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Book] 팡세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83
블레즈 파스칼 지음, 이환 옮김 / 민음사 / 201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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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팡세](블레즈 파스칼/이환 옮김, 민음사)
-feat. 다북다복 2nd

📚파스칼
파스칼은 39세의 나이로 작고하면서 많은 저서를 남겼다. 개인적으로 파스칼, 하면 기압 단위 ‘헥토파스칼‘이 생각난다. 수학자로서의 명성도 알고(?) 있다. 일찍 죽지 않았다면 모르긴 해도 업적이 어마어마했을 거다.

📚팡세
제목만 알고 처음 읽었다. 팡세가 이런 내용인 줄도 몰랐다. 팡세는 1부와 2부로 나눠져 있는데, 1부는 신을 믿게 되는 과정을 증명한다는 생각이 들었고, 2부는 거의 수기로 기록되며 부록 같은 느낌이 들었다. 1부 읽으면서 루이스가 생각났는데, 개인적으로는 루이스보다 더 설득력 있다고 생각했다. 2부 5편에도 루이스의 [기적]이 생각나는 부분이 있었다.
1부는 인간 이성으로 신을 어떻게 믿게 되는지 설명하는데, 인간 이성으로는 초월적 존재를 알 수 없으나, 이성의 한계를 아는 이성의 역할이 중요하다고 보고 있다. 이성이 아니라 심정으로 하나님을 느낄 수 있으며, 의지(습관)를 굴복시킴으로써 믿음을 공고하게 한다(고 나는 정리했다.).
2부는 수기들이 기록되어 있는데, 은총, 기적, 예수회와의 논쟁(장세니스트 옹호)에 대한 개인적 경험이 수록되어 있다.
제일 흥미로운 부분은 예수회와의 논쟁이었다. 이것이 이단을 대하는 교회의 자세가 되어야 하지 않나, 하는 생각을 해서였던 것 같다. 얀센이 [아우구스티누스]라는 책을 썼고, 예수회는 그 책에서 5개 명제를 뽑아내어 이단으로 규정한다. 그걸 신학교수 아르노가 반격하면서 파스칼이 이들을 옹호하는 것이 ‘프로뱅시알‘(2부 4편)이다.

835-[949] 국가에 있어서 평화는 백성들의 재산을 안전하게 보존하는 것을 유일한 목적으로 삼는 것같이, 교회의 평화는 교회의 재산인 진리와 교회의 마음이 깃들어 있는 보배로운 것을 보호하는 것을 유일한 목적으로 삼는다. 한 국가 안에 적이 침범하여 약탈하는 것을 보고도 평안을 어지럽힐까 두려워 이에 대항하지 않는다면 도리어 평화를 거역하는 일이 되는 것같이(평화란 오로지 재산의 안전을 위해 정당하고 유익한 것이므로 일단 평화가 재산의 상실을 방임할 때는 부당하고 유해한 것이 되며, 오히려 이것을 지킬 수 있는 전쟁이 정당하고 필요한 것이 되기 때문이다), 교회에 있어서도 진리가 원수에 의해 공격당하고 신도들의 마음에서 진리를 앗아가 오류가 그들의 마음을 지배하게 한다면, 이때 평화 속에 머물러 있는 것은 과연 교회에 봉사하는 일인가, 교회를 배반하는 일인가? 교회를 지키는 일인가, 파멸시키는 일인가? 진리가 다스리는 평화를 어지럽히는 것이 죄라면, 진리가 파괴될 때 평화 속에 머물러 있는 것도 죄라는 것은 명백하지 않은가? 그렇다면 평화가 정당한 때가 있고, 평화가 부당한 때가 있다. 그렇기에 ‘평화의 때가 있고 전쟁의 때가 있다’고 적혀 있으며, 이것을 판가름하는 기준은 바로 진리의 이익이다. 결코 진리의 때와 오류의 때가 있는 것이 아니다. 도리어 ‘하느님의 진리는 영원하리라’고 적혀 있다. 그렇기에 예수 그리스도는 평화를 가지고 왔다고 말하면서 한편 전쟁을 가지고 왔다고 말한다. 결코 진리와 허위를 가지고 왔다고 말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진리는 사물의 제일 원리이고 궁극의 목표이다.

하나님을 믿기 위해 이 책이 추천하지 않겠다는 분도 있었지만, 나는 나 같은 성향이라면 추천해도 괜찮겠다고 생각했다.

겨우겨우 읽었다. 재독하지 않을 것 같지만, 재독을 하면서 숲을 보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혼자 읽었으면 절대 끝까지 못 읽었을 거다.

