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권으로 꿰뚫는 시편'책에서 각주로 달았던 책이었는데 무슨 이유에서인지 읽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샀다가 한참 지나서 읽게 되었다.
개인적으로 나는 시편을 힘들어하는데, 한창 시를 배우던 나이에도 시를 힘들어했다. 좋아하는 시도 있지만, 해석이 너무 힘들게 여겨졌다.

이 책은 크기가 스마트폰보다 조금 더 크고 110쪽밖에 되지 않는 얇은 책이다. 하루 만에 읽기에 부담 없을 양이지만 요즘 들어 책 읽기가 버거운 나는 3일에 걸쳐 읽었다. 뒤에 20여 쪽은 본회퍼가 살던 시대 배경이 기술되어 있다. 본회퍼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에서 살았다. 그때 당시 신학자로 칼바르트도 있었는데(칼바르트는 신자유주의를 대표하는 인물로 알고 있음), 본회퍼와 칼바르트의 신앙 노선이 비슷한 부분이 많았던 것 같다. 이 책을 읽다가 칼바르트의 향기를 느낄 수 있었던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는 것을 시대 배경을 읽으며 알 수 있었다.

본회퍼는 먼저 기도에 대한 관점을 다룬다. 이것은 본회퍼가 시편을 기도책이라고 보고 있기 때문인데, 시편을 기도책이라고 생각한 적이 없었던 나는 좀 신선했다. 본회퍼가 말하는 기도는 대화의 측면이 부각되고 있는데, 대화이기에 스스로 기도할 수 없으며, 기도하는 법도 배워야 한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시편이 기도책이기에 시편으로 기도할 수 있다고 하며, 주기도문의 내용이 시편에 다 담겨 있다고 한다. 시편으로 기도하고 싶다면, 그 시편이 '우리'와 무슨 관계가 있냐고 묻기 전에 '예수 그리스도'와 어떤 관련이 있는지를 물어야 한다고 했다. 이 부분이 마음에 많이 와닿았는데, 말씀을 읽으면서 '나와 이 말씀이 어떤 관계가 있는지'에만 너무 초점을 두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맥락에서, 기도는 우리의 가난한 마음이 아니라, 하나님 말씀의 부요함으로 채워져야 한다고 말하는 데에 고개를 끄덕이게 되었다. 간구가 기도의 주요 내용을 차지하는 부분이 많은데 과연 하나님이 중심이 된 기도일까, 하는 점을 생각하게 된다.
또, 본회퍼는 우리가 '예수님과 연합'되었고 '예수님이 함께하심'을 책 전체에서 얘기하고 있는데, 예수님과 연합된 자라면 예수님이 늘 기도하셨기에 기도할 수밖에 없다고 말한다. 예수님과 연합된 자가 맞나.. 고민하게 되는 시점이다.
이후에는 시편을 개괄적으로 살펴보며 시편의 주제를 설명하는 것으로 책을 마무리하고 있다.

어쨌든, 이 책을 통해 시편을 새롭게 볼 수 있는 눈을 뜨게 된 것 같고, 조금이나마 시편을 개괄적으로 이해하게 된 것 같다.
그리고 '그리스도와의 연합'이 어떤 의미인지 깊이 생각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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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리학에 물든 부족한 기독교 옥성호의 부족한 기독교 3부작 시리즈 1
옥성호 지음 / 부흥과개혁사 / 2007년 4월
평점 :
절판


왜 기독교가 심리학에 물들었다고 이야기하고 있는 건지. 제목부터가 자극적이지 않은가? 대학원 전공을 '상담'으로 생각하고 있기에 이 책이 더 가깝게 다가왔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술술 넘어갈 수 있었던 거고. - 파트 1을 읽을 때는 정말 [나니아 연대기] 읽을 때만큼이나 술술 넘어갔다.

들어가는 글부터 호기심을 자극하기에 충분했다.
백금산목사님과 옥성호씨의 주고받은 메일 속에서 릭 워렌을 비판한다든지, 필립 얀시의 내용에 동감할 수 없는 부분이 많다든지 하는 내용부터가 자극적이었다.

