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Book] 바보 온달 힘찬문고 34
이아무개 (이현주) 지음, 김호민 그림 / 우리교육 / 2020년 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바보 온달](이현주, 우리교육)

이번달 성서교육회 독서모임 책이다. 어릴 적 읽었던 [바보 온달]을 떠올리며 읽었다. 양념(?)처럼 들어가 있는 앞 얘기, 뒷 얘기(어린 영혼과 꼬마 별 이야기)와 고승 장군이 [바보 온달]을 생각하게 하는 동화가 되게 했다.-지극히 개인적인 생각이다.
고승 장군이 어린 시절 온달을 만나 제일 처음 했던 말은˝창피한 일이다. 창피한 일이야......˝(41쪽)였다. 토끼 사냥을 했는데 화살이 빗맞아 고개를 두 개나 넘어야 했던 일을 창피하다고 생각했다. 이후에 고승 장군이 다시 온달을 만났을 때, 온달이 자신 앞에서 조아리지 않는다는 이유로 매질을 했고, 온달은 매질을 견뎌내고 일어섰다. ‘이 천하의 고승 장군이 그토록 많은 사람들 앞에서 창피를 당한 적은 일찍이 한 번도 없었다. ˝창피한 일이다, 창피한 일이야. 이놈 온달, 두고 보자!˝‘(58쪽) 평강공주는 온달의 집으로 찾아갔고, 고승 장군도 복수를 위해 온달을 찾았다. 곰과 싸우다 상처를 입은 고승 장군이 공주의 마음을 돌리지도 못하고, 온달에게 복수도 하지 못하고, ‘엉금엉금 기다시피 하여 산을 내려‘(108쪽)오며 ‘수없이 중얼거‘(108쪽)린 말도 ˝창피한 일이다. 으음, 창피한 일이야......˝(108쪽)였다. ‘창피함‘이라는 감정은 혼자 있을 때는 느낄 수 없는 감정이다. 고승 장군은 평생을(?) 창피하지 않기 위해 살았다. 다른 사람에게서 인정받아야 자신이 가치 있는 사람이 되는 것인 양 생각했던 거 같다. 수치심을 견디지 못했다. 고승 장군을 움직이는 힘은 수치심과 인정이었던 거 같다. 행동의 동기가 외부에 있었으므로, 책임도 외부로 돌렸다. 수치심에 못 이겨 애꿎은 말 궁둥이를 채찍으로 때리고, 온달을 원망했다. 감정이 그를 집어삼켰다.
고승 장군에게서 나를 보았다. ‘목사님 딸‘, ‘선생님‘, ‘엄마‘라는 이름 속에 살았다. ‘나‘로 사는 순간을 흘려보냈다. 고승도, ‘사냥꾼‘, ‘장군‘의 이름으로서만 자신이 받아들여진다고 생각했던 건 아닐까? ‘사냥꾼‘, ‘장군‘으로서는 창피한 일이었겠지만, ‘고승‘으로서는 창피한 일이 아닐 수도 있었다. 혹은, 창피한 일에서 쉽게 벗어날 수 있었을 거다.
평강공주는 온달을 고승 장군처럼 만들려고 했다. 온달이 장군이 되었을 때는, 별에게 돌멩이를 던진 자신을 ‘창피하게‘ 여겼다. 고승 장군이 창피하게 여겼던 것을 온달도 창피하게 여기게 되었다. ‘이제 온달이 두려워하는 것은 공주를 비롯한 모든 살아 있는 사람들의 눈동자뿐이었다.‘(149쪽) 그리고 그 ‘창피함‘ 때문에, 온달은 죽음에 이른다.
무엇을 창피하게 생각해야 할까? 하나님을 믿는 자가 두려워해야 할 것은 다른 사람의 눈이 아니라 하나님의 눈이어야 하지 않을까? 하루에도 수천 번씩, 하나님 앞에서 죄를 짓는 자신을 창피하게 생각하는 게 마땅하다. 허울뿐인 이름이 창피한 일을 겪는 것에 집착하면, 진짜 창피해야 하는 일이 눈에 보이지 않는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피가 당신의 몸 안에 흐르고 있지만 당신이 만들어낸 것은 아니듯이, 창조성도 당신의 정신 속에 존재하지만 당신이 만들어야 하는 것은 아니다.
- P24

