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사 그리스도인 - 거의 그리스도인이 될 뻔한 사람 잉글랜드 P&R 5
매튜 미드 지음, 장호익 옮김 / 지평서원 / 200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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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사 그리스도인](매튜 미드/장호익 옮김, 지평서원)

신랑의 소개로 알게 된 책이다. 신랑은 나보다 훨씬 전부터 개혁주의 신앙에 관심이 많았고 고전 책을 읽어왔다. (요즘은 잘 안 읽는 것 같지만) 주로 읽는 책이 로이드 존스, 조나단 에드워즈 같은 사람들의 책이다. 나랑 연애할 때부터 이 책을 그렇게나 말해왔다. 이 책과 더불어 [한국 교회가 잘못 알고 있는 101가지 성경 이야기] 시리즈, [신앙감정론]도 엄청 말했었더랬다. 이제야 이 책을 다 읽었다.
이 책의 부제는 ‘거의 그리스도인이 될 뻔한 사람‘이다. 사실 이 책을 읽다 보면 좀, 아니 많이 무서워진다. ‘나는 그리스도인일까?‘를 계속 생각했다. 두려웠지만 꼭 필요한 논제라고 생각한다. 개혁주의 신앙관을 견지한 사람이라면 이 책은 꼭 읽어보길 권한다.
이 책은 최근에 발행된 책이 아니다. 지은이 머리말을 읽고 놀랐는데, 무려 1661년에 쓰여진 책이었다. 저자는 생전 처음 보는 사람이었는데, 조나단 에드워즈보다 이전 사람이었고, 존 오웬과 같은 시기 사람이었다. 뒤에 보면 나오지만, 영국 정부가 이들을 탄압할 때 존 오웬, 매튜 미드가 함께 그 목록(라이 하우스 공모)에 들어가 있다.-교회사 공부하고 싶다!
‘그리스도인이면 그리스도인이지, 그리스도인이 될 뻔한 사람이 있는가?‘라고 질문할 수 있다. 그 질문에 대한 이 책의 대답은 ‘예.‘이다. 불신자가 아니다. 그리스도인이 되다 만 사람이다. 따지자면 불신자와 다름 없겠지만, 거의 그리스도인이 될 뻔했다고 말하는 데는 이유가 있다. 1장에서 어떻게 그런 사람이 나올 수 있는지 성경적으로 설명하면서 아그립바와 부자 청년, 열 처녀 비유를 언급한다. 바울의 논증으로 거의 그리스도인이 될 뻔했다고 직접 고백했던 아그립바와, 예수님께서 천국에서 멀지 않다고 말씀하셨던 부자 청년, 그리고 슬기로운 다섯 처녀와 똑같이 등불을 들고 신랑을 기다렸던, 단지 차이가 있었다면 기름의 준비 여부였던 어리석은 다섯 처녀에 대한 해석은 내 신앙의 수준이 어떠한가 생각해보게 하는 계기가 되게 했다(물론 신랑이 워낙 스포일러를 많이 한 탓에 긴장감이 떨어지기는 했지만.).
2장이 매우 핫한 내용으로 가득 차 있는데, 2장 제목이 ‘신앙적인 삶에서 큰 진보를 보였는데도, 단지 유사 그리스도인일 수 있는가?‘이다. 여기에서는 그 답으로 스무 가지의 사례를 들어 설명하고 있다. 얼마나 꼼꼼하고 세세한지, 읽으면서 대단하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실제로 책의 반 정도의 분량을 차지한다.). 이렇게까지 나누어서 설명해야 할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지금은 이런 사례들이 보여도 (개혁주의 교단에서) 교인으로 받아들이고 인정하는 통에(웬만하면 사랑으로 감싸야 한다는 둥 말을 하고 있으니 말이다. 사랑으로 감싸더라도 바른 교육은 해야지.) 잘못되었다는 생각을 전혀, 거의 하지 않고 있는 것이 현실인데, 이 책에서 말한 대로 한다면 진정한 그리스도인은 교회 내에 과연 몇 명 정도나 될지 궁금해진다. 그 스무 가지 사례의 소제목 중 충격적인 것만 적어보자면, 큰 은사를 받을 수도 있음, 수준 높은 신앙고백을 할 수도 있음, 죄를 미워하고 대적할 수도 있음, 은혜를 사모할 수도 있음, 말씀을 두려워할 수도 있음, 말씀을 기뻐할 수도 있음, 천국에 대한 소망을 가질 수도 있음, 크게 변화된 모습을 보일 수도 있음, 그리스도로 인해 손해를 입을 수도 있음,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을 수도 있음, 성령을 받을 수도 있음, 믿음을 가질 수도 있음, 하나님의 계명을 잘 지킬 수도 있음, 성화의 모습을 보일 수도 있음‘인데(적고 보니 거의 다 적은 것 같지만), 너무 너무 충격이었다. 적고 있는 지금도 너무 충격이다. 열매로 안다고 하는데 그 열매가 가짜일 수도 있다는 게 너무 소름돋고(비기독교인의 선함은 착한 일 수준이지만 기독교인의 선함은 그리스도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라는 차이가 있지만 겉으로 보이는 것으로는 알 수 없으니 말이다.), 부르심을 받았을 수도, 성령을 받을 수도, 믿음을 가질 수도 있는데, 하나님이 ‘넌 가짜‘라고 말씀하신다면 세상 이보다 더 억울할 일이 어디 있을까 싶다. 신랑과 2장에 대한 내용을 말하며 어디에 해당하는 것 같냐고 물으니 두 세 가지 빼고 다 해당되는 것 같다고 말했다. 내가 충격받은 소제목을 적은 것만 저 정도이니, 나도 비슷한 지경이다. 정말 읽다보면, ‘내가 회심한 게 맞는 걸까?‘라는 생각이 절로 든다. 죄를 자각하는 게 회심이 아니라고 하니까, 그저 죄를 인식하는 정도에서 끝날 수도 있다고 하니까 내 상태가 그런 상태인가, 하는 의문이 생긴다. ‘이성적인 죄의 각정은 ‘모든 인간에게 있는 이성의 공통 원리의 작용에서 자연의 빛으로부터 죄를 인식하는 것으로서 자연적인 양심의 작용에서 나오는 것‘입니다.‘(184쪽)
한편으로 [천로역정]에서 크리스천이 천국 가는 길에서 만났던 수많은 유사 그리스도인도(검색해 보니 존 번연도 이 시기의 사람이다.) 이 스무 가지 사례로 정리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그렇게 정리해보고 싶은 충동이 든다. 시간만 많으면 그렇게 해보고 싶다.).
충격받은 소제목의 내용들은 얼마나 더 충격적인지 적어본다.

