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 파이퍼의 생각하라 - 하나님과 이웃을 더 깊이 사랑하기 위한 성경적 사고법
존 파이퍼 지음, 전의우 옮김 / IVP / 201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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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파이퍼의 생각하라(존 파이퍼/전의우 역, IVP)

이 책은 2012년, 성경에 대한 내 관점이 완전히 변한 계기가 되었던 말씀묵상캠프를 할 때 김관석목사님이 추천하신 책 중에 한 권이다.
그때 목사님은 여러 책들을 추천하셨는데, 하우주석, 이 책, [사랑에 항복하다], [이 책을 먹으라]를 추천하신 기억이 있다(아마도 내가 산 책들이라 기억에 남는 거겠지.).
그 중 이 책이 가장 마지막에 읽은 책이다.

나는 성경적으로 생각하는 방법에 대해 쓰인 책인 줄 알았는데 그런 종류의 책은 아니었다(그런 종류의 책을 보려면 성경 연구 관련 책을 봐야할 것 같다.).
'생각하기'의 중요성과 믿음과 이성의 관계, 그리고 믿음에 대항하는 상대주의와 반지성주의에 대한 설명과 지식의 궁극적 목적이 저술되어 있다.
주옥 같은 구절들이 많아서, 구절들을 인용하며 책을 소개한다.

1. '생각'에 대한 관점을 바꾸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생각'을 하는 목적은 단지 내 지적 호기심을 충족하거나 통찰력을 강화하기 위해서, 로 생각했던 것 같다. 하지만 존 파이퍼는 말한다.

생각은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다. 하나님 외에는 아무것도 그 자체로서 최종 목적이 될 수 없다. 생각은 삶의 목적이 아니다.(29쪽)
생각은, 다시 말해 하나님이 주신 지성을 열심히 그리고 겸손하게 잘 활용하는 것이고, 이는 진리를 아는 데 필수적이다.(32쪽)
생각은 이해에 필수적이다. 그러나 이해(총명)는 하나님의 선물(은사)이다.(32쪽)

나는 왜 계속 생각을 하고 있는가? 하나님 자체가 내 인생의 목적이 되신다고 고백하는 것은 생각의 목적 또한 하나님께 있는 것이 아닌가?

지성은 온전한 기쁨을 위해 존재한다.(41쪽)

2. 나의 믿음에 대해 되돌아보게 되었다.
다음의 내용을 읽으며 나는 예수님을 정말 최고로 귀한 존재로 받아들이고 있었던 것일까, 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리스도의 영광이 나에게 어떤 의미와 가치를 갖고 있는가?

이 문제를 이렇게 설명해도 될 것이다. 이들은 '그리스도를 영접할' 때 그분을 최고로 귀한 존재로 받아들이지 않는다. 단지 죄를 사하는 분으로(죄책감에서 벗어나고 싶기 때문에), 지옥에서 건지는 분으로(고통에서 벗어나고 싶기 때문에), 치유자로(질병에서 벗어나고 싶기 때문에), 보호자로(안전하고 싶기 때문에), 창조자로(인격적인 우주를 원하기 때문에), 역사의 주인으로(질서와 목적을 원하기 때문에) 받아들일 뿐이다. 이들은 바울이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고 고백했을 때처럼 그렇게 그분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이들은 그리스도를 참 모습 그대로, 우주의 그 무엇보다 영광스럽고 아름다우며 놀랍고 만족스러운 존재로 받아들이지 않는다. 이들은 그분을 자랑하지 않고, 그분을 보화로 여기지도 않으며, 그분을 귀히 여기지 않고, 그분을 기뻐하지도 않는다.(82-83쪽)
구원하는 믿음은 단지 사실을 받아들이는 게 아니다. 그리스도를 우리를 위해 죽고 부활하셨으며 무한히 영광스럽고 놀랍도록 아름다우며 최고로 귀한 분으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중략)
우리는 복음의 이야기를 듣고 복음의 사실과 교리를 바르게 이해해야 하지만, 구원하는 믿음의 결정적 근거는 복음에 나타난 그리스도의 영광이다.(84쪽)

3. 상대주의와 반지성주의에 대해서는 깊이 있게 생각하지 않았다.
평소에도 워낙 탐탁치 않게 생각했던 녀석들이라 그냥 슬렁슬렁 읽고 넘겼다. '참과 거짓을 가늠하는 보편타당한 기준은 없다'(123쪽)는 상대주의의 전제 자체가 상대주의가 모순적인 것임을 의미하는 것이다.