우리의 삶이 예술작품이 될 수 있는 것은 우리가 창조적인 존재이기 때문이 아닐까?
- P29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eBook] 나미야 잡화점의 기적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양윤옥 옮김 / 현대문학 / 2020년 1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나미야 잡화점의 기적](히가시노 게이고/양윤옥 옮김, 현대문학)
-feat. 스포일러, 긴글 주의

새해 처음 읽은 책이다(역시 시작은 소설부터. 작년 첫 책도 [끝없는 이야기]였다.). 작년이었나, 이대윤선생님이 읽은 걸 봤다. 주변의 책 좋아하시는 분들이 선택한 책은 읽어봐야겠다는 생각이 있다.
이 책은 일본 특유의 감성이 묻어난다. 또, ‘지금 만나러 갑니다‘와 ‘말할 수 없는 비밀‘이랑 비슷하다. 현재와 과거가 연결되는 지점이 있다는 점에서 그렇다. 이 책에서는 그 지점이 나미야 잡화점이다. 이런 소재가 흔해서인지 예상하기 쉬운 책이기도 했다. 단, 결말은 개연성이 조금 떨어진다고 생각했다. 총 5장으로 이루어져 있고, 3장이 나미야 잡화점의 원래 주인 이야기이다. 3장을 중심으로 1, 2장과 4, 5장이 연결된다(고 생각한다.).
폐가나 다름 없는 나미야 잡화점으로 세 명의 좀도둑이 모여든다. 마음 약한 고헤이, 적극적이지만 정은 없는 아쓰야, 호기심이 많아 이것 저것 발견을 잘하는 쇼타가 그 도둑들이다. 그 도둑들에게 고민이 뚝 떨어진다. 과거의 고민이다. 말도 안 되는 상황에서 답장을 써주자고 먼저 이야기하는 것은 소심한 고헤이다. 내가 그 상황이었으면 어떻게 행동했을까? 나는 아마도 고헤이와 쇼타의 중간 그 어디쯤이었을 거 같다. 이상하다고 생각은 하겠지만 답장은 써주자고 하지 않았을까?
좀도둑이 받는 고민은 네 가지. 꿈과 현실 사이의 고민이다. 제일 처음 나오는 고민이 올림픽 선수가 되기 위해 훈련에 참가할까, 암에 걸린 남자친구 옆자리를 지킬까 갈등하는 사람의 고민이다. 상담 내용은 이상하기 짝이 없었지만, 이 사람은 훈련에 참가하는 것을 선택했다. 뒤에 나오는 상담 신청자(?)들도, 하나같이 꿈을 선택했다. 상담 내용이야 어떻든, 상담 신청자들은 자기 식대로 해석했다.

˝대부분의 경우, 상담자는 이미 답을 알아. 다만 상담을 통해 그 답이 옳다는 것을 확인하고 싶은 거야.˝(169쪽)

(상담학에서 상담을 하는 사람이 상담자, 상담을 받는 사람을 내담자라고 하기는 하지만-그리고 여기서 상담자는 내담자임이 틀림없다.- 넘어가기로 한다.) 인간주의 상담학의 관점이다. 상담자가 한 말에 내담자가 영향을 받기도 하겠지만, 결국 선택은 내담자의 영역 아닐까? 내담자가 선택하는 행동까지 상담자가 책임을 져야 할까? 아니, 책임지려고 해도 이미 발생한 일은 책임질 수 없다. 그리고 그 부담감 때문에 다카유키의 아버지는 나미야 잡화점을 접었다.

˝나로서는 매번 열심히 머리를 짜서 답장을 써왔다고 생각한다. 대충 써 보낸 적은 한 번도 없다고 단언할 수 있어. 하지만 과연 그 답장이 상담자들에게 도움이 되었는지는 전혀 모르고 있어. 어쩌면 내 충고대로 했다가 어처구니없이 불행해진 경우가 있을 게야. 그것을 깨달은 순간, 나는 참말로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더라.˝(194쪽)