📚내가 픽한 문장
225-(278) 신을 느끼는 것은 심정이지 이성이 아니다. 이것이 곧 신앙이다. 이성이 아니라 심정에 느껴지는 하느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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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비즈니스 - 11가지 비즈니스 행위에 관한 성경적 원리
웨인 그루뎀 지음, 배응준 옮김 / 도서출판CUP(씨유피) / 201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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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비지니스](웨인 그루뎀/배응준 옮김, CUP)

📊마인드맵 이야기
인스타그램에서 ‘마인드맵 B코스‘를 신청했다. 마인드맵이야 초등 현장에서도 많이 사용을 하는데, 마인드맵을 독서에 어떻게 잘 활용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 신청을 했다. 블로그 이웃 중에도 책 내용을 마인드맵으로 정리하시는 분을 봤는데, 관심 있는 책 분야가 아니어서 그런지 모호하게 다가왔다. 이번 기회에 내가 직접 책 내용을 마인드맵으로 정리하면 가닥이 잡힐 것 같았다.
이번 기회에 xmind라는 프로그램을 처음 접했다. 모든 프로그램이 그렇듯, 배우는 시간이 필요했다. 책 정리할 때 이것 저것 사용해보았다. 그러느라 이 얇은 책을 두 번 정도 읽었다. 중반쯤까지 만들다보니, 처음 만들 때 구조화한 대로 흘러가지 않아서 첫부분을 다시 만든 탓이다.
손글씨로 만들 수도 있겠지만, 시간도 더 많이 걸릴 뿐 아니라 구조화한 대로 흘러가지 않았을 때 수정하기가 까다로울 것 같아서, 마인드맵에 익숙하거나 핵심만 적지 않는 이상 프로그램이 나을 것 같다.
마인드맵 초급, 중급 나누어서 운영해도 좋을 것 같고, xmind 활용방법 설명 시간도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책 이야기
(흠.. 이 책을 추천하신 목사님이 이 글을 안 보셔야 할 텐데.) 이 책의 기본 전제는 비지니스 기본요소들(1~9파트 소제목)이 선하다는 것이다. 대부분 사람(기독교인)들은 비지니스 요소가 중립적이라고 여기는데, 이분은 비지니스 요소가 선한데 그것으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기도 하고, 죄에 빠지게 하기도 한다고 말한다. 그러니, 이 요소들을 가지고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방법대로 살아가자는 내용이다. 이 부분에서 우리의 ‘행동‘으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할 수 있다고 받아들일 위험이 있는 것 같아서(우리의 행동에 중심이 치우침) 이게 과연 옳은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기독교인들은 선악을 선택할 기회가 있고, 비기독교인은 그렇지 않다고 보는 것인지 그 부분도 궁금했다. 저자가 말하는 대로라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선한 일은 비기독교인은 할 수 없는 일이라는 생각에서다. 또, 책에 보면 인간에게 주신 욕구가 선하다고 하는데, 개인적으로는 인간이 타락할 때 지정의가 다 타락했다면 욕구도 타락했다는 생각이 들어서 욕구가 선하다는 저자의 생각에 동의할 수 없었다. 전제(비지니스 기본요소가 선하다) 자체가 옳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고, 따라서 설명하는 내용도 옳을 수 없겠다는 생각이 들어 책을 읽는 내내 불편했다. 게다가 성경구절을 인용하면서 자신의 주장이 옳다는 것을 증명하려고 하는데, 자신의 주장을 합리화시키기 위해 문맥을 생각하지 않고 성경구절을 쓰는 것 같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저자가 ‘부흥과개혁사‘, ‘CH북스‘, ‘CLC‘에서 책들을 안 냈다면 저자를 매우 안 좋게 생각했을 거다.
이 책은 전반적으로 자본주의를 찬양하고(?) 공산주의를 배척하는 늬앙스로 쓰였다. 그리고 국가가 기업을 규제하는 것을 옳지 않다고 보는 시각이다. 그러나 기업이 항상 옳은 일만 하지 않고 있는데(개인적으로 요즘 같은 때는 국가도 하나의 기업 같다는 생각이 든다.) 기업을 무작정 옹호할 수 없고, 물건을 많이 만들어내는 것이 옳은 것 같지는 않아서(물건을 많이 생산하여 자연을 정복하는 것이 자연을 파괴하는 행위와 맞닿아 있으니 말이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저자가 어떻게 생각하는지도 궁금하다. 노력의 부분에서도 할 말이 많은데, 이 부분은 [공정하다는 착각]과 대치되고 있어서 전문가의 의견을 듣고 보완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돈의 흐름도 마찬가지고, 여러모로 각 분야의 전문가들과 교류없이 책을 쓰신 것 같아 아쉬운 마음이 들었다.
자세한 내용은 마인드맵을 참고하면 좋겠다.

