다(적어도 겉으로는). 아마 이디스는 자신의 감정을 인정하는 것이 두려웠던 것 같다. 또 이디스는 스토너가 집에 만들어둔 서재를 점점 축소시키면서 자신이 집 전체를 관장하려 했다. 마음 둘 곳 없어진 스토너는 학교로 눈을 돌린다. 계속해서 어긋나고 삐걱거린다. 보는 사람이 다 안타깝다. 솔직하게 인정하면 좋으련만. 그렇게 하지 않아서 빙글빙글 돌기만 한다.
내가 제일 흥분했던 부분은 스토너가 워커와 로맥스에게 당하는 부분이었다. 스토너가 옳았지만(이야기가 워커 쪽으로 유리하게 흘러가서 내가 글을 잘못 읽고 있나 생각할 정도였다.), 결국 스토너는 이빨 빠진 호랑이가 된다. 그 부분을 읽으면서 너무 너무 화가 났다. 나는 ‘억울함‘에 과민반응할 때가 많은데, 스토너는 억울한 사람이었다. 결국 스토너가 로맥스를 한 방 먹이는 것은 죽음을 앞두기 몇 년 전이었다. 이제 와서 한 방 먹이면 무슨 의미가 있나 싶을 정도로 세월이 지났을 때였다.

‘그는 냉정하고 이성적으로 남들 눈에 틀림없이 실패작으로 보일 자신의 삶을 관조했다. 그는 우정을 원했다. 자신을 인류의 일원으로 붙잡아줄 친밀한 우정. 그에게는 두 친구가 있었지만 한 명은 그 존재가 알려지기도 전에 무의미한 죽음을 맞았고, 다른 한 명은 이제 저 멀리 산 자들의 세상으로 물러나서...... 그는 혼자 있기를 원하면서도 결혼을 통해 다른 사람과 연결된 열정을 느끼고 싶었다. 그래서 그 열정을 느끼기는 했지만, 그것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기 때문에 열정이 죽어버렸다. 그는 사랑을 원했으며, 실제로 사랑을 했다. 하지만 그 사랑을 포기하고, 가능성이라는 혼돈 속으로 보내버렸다. 캐서린. 그는 속으로 생각했다. ˝캐서린.˝
그는 또한 가르치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실제로도 그렇게 되었지만, 거의 평생 동안 무심한 교사였음을 그 자신도 알고 있었다. 언제나 알고 있었다. 그는 온전한 순수성, 성실성을 꿈꿨다. 하지만 타협하는 방법을 찾아냈으며, 몰려드는 시시한 일들에 정신을 빼앗겼다. 그는 지혜를 생각했지만, 오랜 세월의 끝에서 발견한 것은 무지였다. 그리고 또 뭐가 있더라? 그는 생각했다. 또 뭐가 있지?
넌 무엇을 기대했나?‘(142쪽)

나는 인생을 되돌아보고 스스로 어떻게 평가를 내리게 될까? 지금 내리는 평가와 스토너가 죽을 때의 나이가 되어 내리는 평가에는 차이가 있을 것이다. 나는 어떻게 살기를 기대하고 있는 걸까? 지금 나의 삶은 내가 원하는 삶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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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ook] 기이하고도 거룩한 은혜 - 고통과 기억의 위로
프레드릭 비크너 지음, 홍종락.이문원 옮김 / 비아토르 / 201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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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이하고도 거룩한 은혜](프레드릭 비크너/홍종락, 이문원 옮김, 비아토르)-전자책

이 책은 8월 마지막 날에 끝까지 다 읽은 책이다. 그런데 9월의 마지막을 향해 가는 지금까지도 서평을 마무리짓지 못했다. 왜 그런지 모르겠지만, 이 책 서평은 자꾸 미루고 미루고 미루게 된다. 이 글을 쓰는 지금도 끝까지 다 쓸 수 있을지 의문스럽다.