상담자의 마음이 다 이와 같지 않을까 싶다. 교사의 마음도. 교사의 말 한 마디로 아이의 인생이 달라질 수 있다는 것을 잘 잊는 것 같다.
과거의 내가 고민 상담을 했다면 언제 했을까? 대학교 진학할 무렵에? 임용 시험을 칠 무렵에? 아빠가 이전 교회를 떠나야 했을 때? 지금의 나는 그때의 나에게 뭐라고 답할 수 있을까? 미래를 알고 있다면 선택이 달라졌을까? 과거의 나에게, 경제력을 생각하지 말고 하고 싶은 것을 하라고 말할 수 있을까?
사실 나는, 꿈과 현실 사이에서 현실과 타협했다. 지금까지도 자기 확신이 없는 사람이니 어쩌면 당연할 테지만, 한 번쯤은 꿈을 선택했다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나는, 현실을 꿈으로 만들며 스스로를 속였다. 그래서 그토록 자기 기만을 싫어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비디오 영상 속의 비틀스는 고스케의 기억과는 조금 달랐다. 옛날에 영화관에서 봤을 때는 그들의 마음이 뿔뿔이 흩어져 있고 연주도 서로 어우러지지 않는 것처럼 느꼈었다. 하지만 지금 이렇게 바라보니 그때와는 전혀 느낌이 달랐다.(329-330쪽)

과거의 상처는 내가 만들어낸 것인지도 모른다. 만약 과거로 돌아가서 객관적으로 상황을 바라볼 수 있다면, 아마 다르게 생각할 수도 있을 거 같다. 아무래도 주연과 관객의 차이는 꽤 크니까. 고스케는 비디오 영상이라는 (객관적) 과거를 마주했고, 나는 왜곡된 기억의 편린을 마주한다. 꿈과 현실 중 꿈으로 위장한 현실과 타협했다는 것도, 왜곡된 기억일 수 있다.
과거의 나와 현재의 나 사이에서, 앞으로 하게 될 수많은 선택의 상황에서, 아무것도 하지 않기로 선택하는 것은, 세상의 풍파에 흐르는 대로 맡기겠다는 의미다. 사는 대로 생각하는 것이 싫은 이유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행복한 글쓰기 - 뉴베리상 수상 작가가 들려주는 글쓰기 비법 30가지
카슨 레빈 지음, 김연수 옮김, 백지원 그림 / 주니어김영사 / 2008년 2월
평점 :
절판


[행복한 글쓰기](게일 카슨 레빈/김연수 옮김, 김영사)

아마도 권일한선생님 책 목록에서 본 거 같다. 몇 달 전에 ‘교원역량강화도서‘를 구입한다고 해서 신청한 책이다. (권일한선생님 책 소개를 제대로 안 읽었나?) 읽고 보니 초등 고학년에게 적합한 책이었다. 하지만 소장 가치가 있는 책이다. 상상의 나래를 펼쳐 글을 쓰고 싶은 사람에게, 이 책은 꼭 소장하라고 말하고 싶다. 그리고, 번역도 잘 옮겼다고 생각한다.
글쓴이의 입담도 뛰어났지만(‘초록곰팡이악어눈깔국‘(184쪽)이 제일 웃겼다. 약간의 욕에는 카타르시스를 느꼈고. ˝그러니 입 닥쳐, 이 시끄러운 놈아!˝(24쪽)), 30가지 글쓰기 기술들이 다 좋았다. 중간 중간 ‘글쓰는 시간‘이라는 코너도 좋았다. 거기 나오는 예시들을 어떻게 다 생각해낼 수 있을까? 작가의 머릿속은 정말 기상천외하다.
제일 통쾌한 부분은 자기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을 다른 사람이 알아보지 못하는 캐릭터로 만들라는 내용이었다. 내가 지독한 우울감에 빠져 있던 시절에 일기로 감정을 드러내지 말고 캐릭터로 만들어버릴걸, 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그랬으면 ‘그 사람‘에 대한 감정이 좀 날아가지 않았을까? 혼자서 킬킬거리면서.

‘이 세상에 완벽한 책이나 완벽한 이야기 같은 건 없다!‘(116쪽)

여러분을 살찌우는 글을 쓰세요.
여러분이 누구인지 말하는 글을 쓰세요.
우리가 인간이라는 사실을 말해 주는 글을 쓰세요.
세상에는 아직도 쓸 이야기가 정말로 많답니다.
그 이야기를 써 주세요.
즐글! 모든 글은 꼭 저장하세요.(219쪽)

글쓰기에 용기를 주는 책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eBook] 쓰기의 감각
앤 라모트 지음, 최재경 옮김 / 웅진지식하우스 / 2018년 10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쓰기의 감각](앤 라모트/최재경 옮김, 웅진 지식하우스)