그러나 그리스도를 고백하는 것이 그리스도를 시인하는 것은 아닙니다. 즉, 그리스도를 고백하는 것과 그리스도를 시인하는 것은 별개의 것입니다.(67쪽)
은혜를 받은 모든 사람들이 죄를 미워하지만, 죄를 미워하는 모든 사람들이 은혜를 받은 것은 아닙니다.(79쪽)
죄를 범하지 않도록 우리를 돕는 것은 새로운 결심이 아니라, 새로운 본성입니다. 즉, 결심으로 새로 태어날 수 있지만, 새로운 본성이 없다면 결심할 수 없습니다.(81쪽)
그가 하나님의 자녀라면 받은 은혜보다는 자신의 죄를 더 바라보고, 자신의 믿음보다는 자신의 타락을 더 바라보고, 새롭게 하시는 은혜보다는 내재하는 정욕을 더욱 바라봄으로써, 자신이 매우 선한데도 매우 악하다고 생각할 것입니다.(194쪽)

3장과 5장에서 유사 그리스도인이 거의 그리스도인으로 보일 정도로 신앙적인 삶의 진보를 보일 수 있는지에 대해 설명하고, 6장에서 유사 그리스도인의 상태에 머무르는 원인, 7장에서 더 나아가지 못하는 원인을 설명하며 8, 9장에서 어떻게 믿음을 검증하고 확증해야 할지 설명한다.
지은이 머리말에 나오는 구절을 끝으로 서평을 마친다.

여러분의 육신, 즉 여러분의 육욕은 사랑하면서 여러분의 영혼은 무시하고 있지 않습니까? 여러분은 여러분의 육체를 감싸며 욕망을 채워주면서 영혼에는 관심을 기울이지 않고 있지는 않습니까?(1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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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사람을 위한 성경 묵상법
김기현 지음 / 성서유니온선교회 / 201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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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사람을 위한 성경 묵상법](김기현, 성서유니온)