📊마인드맵 B코스 후기
오랜만에 공책 정리하는 것 같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다른 분들이 한 것과 비교해 보면서 결국 제가 잘하고, 좋아하는 형식대로 만들어나가는 것이겠다는 생각이 들었고요. 마인드맵을 다양한 방식으로 그려나가고 싶었는데, 다양한 방식보다는 잘하는 것을 계속 활용하면서 발전시켜야겠다고 생각이 정리되었습니다.

독서에 마인드맵을 어떻게 잘 활용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으로 신청했는데, 약간 감이 오는 것 같습니다. 내친 김에 구조화되지 않은 글이나 소설도 해보고 싶고요.-인물의 특성을 파악하는 데 도움이 될 것 같아요. [신앙감정론] 같은 벽돌책도 마인드맵으로 정리하면 더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친절하신 1:1 설명으로 제가 만든 마인드맵에서 어떤 점을 보완해야 할지 알 수 있어서 좋았습니다.

좋은 기회와 귀한 장을 열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모두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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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뱅은 정말 제네바의 학살자인가? - 칼뱅이 제네바의 독재자이자 학살자였다는 주장에 대한 반박 팩트 체크 시리즈 1
정요한 지음 / 세움북스 / 201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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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뱅은 정말 제네바의 학살자인가?](정요한, 세움북스)

윤석전 목사님의 [견고한 확신]을 선주문하고 증정받은 책이다. 2박 3일 여행하면서 틈틈이 읽었다.

칼뱅이 제네바의 학살자라는 풍문조차 처음 들은 1인이 여기 있다. 우리 신랑은 도대체 이런 내용을 어떻게 알고 있는지 궁금한데, 내가 그만큼 교리에도, 교회사에도 관심이 없어 찾아볼 생각을 하지 않았으니 몰랐던 거겠다. 이제라도 공부해야겠다.

칼뱅에 대해 거짓 소문을 퍼트린 사람들이 있었다. 갈리페, 오당, 필립 샤프, 그리고 칼뱅에 대한 내용을 소설로 쓴 츠바이크까지. 이 사람들의 자료(책)만 가지고 칼뱅을 학살자로 볼 수 없다는 것이 이 책의 요지다. 이 사람들의 글은 2차, 3차 사료이며(심지어 츠바이크의 글은 사료 가치가 없는 소설이다.), 그 자료들로 칼뱅을 판단하느니 칼뱅 시대의 1차 사료들을 확인하고 객관적으로 판단해보자는 거다.

칼뱅은 제네바의 난민(심지어 한 번 쫓겨남)이었으며, 제네바 교회는 칼뱅에게 조언은 들었을지언정 칼뱅이 판결할 수 있는 권력은 주지 않았다. 칼뱅이 제네바에 있을 때 제네바 교회는 칼뱅의 반대파들이 득세했고, 그마저도 제일 강력한 권징은 수찬 정지였다.-오늘날 교회에도 제일 강력한 권징이 수찬 정지와 출교라고 한다. 안 지켜져서 그렇지. 심지어 출교는 시의회의 권한이었고, 그 권한을 제네바 교회에서 가져오기 위해 계속 노력했다고 한다. 이런 상황에서 칼뱅이 무엇을 할 수 있었겠는가?

칼뱅이 제네바의 학살자라는 오명을 가지게 된 건 세르베투스가 화형당한 게 한몫 한 것 같다. 그러나 그마저도 칼뱅의 권한으로 된 건 아니었다. 화형 과정에서 시 의회의 칼뱅 반대파 의원들이 사퇴를 하다보니 칼뱅의 영향력이 큰 것처럼 보였던 것 같다.

가짜뉴스가 (기독교 내에도) 너무 많다. 가짜뉴스를 퍼나르는 사람들의 말을 그대로 믿지 말고, 분별하는 지혜가 필요하다. 분별할 지혜가 없으면, 원서를 직접 찾아보는 수고로움을 하는 게 옳은 것 같고, 그럴 능력이 없으면 말을 아끼거나 출처를 분명히 해야 할 듯하다.

개인적으로, ‘함께 읽을 만한 책들‘에 소개된 [칼뱅과 공동선]을 읽어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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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나 지금이나 종교적인 개혁은 도덕적 개혁과 떼어 놓고 생각할 수 없습니다. 칼뱅은 종교의 개혁이 성공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도덕의 개혁이 함께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교회의 예배, 공적 생활, 일상의 삶이 개혁되려면 그 바탕에 도덕의 개혁이 반드시 있어야 했습니다. 칼뱅과 그의 동료들은 일생 동안 이를 위해 싸웠습니다. - P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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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ook] 칼의 노래 문학동네 한국문학 전집 14
김훈 지음 / 문학동네 / 201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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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의 노래](김훈, 문학동네)
-feat. 책가방 8기 마지막 책

📚소감
백의종군 이후부터 노량해전에서의 죽음까지, 이순신의 입장에서 쓴 소설이다. 술술 넘어가는 책은 아니었다. 어느 부분은 술술 넘어가는데, 어느 부분은 넘어가는 게 힘들었다. 내 상황이 책 읽기 여의치 않아서 그럴 수도 있다.
이 책을 읽고 선조의 정치질(!)과 일본군이 총알받이로 쓰는 조선 백성을 생각하게 됐다. 임금의 칼이 왜 이순신을 향하게 됐는지 상상해볼 수 있었고, 일본군의 맨 앞에 도열해야만 했던 조선 백성의 상황이 처참하게 느껴졌다. 전쟁의 참상을 조금이나마 알게 되었다고 해야 할까.