권일한 선생님이 좋은 책이라고 하셨다. 그런데 선생님과 나는 신학적 부분에서는 색깔이 조금 다른 것 같아서 종이책으로 살지 전자책으로 살지 망설여졌다. 그러던 도중 비크너에 굉장히 감명받은 한 선생님의 도움을 받아 전자책으로 사기로 결정했다. 전자책은 서평 쓰기가 힘들어서 마음에 들지는 않는데, 집에 책이 워낙 많으니 소장해야 할 책인지 아닌지 판단할 필요가 있었다.
이 책은 자서전적인(?) 글이다. 비크너와는 신학적 부분에서 동의할 수 없는 부분이 많다. 단, 마음을 약하게 만드는 부분이 있는데(필립 얀시가 쓴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에서 다른 부분은 동의하기 힘들었지만 ‘용서‘에 대해서만큼은 마음이 말랑말랑해졌던 그때와 같았다.), 그것은 비크너가 어릴 때 ‘아버지의 죽음‘을 겪었다는 점이다. 그 부분에 대해서만큼은 할 말이 없었다. 하지만, 그것을 무기로 ‘나는 이런 일도 겪었어. 넌 절대 이해 못해.‘라고 말하지는 않는다. 내가 해석한 대로 적어보자면, ‘나는 이런 일을 겪어서 이렇게 극복했는데, 너도 이렇게 해볼래?‘라고 말하는 느낌이랄까.
우리는 일생에 걸쳐 슬프고 곤혹스러운 일들을 많이 겪는다. 그리고 그런 일들을 대처함에 있어서 기독교인들은 너무 쉽게 ‘기도하면 다 해결된다.‘라고 위로하기를 서슴지 않는다. 슬프고 곤혹스러운 일들을 대처함에 있어 기독교인과 비기독교인은 실제로 다른 점이 있나? ‘기도하면 다 해결된다.‘고 말하는 기독교인들은, 실제로 기도해서 해결을 받았나? 해결을 받았다면, 어떻게 해결을 받았을까? 그리고 그 ‘해결‘이란 도대체 무엇일까? 상황이 나아지는 것? 아니면 내 태도가 달라지는 것? 내 감정이 변하는 것? 개혁신앙의 관점에서 보자면, 슬프고 곤혹스러운 일 중에서도 믿음이 보존되기를 기도해야 한다고 말할지도 모르겠다.
뷔크너는 고통을 대처하는 일반적인 방법부터 설명한다. 고통을 그냥 잊는 것(11쪽), 아무 일도 없던 것처럼 계속 살아감으로써 그 상황을 견디는 것, 자신의 고통에 어떤 식으로든 갇히는 것(12쪽), 자신의 고통을 농담거리로 만드는 것, 고통을 경쟁거리로 만드는 것(13쪽). 그리고 마지막으로 ‘고통에 대처하는 또 다른 방식은 고통의 좋은 청지기가 되는 것입니다.‘(13쪽)라고 소개한다. ‘고통을 심지 않으시고 고통이 생기게 하지는 않으시지만, 그분은 우리가 고통 안에서 보물을 거두기를 기대하십니다.‘(15쪽)라고 달란트 비유를 해석하면서, 고통도 장사하는 일이라고 말한다. ‘자신의 일부를 다른 자아에게 내어 주고, 그 대신에 상대에게서 뭔가를 받는 일‘(16쪽), 그것은 곧 ‘자신의 고통으로 가는 문을 기꺼이 여‘는(17쪽) 일이다. ‘주인이 말했듯이 그들의 궁극적 상은 ‘주인의 기쁨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기쁨이 고통의 끝입니다. 고통의 문을 통해 우리는 기쁨으로 들어갑니다.‘(20쪽) 뷔크너는 고통의 끝에 있는 기쁨을 맛보았던 것일까? 아니면 그 기쁨은 하나님나라에서 맛볼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했을까?
나만 겪는 고통인 줄 알았던 문제에서 해방되었던 것은 대학원에서 공부하며 다른 사람의 고통을 보던 시절이었다. 뷔크너는 나와 비슷했던 것 같다. ‘그래서 어느 인생에나, 가장 운이 좋아 보이는 인생에도 고통이 있으며, 묻어버린 슬픔과 상처 입은 기억이 모두에게 있다는 것이 보이기 시작했다. ...(중략)... 나는 우리의 눈과 더불어 마음도 열어 주는 이러한 순간들이 결코 우연이 아님을 믿기로 작정했다. 나는 그것을 기이하고도 거룩한 은혜라고 불렀다.‘(31-32쪽) 개인적으로, 이러한 순간들이 ‘은혜‘라고는 불릴 수 있지만 ‘거룩한‘이란 수식어까지 붙일 일인가를 생각했다. 단어를 잘못 사용함으로 단어의 의미가 퇴색되는 경우가 너무 많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책의 제목인 ‘거룩한‘에 계속 매여 있었다. 아무튼, 이 은혜가 임함으로 고통의 청지기가 되는 문이 열리게 되는 것으로 이해했다.
그리고 ‘기억하라‘는 방에 들어가라고 한다. 기억할 수 있는 일들과 기억할 엄두가 나는 일들을 기억하는 것을 말한다. 15년 전쯤 읽었던 [참으로 소중한 나], [당신의 과거와 화해하라]라는 책도 생각났다. 지금은 내용이 잘 기억나지 않지만, 과거를 용서해야 한다고 말했던 기억이 어렴풋이 난다. 하지만 이 책에서 말하는 이 단계(?)까지 나아가지는 않았던 것 같다. ‘이것이 과거이고, 이것을 기억하기 때문에, 우리에게는 고귀하고 거룩한 소망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이미 행하신 일을 계속 행하실 거라는 소망, 하나님이 우리와 세상 안에서 시작하신 일을 우리가 상상도 못할 방식으로 완성하시고 실현하실 것이라는 소망입니다.‘(40쪽) 하지만 역시, ‘하나님‘보다는 ‘우리‘가 중심이 된다.
뷔크너는 마법왕국에서 기억의 방으로 들어간다. 죽은 사람을 소환(?)해서 그들과 상상의 대화를 하는 것이다. 뷔크너는 마법왕국에서 상상의 대화를 하는 것이 고통과 직면하는 방법이라고 생각했던 것일까? 마법왕국 이야기는 뜬구름 잡는 이야기 같았다. 사랑하는 사람을 잃어보지 않아서 공감하지 못하는 것일 수도 있다. 문학을 그저 재미로만 읽는 나는 문학적 감수성이 넘쳐나는 비크너를 담을 그릇이 되지 않아서일 수도 있다.
89쪽에 비크너를 읽으면 안 되는 사람이 나온다. 이 책을 감명깊게 읽으신 선생님이 이 부분을 보여주어서 나는 읽어도 되겠다고 생각했는데, 아래에 적힌 구절에서 멈추게 된다. ‘정통교리를 정확한 신학적 용어로 풀어 주는 책을 원하는 사람이라면 비크너를 읽어서는 안 된다.‘ 나는 비크너를 읽어서는 안 되는 사람이었다. 당황스럽게도, 슬프고 곤혹스러운 일이 닥쳤을 때에도 비크너를 읽을 것 같지는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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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라클 모닝 미라클 모닝
할 엘로드 지음, 김현수 옮김 / 한빛비즈 / 201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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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라클모닝](할 엘로드/김현수 옮김, 한빛비즈)