4. 교회사 공부를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복음주의자들이 지성주의를 비판적으로 봤던 경향이 있었던 것 같은데(142쪽), 그런 상황이 있게 된 배경은 무엇이었을지 궁금해졌다. 계속 교회사 공부해야겠다, 말로만 하고 있었는데, 언젠가는 공부를 해야겠다..고 또 말을 한다.

5. 결론은 '지식은 사랑을 위한 것이다.'라는 것.
상담 공부하면서 머릿속에 계속 맴돌았던 말이 '사랑 안에서 진리를 말하라'였는데, '진리' 쪽에 가까운 나를 본다. 즉, 교만하기 쉬운 상태로 계속 나를 내버려두고 있는 것이다. 끝없는 자기부인이 필요하다.

지식이 교만을 쉬 낳는 까닭은 지식은 주는 행위의 결과가 아니라 받는 행위의 결과이기 때문이다.(186쪽)

6. 부록2는 '관찰'을 위한 사례이다.
말씀묵상캠프에서 들었던 적이 있는 이 사례는, 나태주의 <풀꽃>을 생각난게 한다. 그 시의 내용처럼 관찰하는 것이 성경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것이라는 생각을 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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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도 보는 이 없을 때 당신은 누구인가? - 10주년 기념판, 성숙한 인격의 8가지 자질
빌 하이벨스 지음, 박영민 옮김 / IVP / 2007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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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빌하이벨스 목사님 책은 < #너무바빠서기도합니다 > 이후로 두 번째다.
몇 년 전에 <너무 바빠서 기도합니다>를 읽고 괜찮았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 같다.
아이러니하게도 내용은 제대로 생각나지 않지만.
한때 유명세를 탔던 책이라 읽어보자 싶어서 몇 년 전에 샀건만..
지금껏 읽지 않다가 드디어 읽게 되었는데 첫 번째 책의 느낌과 두 번째 책의 느낌의 간극이 왜 이렇게 큰지 모르겠다.
이 책을 읽고 이 책을 산 돈이 아깝다는 생각을 했다.-중고서적으로 팔까? 하는 생각을 잠시 했다. 이 책을 내 딸이 안 읽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서다. 한편으로 팔아도 문제다. 다른 사람이 이 책을 읽는 것도 내키지 않은 일이기 때문이다.

어쨌든 이 목사님은 책 제목만큼은 기똥차게 잘 짓는 것 같다.
너무 바빠서 기도한다는 역설, 아무도 보는 이 없을 때 숨기고 싶어할 만한 인간의 모습을 잘 꼬집어 내는 것.
이런 부분은 칭찬할 만하다.