저자의 생각에 공감할 수 있는 부분도 있었고, 공감할 수 없는 부분도 있었다. 어쨌든, 혼란스러웠던 게 사실이다.
공감할 수 없었던 부분은 파트 1, 2, 3.
심리학은 과학인가, 종교인가에 대해 주장을 전개해 나갈 때 처음에는 굉장히 혼란스러웠다. 그러다가 거기에 대해 글을 쓰면서 생각을 정리할 수 있었다. 성경은 과학적인 것만 수용할 수 있는가? 성경은 과학책이 아닌데 실험과학(저자가 정의하고 있는 과학은 실험과학인 것 같다.)만 받아들일 수 있다는 게 말이 되는가? 그럼 행동주의 상담은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전제가 잘못 되었으면 결론도 잘못 되었다는 생각에 끝까지 읽고 싶은 마음이 안 들었던 적도 있긴 했다.
그리고 이 사람은 프로이트와 카를 융의 정신분석이라는 심리학의 극히 일부분만 다루고 있다는 점에서 또 신뢰를 잃었다. 심리학에는 여러 가지 이론이 있다. 물론 나 역시 프로이트나 융, 로저스는 좋아하지 않는다. 그러나 정신분석을 심리학으로 표현한 것은 성급한 일반화의 오류가 아닌가 한다. 프로이트가 심리학의 뼈대를 세우는 데 지대한 공헌을 한 것은 사실이지만 말이다.
그리고 상담자 몇 명의 책을 바탕으로 심리학을 왈가왈부할 수 있는가 하는 것도 의심스럽다. 일부러 참고도서를 훑어보았다. 거기에는 내가 상담 연수를 받으면서 들었던 이름으로 프로이트, 융, 로저스, 에릭 프롬밖에 언급되어 있지 않았다. 펄스, 글래서, 엘리스, 번 등 심리학자가 얼마나 많은데..;;

공감할 수 있는 부분도 있었다.
심리학이 쓴 세 개의 가면에서는 공감을 했다. - 물론, 그 세 가면이 심리학의 핵심 요소처럼 이야기하고 있는 것 같아서 그 부분은 조금 껄끄럽긴 했다.
첫째, 자기 사랑. 한국교회는 자기 사랑을 너무 강조하고 있다?!
자기 사랑을 합리화하기 위한 근거로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말씀을 많이 인용하는데, 그것이 성경을 잘못 해석한 것이다는 의견에 조금 놀랐다. 나는 그 말씀에 대한 그 해석을 거의 무비판적으로 수용했었기 때문이다. 자존감이 높은 사람도, 자존감이 낮은 사람도 다 자기를 사랑하고 있는 것이다. 너무 지나치게 사랑하고 있는 것이다. 자존감이 낮은 사람이 자기를 사랑하고 있다는 말에 급당황했다. 아직 완전히 회복되지 않은 내 자존감.. 나는 나 자신을 지나치게 사랑하고 있었던 건가? 이것 역시 친구와 이야기하면서 비판적으로 받아들일 여지가 조금 있긴 했다. 자존감이 높은 사람은 바른 자기 사랑이고, 자존감이 낮은 사람은 바르지 않은 자기 사랑이 아니냐.. 바른 자기 사랑을 해야 다른 사람을 제대로 사랑할 수 있는 게 아니냐.. 이런 이야기를 했던 것.
둘째, 긍정적 사고(조엘 오스틴은 나도 개인적으로 안 좋아라 한다.)와 셋째, 성공의 법칙의 획득은 나름 받아들일 만했다.

저자의 비꼬는 말투가 조금 아쉬웠다. 주장하는 글에서 이런 말투는 반감을 사게 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로렌스 크랩의 '인간 이해와 상담'은 저자와 다른 각도에서 이야기하고 있는데, 저자가 이 책은 보지 않은 것 같아 아쉽다. 심리학과 성경 연구에 대해 다르게 이야기하고 있으니까.

한 번쯤은 보아도 좋을 책. 단, 무비판적으로 수용하지 않는다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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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면 세계의 질서와 영적성장
고든 맥도날드 지음 / IVP / 1990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마음이 우울할 때 보기 시작한 책이다. 마음이 우울하다는 것을 내면세계의 질서가 잡혀있지 않다는 말로 해석했기 때문이다.

베스트셀러이기도 하고, 유명한 고전이기에 어떤 내용인지 무척 궁금했다.

대학생 때 읽었으면 적당했을 책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나님께 대한 예배를 바로잡기 위해 내면세계의 질서를 세워야 한다..는 걸로 해석할 수 있을 것 같은데, 깊이가 있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이 말은, 그 사람의 영성을 따라잡을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그래도.. 이 책을 읽으면서 우울함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나 자신을 돌아볼 수 있었고, 다시 체계적인 생활을 해야겠다는 다짐을 할 수 있었다. 우울함에서 벗어나려면 어떻게 해야하는지도 생각을 정리할 수 있었다.