이 책을 언제 샀는지 모르겠다. 페이스북에서 미라클모닝에 대한 카드뉴스를 보고 시도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산 기억이 있다. 이 책 역시 앞 부분만 조금 보고 책꽂이에 고이 꽂혀 있었는데, 최근에 선생님 한 분이 이 책 이야기를 하셔서 내가 다 봤던 책인가 아닌가, 긴가 민가 하며 책을 집어들게 되었다. 어쩌자고 이번 방학에 내가 평소 거의 읽지 않는 자기계발서를 세 권씩이나 읽게 되었는지 모를 일이다. 그만큼 내 행동에 있어서 변화가 필요한 시점이라고 생각한 건지도 모르겠다. 더 이상 이렇게 게으르게 살 수 없어!(물론 내가 게으른 건 집안일 한정이다.ㅠㅠ 아마도 그럴 거다..)
제일 처음 등장하는 것은 ‘기적의 6분‘. 처음 읽을 때 내가 책에 이런 말을 써놓았다. ‘아침을 감사기도로 시작하는 나의 모습을 그려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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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ook] 정말 하고 싶은데 너무 하기 싫어 - 피할 수 없다면 즐겨요. 어떻게...?
로먼 겔페린 지음, 황금진 옮김 / 동양북스(동양문고) / 201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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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하고 싶은데 너무 하기 싫어](로먼 겔페린/황금진 옮김, 동양북스)-전자책