책 내용으로 돌아가서, 내가 왜 책 산 돈이 아깝다고 하는지를 풀어보려 한다.
이 책은 '성숙한 인격의 8가지 자질'이라는 부제가 붙어 있다.
인격에 관한 책이다.
여는 글에 보면 이 책은 두 부류의 사람을 대상으로 썼다고 나와 있다. 그리스도인이건 아니건 간에, 인격의 힘을 높이 평가하고 우리 사회와 자신에게 이 인격의 필요성이 시급하다고 느끼는 사람들, 그리고 이미 그리스도께 일생을 바친 사람으로서 자신이 획기적으로 변화하여 인격의 미덕이 눈부시게 드러나기를 갈망하는 사람들.
여기서부터 이미 문제는 시작되었다.
인격의 문제를 다루는 데다 그리스도인만을 대상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는 데서부터 자기계발서라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개인적으로 자기계발서를 좋아하지 않는다.
그리스도인이 인격을 계발할 수는 있겠지만, 무엇을 위해 계발하고자 하는가? 두 번째 부류의 사람들을 설명하는 글에서 찾을 수 있다고 본다. 자신이 획기적으로 변화하여 인격의 미덕이 눈부시게 드러나기를 갈망하는 사람들. 결국 자신의 변화를 위함이다. 자신이 드러나기를 갈망한다(이럴 거면 앞에 그리스도께 일생을 바쳤다는 표현은 왜 쓰는 건지.). 자기만족감이라고 해야 할까. 이 책 전반적으로 드러나는 부분이다.
저자는 꼭 필요한 인격을 8가지로 보는데, 이것 역시 저자의 생각일 뿐 왜 이런 항목을 선택했는지에 대한 설명은 없다.
8가지 인격은 용기, 자기통제력, 비전, 인내, (온유한, 엄한, 희생적인, 파격적인) 사랑이다.
용기부터 보자. 저자는 용기가 있어야 죄를 고백하게 된다고 한다. 죄의 고백은 성령님의 인도하심 아닌가.. 자신의 의지로 죄를 고백한다라.. 저자의 논리는 성령님이 용기를 주시고, 용기를 가지게 된 사람이 죄를 고백한다는 논리 같은데, 성령님의 역할을 축소시킨 것 같다. 쭉 읽어보면 '믿음 없음 = 용기 없음'으로 바라보고 있는 것 같기도 하다. 용기 없는 사람들을 향해 두려움에 직면하면 용기를 기를 수 있다고 한다. 이 말은 성경적인가?
자기통제력 파트는 행동주의를 떠올리게 한다. 그리고 도덕책이 생각난다. 성경이 생각나지는 않았다.
비전, 이 말처럼 모호한 말은 없는 것 같다. 다른 시각으로 바라보라는 것 같기는 한데, 성경이 없어도 가능한 말 아닌가? 그리고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것처럼 느껴진다'는 표현을 하는데 이것처럼 불확실한 부분이 어디 있을까? 믿음은 느낌이었던가? <신앙감정론>을 함께 읽어야 할 것 같다.
이런 식으로 하나 하나 따지고 보면 한도 끝도 없을 것 같아 여기서 그만두기로 한다.

종합적으로 볼 때, 그저 좋은 말을 다 끌어모아 이 책을 썼다는 인상을 받았다. 거기에 양념으로 하나님이 흩뿌려진 정도. 그러다 보니 성경에 위배되지 않는 좋은 말은 성경적인가? 수용 가능한가? 라는 생각이 들었다.
쉽게 설명하기 위해서인지 예시를 많이 들었는데 너무 예시가 많다 보니 적절하지 않은 부분도 있고, 그래서 흐름에 방해되기도 했다.
또, 성경을 단편적, 도덕적으로 해석하여 성경에서 쓰는 단어와 일반적 단어를 혼용해서 씀으로써 성경 이해가 얕아지는 아쉬움이 있었다.
아무도 보는 이 없을 때 보이는 모습이 인격이라고 서두에서 설명하지만 읽어보면 아무도 보는 이 없을 때와 관련 있는지도 잘 모르겠다.
마지막으로 '교회를 다닌다고 해서 모두가 그리스도인이 아니고, 종교인이 아닌 사람 중에도 선하게 살려고 하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을 저자는 간과하고 있는 것 같다. 자기만족감과 선함을 중요하게 생각한다면 예수님은 왜 필요한가?

너무 딴지가 많은데, 요즘 내 상태가 이렇다.
'성도'의 교제가 없어서 그런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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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신경, 신조의 의미부터 제대로 몰랐던 나는 이 책을 통해 신조의 의미를 알게 된다.
(신조: 기독교 신앙의 중요 사항에 대하여 권위를 가진 공적인 신앙고백)
도르트신경 들어보기만 했지 사도신경에서의 그 신경과 똑같을 것이라고는 생각도 하지 않았었다.
어릴 때부터 의미 모르고 외웠다가 커서는 의미를 생각하며 외우고 있지만, 사도신경의 기원이나 그 형식적 의미에 대해서는 전혀 알지 못했으니까.
이 책을 통해 사도신경을 함께 고백하는 이유, 사도신경의 배경, 사도신경의 단락이 어떻게 나누어지는지 알 수 있었다. 또, 사도신경 내용을 성경과 하이델베르크 교리문답을 토대로 풀어내고 있다.
사도신경의 세 번째 성령 하나님 부분에 등장하는 '거룩한 공교회'에 대한 생각이 많아졌다. 거룩함을 추구하지 않는 교회는 교회라고 불러야 하나..