그리고, 모든 부분에서 저자의 의견에 동감하는 건 아니었지만, 어느 정도는 동감했다.

번역상의 문제가 살짝 아쉬웠다는 게 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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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니아 연대기
클라이브 스테이플즈 루이스 지음, 폴린 베인즈 그림, 햇살과나무꾼 옮김 / 시공주니어 / 2005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1000페이지가 넘는 이 책과 씨름한 게 한 10여일 정도?(이런 책은 날 잡고 아침부터 밤샘하면서 봐야 하는 건데 말이다.)

1편부터 7편까지 쭉 읽으면서 C.S.루이스가 정말 글을 잘 썼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물론 해리포터 시리즈를 워낙 좋아했었던지라 해리포터만큼 재미있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루이스의 기독교적 세계관을 판타지라는 분야로 나타냈다는 점에서 점수를 후하게 주고 싶다.

오히려 이 책을 읽으면서 성경을 더 많이 생각했다. 성경의 장면들이 곳곳에 숨어있었기 때문이다. 창세기와 다니엘과 신약 성경까지 넘나들면서 루이스가 표현하고자 했던 색깔 찾기라고 해야 할까. 재미있었다. 아, 이 부분은 이 성경을 표현하려고 한 거구나 하는 생각도 하고.

7편 마지막 전투에서는 종말론을 다루고 있는데(적그리스도의 출현이라든지..), 플라톤의 세계관이 가미되었다. 글쎄, 정말 종말이 왔을 때 어떻게 변할지 알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으니까.

나니아 연대기에 나타난 아슬란을 보면서 하나님에 대한 내 관점이 조금은 바뀐 것 같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뭐, 분량이 많다보니 어떤 내용을 어떻게 적어야 할지 잘 모르겠다. 생각나는 대로 적기는 했으나 사실 성에 차지는 않는다.