책 제목이 재미있다. ‘나‘를 가장 잘 표현한 말이다. 밖에서는 이리 저리 잘 움직이지만(?), 집에서는 손도 까딱하고 싶지 않을 때가 부지기수다. ‘정말 하고 싶은데 너무 하기 싫어.‘ 나는 이렇게 반문한다. ‘정말 하고 싶은 거 맞아?‘ 하고 싶으면 방법을 찾고 하기 싫으면 핑계를 찾는다고 했다. ‘하기 싫어‘가 본심이다.
1장에서는 다섯 명의 사례를 든다. 실제 사례는 아니지만 실제 나인 것 같은 모습도 몇몇 보인다. 쉽게 미루고, 쉽게 결심을 포기하고, (일시적) 중독에 빠진다. ‘조금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들이 진짜 원하는 것을 알 수 있다. 그게 무엇일까? 그들은 ‘행동하는 것’이 아니라 ‘행동함으로써 얻는 결과’를 원하고 있다.‘(31쪽) 그렇다. 나는 ‘행동함으로써 얻는 결과‘를 원한다. 운동보다는 뱃살이 빠지기를 원하고, 집안일보다는 ‘깔끔한 집‘을 원한다. ‘행동 자체에 대한 개인의 심리(감정)와 그 결과에 대한 심리(감정)가 특정한 행동을 수행할지 말지를 결정하는 동기‘(34쪽)이다. 지금 일을 하지 않으면 몸이 편안하다(이 책에서는 쾌락이라고 표현한다.). 그리고 그 일을 하려면 노력이 필요한데, 노력하는 것이 힘들다(이 책에서는 불쾌라고 표현한다.) 결과적으로는 일을 하고 나면 개운한 마음(쾌락)이 들긴 할 것이다. 이렇게 쾌락과 불쾌가 갈등을 일으키며 두 힘 중 더 센 놈이 이기게 되고, 인간의 성향상 더 센 놈이 누가 될지는 불을 보듯 뻔한 일이다. ‘인간의 동기 대부분은 부정할 수 없이 이 요인, 즉 쾌락 원칙에 따라 결정된다.‘(57쪽) 또, ‘감정뿐 아니라 신체적인 욕구 또한 중요한 동기‘(39쪽)이다. 사실 나는 신체적 욕구에는 둔감한 편(?)이라 몸이 소리를 지를 때까지 무시하는 경향이 있기는 하다. 이 책에서는 신체적 욕구도 감정과 묶어서 설명하고 있다. 여기에 한 가지 더, ‘활동을 시작하는 데 있어 필요한 행동을 하지 못하게 가로막는 진입장벽‘(42쪽)이라는 녀석도 있다. 이 세 가지가 ‘활동을 구성하는 세 가지 심리적 요소‘(43쪽)이다.
대학원에서 공부를 할 때 인지, 행동, 감정의 순서가 어떤지에 대해서 고민했었다. 어떤 이론은 인지가, 어떤 이론은 감정이, 어떤 이론은 행동이 원인이라고 하는데, 로렌스 크랩의 경우는 인지가 원인이라고 했고, 이 책에서는 감정이 원인이라고 보는 것 같다(59쪽). 아무튼 이 쾌락원칙은 매우 신선했다. 동기부여 요소가 인지라고 생각했는데, (지금도 그 생각에는 변함이 없지만) 쾌락이 원인이 된다니. 무의식적으로는 내가 쾌락원칙에 따라 행동하는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그런데 그 와중에 읽었던 [이것이 개혁신앙이다]에서 ‘... 그러면서 제멋대로 살고자 하는 감정이나 죄성을 따르지 않습니다. 이런 경건의 훈련은 내적 고통을 가져옵니다.‘(268쪽)라는 문구를 읽고 보니 쾌락원칙에 따라 행동하는 것이 ‘제멋대로 살고자 하는 감정‘을 따르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내적 고통(이 책의 용어로는 불쾌)을 겪지 않으려고 선을 행하지 않는 내 모습을 보면 진심으로 회심했는지 의문이 안 생길 수 없다. ‘지상에서 경험하는 내적 고통은 지옥에서의 영원한 고통과 바꿀 수 없기 때문에 극복할 수 있습니다.‘([이것이 개혁신앙이다], 268쪽)
그리고 한 가지, 내가 기억해야 할 문단이 있었다.