초등학교 고학년이나 중학생 이상부터는 읽을 수 있을 것 같고, 챕터마다 뒤에 붙어 있는 '정리하며 나가기'를 통해 사도신경 공부를 할 수 있도록 되어 있다.
교회나 공동체에서 같이 공부하면 좋을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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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다 읽었다.
사정상 중간에 다른 책을 읽기도 했고.. 안 읽기도 했지만.

신랑이 읽어주기 시작해서 2권을 먼저 읽었고(집에 2권밖에 없음),
2권에 적잖은 충격을 받고 1권은 교회에서 빌려와서(라고 표현하긴 그렇지만.. 빌려왔는지도 아무도 모를 듯하다.) 읽게 되었다.
1권은 1-50까지의 이야기가, 2권은 51-101까지의 이야기가 있다.

1권은 2권에서 워낙 충격을 받아 2권만큼의 충격을 주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생각할 거리는 많았다.
특히 마지막 파트인 기도와 전도 부분은 내가 생각하고 있던 부분을 짚어주어서 얼마나 속이 시원했던지.
성경에서 전도가 차지하는 파트가 그렇게 많지 않음에도 전도를 '지상명령'이라는 말로 강조하고,
복음 전파인지 세력확장인지 모를 전도 내용과 방법들은 생각해 보아야 할 문제가 아닌가.. 한다.
물론 이 목사님 의견이 전적으로 옳다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성경 해석에 있어서는 대부분 교회들의 설교보다는 훨씬 낫겠다는 생각이 드는 것도 사실이다.

가끔씩 이렇게 제대로 성경 해석을 해주시는 분들을 만날 때면,
지금 목사님들은 하나님께 많이 혼날 거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어쨌든,
누구 생각할 것 없이,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하면 된다.
더 열심히 공부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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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이 책의 해석에 모두 동의하는 것은 아니고 궁금한 것도 많지만, 성경을 이 목사님처럼 읽어야 하는 것임에는 틀림없는 것 같다.

책에 흥미가 사라지고 있었던 요즘, 신랑이 책을 읽어주기 시작했다.
그 책이 이 책이다.
목차만 읽어주는데도 어찌나 흥미로운 게 많던지.
설교 시간에 궁금증이 생기던 것들을 '감히' 물어볼 수 없었던 답답함을 어느 정도 해소해주었다.
신랑이 갖고 있던 책은 2권.
1권은 교회에서 봐서 2권을 샀다고 했다.
2권을 먼저 읽어서 1권은 이제 곧 읽을 생각이다.
2권 끝 파트는 재미가 반감되어서(아마도 생각했던 내용이라 그런 건지..) 2권을 거의 다 읽어감에도 끝내는 데 시간이 오래 걸렸다.
1권이 흥미로운 게 더 많다던데 기대된다.

늘 드는 생각이지만, 책 읽는 법을 제대로 배웠다면 조금 더 자기 생각이 분명했을 것 같다.
책을 대하는 태도는 권위있는 사람의 말을 대하듯 했었다.
맥락으로 읽지 않았고(유일하게 맥락으로 읽은 책은 소설책 정도?) 시험을 위해 읽었다.
성경도.. 1년 1독을 위해 읽었었다.
그동안 설교로 들어왔던 내용이 오히려 내 눈을 가려왔다는 생각이 많이 들었다.

모차르트였던가..
피아노를 한 번도 배우지 않았던 사람보다 이미 배웠던 사람에게 레슨비를 더 많이 청구했다고 한다.
이미 배운 사람에게 자신이 다시 가르치려면 더 많이 노력해야 하기 때문이라나..
성경을 제대로 읽기 위해 더 많은 노력이 필요함을 느낀다.
다시 예전의 해석이 생각날 때가 많다.
여러 번 읽고 싶은 책인데 읽을 책이 너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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