실제로 하나님을 만나면.. 난 어떤 행동을 하게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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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배에 목숨을 걸라
최대복 지음 / 규장(규장문화사) / 200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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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제목에서 확 끌렸다. '예배에 목숨을 걸라'. 당연히 예배에 목숨을 걸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렇게 살지 못하고 있으니까. 그게 이 책을 사게 된 계기가 되었다.
삼일교회 예배에 관련된 책이었다. 최대복 목사님이 쓰신 책인데, 전병욱 목사님의 목회 철학이 물씬 풍겨난다고나 할까. 그간 읽었던 전병욱 목사님의 '파워 로마서' 같은 책을 보며 생각했던 전병욱 목사님의 목회 철학이 그대로 드러나는 책이었다.
전에 연우목자님이 전병욱 목사님의 말씀 중에 선교단체를 무시하는 듯한 발언(?)을 했다고 하셨는데, 이 책을 읽어보니 그럴 만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교회에서 선교단체의 몫까지 다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삼일교회 같은 교회가 흔하지 않고(서울 경기 쪽은 흔할 수도 있으나) 더더군다나 지방에서는 교회에서 훈련받기가 힘들기 때문에 선교단체는 존재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하나님은 예배하는 자를 찾으시고 예배를 통해서 만나주신다.
그렇다. 내가 하나님께 예배를 드린다고 생각할 때 하나님은 나를 만나주셨다. 그런데 그 예배는 주일 예배가 아닐 때도 있었다. 이 책에서는 주일 예배를 아주 강조하지만 말이다. 나도 예전에는 주일 예배는 엄마의 강압에 겉으로 보기에는 정말 잘 드렸던 기억이 있다. 빳빳한 새 돈과 새 옷을 입고 교회에 갔던 기억. 그게 어느 순간부터 무너졌다. 너무 형식적이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준비된 옷을 입으면 옷에 따라서 마음도 경건해지고 하나님께 준비된 예배를 드릴 수 있다는 것을 간과한 까닭이다. 물론 엄마에게 반항하고 싶은 마음이 그렇게 표현되지 않았나 하는 생각도 든다.
부모님이 목회를 하심이 사실 나는 너무 힘들었다. PK라는 꼬리표가 힘들었고, 부모님과 동역해야 한다는 사실이 힘들었다. PK는 축복이라고 늘 생각하며, 요즘은 PK 캠프에서 상담자로 섬기고 있기도 하지만 그래도 간혹 힘든 경우가 있다. 재정적인 부분을 함께 부담해야 하기 때문이다. 나에게 너무 많은 것을 요구하는 것 같은 생각이 들 때 힘들기도 했다. PK 캠프에서 상담자로 있으면서 부모님의 동역자로 서가야 한다는 사실을 다시금 깨달았을 때, 그래서 부모님의 짐을 함께 져야 한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 정말 힘들었다. 농어촌 교회 목회를 하시면서 동역자가 많이 없다는 사실이 정말 힘 빠지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예배를 드리는 게, 아니 교회에 가는 게 정말 힘들었다(부모님은 더 힘드셨겠지만). 그러나 이 책에서는 '예배를 통해서 내가 하나님께 무엇을 드릴 수 있을까?'라는 생각으로 예배에 임하면 환경적인 요인이 크게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이야기한다. 생각을 바꿨어야 하는 문제였다. 없으면 없는 대로 기도하면 되는데. 기도하는 성도가 결국 헌신한다고. 고작 10명 정도의 성도. 평균연령이 60대인 교회 상황. 예배에 있어서 이런 환경적인 요인이 문제되는 건 아니었다.
나는 정말 얼마나 예배를 사모하고 기대하고 준비하고 있었을까? 신령과 진정으로 참된 예배를 드리기 위해서는 쇼를 준비하는 사람들 이상으로 예배를 준비하는 자세가 중요하다고 이야기한다. 예배가 너무 형식을 벗어나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그래서 왠지 쇼 같은 예배를 보면 저래도 될까? 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었는데. 그만큼의 '자세'가 중요한 거였다. 정말 최고의 가치를 드려야 하는 예배이므로. 내가 드리는 예배는 내가 주인공이 아니니까. 사람이 주인공이 되는 예배는 이미 예배가 아니다. '하나님의 임재 연습'이라는 책에서 언급하듯이,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인정하고 나의 나 됨을 인정하는 게 예배라는 것을. 이 말을 이 책에서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참된 예배는 내가 어떠한 상황이 주어진다고 할지라도 "하나님만이 옳습니다. 하나님만이 높으십니다."라고 자신을 하나님 앞에 낮추는 것이다. 그리고 예배의 관객은 내가 아니다. 예배는 관객의 자리로 드리는 것이 아니다. 예배를 드릴 때의 관객은 오직 한 분 하나님밖에 없다는 사실이다. 우리가 예배의 관객이 아니요 배우이므로 우리가 예배를 드린다고 말해야 한다. "예배는 보는 것이 아니라 드리는 것이다."
항상 앞자리에 앉아서 말씀을 들을 수 있음이 얼마나 감사한 일인가(이것도 10년이 넘었다.). 말씀을 앞자리에서 듣고 싶어도 듣지 못하는 사람이 있는 데 비하면 정말 감사한 일이다.
약 3년 전, 주일을 어겨야 하는 일이 있었다. 나는 그때 정말 괴로웠다. 4년 동안 기도했었다. 주일에 임용고시를 치지 않게 해달라고. 그러나 응답은 No였다. 임용고시와 면접 둘 다 주일이었다. 나는 할 수 없이 주일을 어길 수밖에 없었다. 그때 얼마나 답답하고 힘들었는지 모른다. 임용고시를 치면서 지금 주일학교 할 시간인데, 대예배 시간인데.. 주일을 어기면서까지 해야 하나.. 주일예배를 양보하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그러나 나는 그 순간 타협했다. 지금도 여전히 주일에 치뤄지는 임용고시. 내 때에 이루어지지 않았다고 기도를 그만두는 게 아니라, 임용고시가 주일에 치뤄지지 않도록 계속 기도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예배의 회복 없이는 인생의 회복도 없다. 농어촌 교회라 힘들지만, 이 힘듦도 하나님께서는 다 아신다. 환경에 지배 당하는 게 아니라 성령님의 도우심으로 환경을 지배할 수 있는 나이기를 소망한다.
삼일교회 예배의 특징이 잘 드러나서 일부 대형교회에만 맞는 책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 교회처럼 10명 남짓한 성도들이 모이는 60대 이상 연령층의 교회도 가능할까. 이런 패배주의적인 생각이라니. 휴. 뭐, 어쨌든 예배에 대한 내 태도를 반성할 수 있었고 하나님을 대하는 태도가 바뀌어야 함을 인식할 수 있었기에 감사할 수 있다. 예배는 선택이 아니라 의무다. 예배에 목숨을 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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