주의력을 동기부여 수단으로 사용할 때 반드시 알아야 할 점은 우리는 주어진 주의력을 전부 소진하려는 욕구가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주의력을 전부 활용하지 못하면 불쾌감을 느끼며, 활용하지 못하고 남아도는 주의력을 어떻게든 쓰려고 한다.(71쪽)

주의력을 전부 활용하지 못하면 불쾌감을 느낀다는 것을 새롭게 알게 되었다. 일에 쉽게 집중하지 못하는 까닭은 주의력 때문일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다. 다행히 이 주의력은 어느 정도 제어할 수 있는데, 주의력을 제어할 수 있는 능력을 정신력이라고 한다. 정신력은 무의식적 쾌락을 이겨내지 못할 때가 많다.(73쪽) 이 책에서는 정신력을 기르는 것보다 무의식적 쾌락의 심층적 기능에 호소함으로써(78쪽) 행동을 제어하라고 말한다. 이후 쾌락의 정도와 주의력으로 무의식적 쾌락을 제어하는 전략을 세우는 데 뒷 지면을 할애한다.
6장에서는 ‘몸이 알아서 움직이게 만드는 16가지 전략‘이라는 소제목으로 쭉 나열되어 있는데, 나에게 도움이 되었던 것은 연상하기([미라클모닝]에도 나오는 방법이다.), 동시에 하면 더 잘할 수 있는 것, 무엇을 한다는 상상, 더 재미있는 일은 일부러 피하기 정도였다. 나머지는 이미 하고 있는 것들이었다. 네 가지라도 건진 것에 감사한다.
7장에서는 1장에서 나온 등장인물을 다시 등장시키며 그 인물들이 어떤 전략으로 무의식적 쾌락을 제어할지 설명하고 있는데, 이 부분은 솔직히 별로 도움이 되지 않았다.

동기부여를 무의식적 쾌락 법칙에 근거해서 풀어나간 점에서 굉장히 흥미로웠고(그것은 아마 내가 사람의 심리에 관심이 많아서 그럴 것이다...), 적용해봐야 할 것들도 있었다. 내가 어떤 일을 미루려고 할 때 쾌락과 불쾌를 찾아봄으로써 좀더 부지런해질 수 있지 않을까. 다음 문장을 끝으로 서평을 마무리한다.

우리 삶 속에 늘 존재하는 이런 무의식적 체계는 언제나 만족을 좇는다.(8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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