작년 초에 읽다가 다시 이어 읽은 책이다. 앞 내용이 기억이 날 듯 말 듯 했다. 밑줄 그은 부분을 중심으로 다시 읽으면서 서평을 쓴다.
이 책을 권일한선생님 책 목록에서 봤는지, 최현아작가님 추천 도서 목록에서 봤는지 기억이 안 난다. 어쩌다 구입했더라? 책을 한 권 쓰고 보니, 글쓰기를 더 잘하고 싶은 마음이 생겨난 걸까. 올해는 어찌 된 일인지 글쓰기에 대한 책을 계속 읽고 있다.
이 책은 글쓴이가 수업하는 형태로 서술되고 있다. 글쓰기의 기술도 적혀 있지만, 기술이 다가 아니다. 글쓴이의 삶, 존재 의미가 글 속에 녹아 있다. 권일한선생님이 왜 추천하셨는지 알 것도 같다. 다만, 한 가지 주제 안에 여러가지 비유적인 글과 글쓴이의 삶이 적혀 있어서, 개인적으로는 읽는 데 집중이 잘 되지 않았다. 어떻게 연결되고 있는 건지 이해가 잘 되지 않았다. 이 책이 오랫동안 안 읽혔던 이유인 듯하다.
최현아작가님이 인용한 구절은 ‘글을 잘 쓰기 위해서는 당신만의 브로콜리가 필요하다.‘(184쪽)이다. 그 브로콜리가 뭔가 했더니 ‘당신의 브로콜리가 하는 말을 들어보라.‘(189쪽)는 거였다. 이유인즉, ‘아마도 브로콜리는 올바른 방향을 알고 있을지도 모른다(189쪽)‘나. 나만의 브로콜리는 무엇일까? 내 할 말이 너무 많아서(속에 담고 있는 말이 많아서) 브로콜리의 말 따위는 들을 생각 안 하고 있는 건 아닐까? 브로콜리가 아는 올바른 방향에는 관심 두지도 않고.

˝왜 우리가 그런 문들을 모조리 다 열어야 하죠? 왜 꼭 우리 자신의 목소리로만 진실을 말해야 하는 거죠?˝
그러면 나는 잠시 동안 그들을 응시한다.
˝그게 우리 본성이기 때문이라고 생각하니까요.˝(297쪽)

브로콜리의 말은 본성의 목소리를 의미하는 것일까? ‘당신의 분노와 피해와 슬픔이 바로 진실에 이르는 길이다.‘(300쪽) 본성은 분노와 피해와 슬픔에서 드러남을 이렇게 표현한 거 같다. 그 ‘진실에 이르는 길‘ 때문에 ‘기독교 신자에서 시인으로 개종‘(340쪽)하는 사람이 생기는 거 같기도 하다. ‘그는 거기서 더 큰 영혼의 안식을 얻었다.‘(340쪽) 기독교가 하나의 종교인 이상, 영혼의 안식을 다른 곳에서 얻는 것은 불가피하다.

˝그렇다면 도대체 우리는 왜 글을 써야 하는 거죠?˝
나의 대답은 이것이다. 바로 영혼 때문이라고. 마음 때문이라고도 할 수 있다.(346쪽)

렉티오 디비나를 안 좋게 생각한 적도 있었는데, 이렇게 읽고 보니 렉티오 디비나와 글쓰기는 연결되어 있는 거 같다는 생각도 든다. 하나님이 보실 때, 무엇이 옳고 그른 것인지 잘 모르겠다. 분별해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내가 분별하려는 것이 분별의 대상인 건지도 헷갈린다.

글을 잘 쓰시는 분들의 공통점을 생각한 적이 있다. 자연을 사랑하고 관심이 많다. 자연을 벗하면서 살아서인지, (내게 없는) 특유의 감성이 있다. 나는, 도시의 삭막함 속에서, 엄격한 부모님 밑에서 자라면서 현실을 살지 못한 거 같다. 늘 무언가에 쫓기듯 살았던 거 같다. 후에 시골에 살게 되었을 때는, 이미 도시의 메마름에 길들여진 이후였다. ‘나는 이것이 우리가 세상에 존재하는 방식이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현실을 살 것, 그리고 감탄할 것.‘(169쪽)이라는 글을 다시 읽을 때, ‘도시에서 살면서 현실을 살 수 있나? 감탄할 수 있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어릴 때의 추억이라고는 인위적으로 만든 물질문명뿐이니, 메마른 감정은 어쩌면 당연한 걸까. 도시인에게도 감성이 존재하기는 하는 걸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