이순신이 처한 상황과 지금 교사들이 처한 상황이 다르지 않다는 생각도 했다. 벼랑 끝까지 내몰리는 교사와, 임금의 칼도, 적의 칼도 자기를 향하고 있으니 결국은 전쟁에서 죽는 것이 자연사가 되는 이순신의 입장이 비슷하게 느껴졌다. 이순신이 전쟁을 대하는 태도가 왠지 굉장히 무기력하게 느껴졌다. ‘견딜 수 없는 것들을 견디는 날들이 계속되었다.‘ 그러면서도 최선을 다하며 나아갈 길을 향해 나아간다. 때로는 최선을 다할 힘이 없을 때도 있다. ‘새로운 싸움(학년)을 시작할 때마다 그 싸움(학년)이 나에게는 모두 첫 번째 싸움(학년)이었다.‘
무기력하지만 나아갈 길로 갈 수밖에 없다는 사실도, 이순신이 교사와 닮았다는 생각으로 이끌었다. ‘이 끝없는 전쟁은 결국 무의미한 장난이며, 이 세계도 마침내 무의미한 곳인가.‘ 무기력은 무의미와 연결된다. 무의미는 죽음과 연결된다. ‘죽여야 할 것들을 다 죽여서, 세상이 스스로 세상일 수 있게 된 연후에 나는 나 자신의 한없는 무기력 속에서 죽고 싶었다.‘

📚왜 ‘칼의 노래‘일까?
이 부분이 생각을 많이 하게 된 지점이다. 첫 파트 이름이 ‘칼의 울음‘, 마지막 파트 이름이 ‘들리지 않는 사랑 노래‘다. 첫 파트의 처음 낱말과 마지막 파트의 마지막 낱말을 합하면 이 책의 제목 ‘칼의 노래‘가 된다. 결국 칼의 울음과 들리지 않는 사랑 노래는 같은 말일까, 작가가 인클루지오를 염두에 두었나 생각했는데, 역시나 잘 모르겠다.
그러나 사실 책에서는 책 제목을 ‘칼의 울음‘으로 하는 게 더 낫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칼이 운다는 표현이 많이 나온다. 임금도 울고, 장졸도 울고, 백성도 울고, 칼도 울고. 그럼에도 ‘노래‘라고 쓰고 있다. 왜일까?
마지막 파트의 ‘들리지 않는 사랑 노래‘도 사실은 이렇게 제목을 붙인 이유를 모르겠다. 다만, 죽기 직전에 면의 젖냄새, 함경도의 새벽안개 냄새, 여진의 몸냄새를 떠올리는 것으로 보아, 이 냄새들이 노래와 연관이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충무공이 사랑했던 것은 이 냄새들이 아닐까(이렇게 보면 여진과의 관계를 소설 속에 넣어야 했던 이유가 어렴풋하게나마 설명되는 것 같다.). 죽어가는 와중에 생각나는 이 냄새들이, 충무공 자신이 사랑한 노래였던 건 아닐까. 그렇다면 이 ‘칼‘은 결국 충무공을 나타내는 것이라는 생각이다. 자신과 칼을 일치시켰다. 죽어가니 더 이상은 사랑 노래가 들리지 않는다.
울음이 노래로 끝날 수 있는 것은, 이회영에게서 답을 찾았다.
서른 살 청년 이회영이 물었다.
˝한 번의 젊은 나이를 어찌할 것인가˝
눈을 감는 순간 예순여섯 노인 이회영이 답했다.
예순여섯의 ‘일생‘으로 답했다.
-[역사의 쓸모](최태성, 다산초당)

📚픽한 문장
‘헛것은 칼을 받지 않는다. 헛것은 베어지지 않는다.‘
우리가 문제라고 보는 것들이 사실은 ‘헛것‘이 아닌지 생각해보면 좋겠다. 그 문제가 ‘헛것‘이라면, 해결할 수 없는 것이다. 해결하지 않아도 되는 것인지도 모른다. 실체가 없기 때문이다. ‘목숨을 벨 수는 있지만 죽음을 벨 수는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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