새해, 새로운 책으로 묵상을 하기 전에 묵상 시간에 묵상법에 대한 책을 읽기로 했다. 김기현 목사님은 [그런 하나님을 어떻게 믿어요?] 책으로 처음 만났고(그 책도 아마 페이스북에서 했던 광고를 보고 샀던 것 같은데, 몇 년 전 기억이라 정확하지는 않다. 그 책에서 나온 [동물농장] 책도 사놓고 몇 페이지 읽다가 책꽂이에 얌전히 꽂아놓고 있음..), 최근에는 페이스북으로 팔로우하고 있는 분이다.
얇고(그래도 301쪽), 쉽게 쓰였고, 바로 옆에서 이야기하고 있는 것처럼 서술해놓은 책이지만 절대 얕지는 않은 책이다. [독서모임 꾸리는 법]처럼 알맹이가 꽉 찬 느낌의 책이다. 묵상의 기초와 방법, 실천과 문제에 이르기까지 묵상을 해본 사람이라면 공감할 수 있고 배울 수 있는 책이라고 생각한다.
‘이미 우리는 어떻게 묵상해야 하는지 잘 알고 있습니다. 우리는 싫어하는 누군가를 주야로 묵상합니다.‘(15쪽)에서 뜨끔한 것은 비단 나뿐만은 아닐 것이다. 2012년 말씀묵상캠프에서 연애편지 읽듯이 성경을 읽어야 한다고 했던 데에서 한 번 충격을 받았던 기억이 있는데, 이제는 싫어하는 누군가를 묵상하듯 성경을 읽어야 한다니 느낌이 완전 다른데 가능할까, 라고 생각하게 된다. 아직도 성경을 엄청나게 많이 좋아하는 것은 아닌 것 같다. 위의 캠프에서 묵상의 원어는 ‘하가‘라고 하며 사자가 뼈다귀를 계속 핥고 있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들었던 기억이 있는데(이 또한 8년 전이니 정확한 기억은 아닐 것이다.), 이 책에서는 원래 의미가 ‘중얼거리다‘라고 하는 데서 그동안 묵상에 대해 잘못 생각해왔다는 생각이 들었다. 저자는 읽기를 강조한다. 눈으로 읽는 것 말고 소리내어 읽기. 중얼거리는 것 자체가 소리내어 읽어야 가능한 일이니. ‘요컨대, 성경이 말하는 묵상이란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소리 내어 읽는 행동을 가리킵니다.‘(33쪽) ‘성경을 읽는다는 것은 외국어를 배우는 것과 비슷합니다.‘(33쪽)라고 하는 대목도 신선한 충격이었다. 모태신앙으로 자라와서 성경을 읽는다는 것은 모국어(?)의 느낌이었기에 한 번도 외국어를 배우는 것과 비슷하다고 생각하지 않았던 까닭이다. 외국어를 배우는 것과 비슷하다면 더 열심히 공부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드는 건 성경을 공부하는 데에 외국어를 공부하는 것만큼이나 열심을 내지 않았다는 의미이기도 하니 나름 성경을 좋아한다고 생각했는데 절로 겸손해지게 만드는 구절이었다.

‘‘읊조리다‘, ‘읊다‘는 말에는 소리를 낸다는 뜻과 함께 되풀이한다는 뜻도 있습니다.‘(34쪽)
‘˝묵상은 곧 생각˝이 아닌 ˝묵상은 곧 읽기˝라고 강조하는 까닭은 반복해 읽다 보면 자연스럽게 생각하게 되기 때문입니다.(45쪽)

이 두 구절만 가지고도 이때까지의 묵상을 되돌아볼 수 있었다. 묵상 시간에 성경을 읽을 때, 대학생 때 이후로는 한 번도 소리내어 읽은 적이 없는 것 같고, 반복도 세 번을 넘기지는 않은 것 같고, 한 두 번 읽다가 생각이 들면 썼기에 텍스트에 침잠하기보다 내 생각이 앞섰던 것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2부 묵상의 방법에서는 왕초보와 중급자, 목회자, 직장인을 위한 묵상의 방법이 서술되어 있어 과연 책의 제목처럼 ‘모든 사람을 위한 성경 묵상법‘이 쓰였다. 나는 중급자와 직장인을 위한 묵상 방법이 도움이 많이 되었다. 그 중 ‘요지는 각자의 경험으로 본문을 읽는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자신을 드러내고, 자기 스스로를 읽게 되는 것이지요.‘(78쪽)라고 적힌 부분에서 일반적인 독서도 그렇게 될 수 있지 않을까, 라고 생각했다(이게 ‘렉티오 디비나‘이려나.). 그렇다면 아마도 일반적인 독서와 성경 묵상의 차이는 ‘구원에 이르는 지혜‘의 차이가 아닌가 싶다.
중급자의 묵상법으로 ‘제목 정하기‘는 한 번도 해보지 않았던 것이라 시도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고, ‘이야기적 동일시‘는 처음에는 거부 반응이 들었다. ‘이야기적 동일시‘를 맥락에 맞지 않게 자신의 감정으로 해석하며 설교하시는 분을 보았던 기억 때문인 것 같은데, ‘그러므로 묵상인으로서 우리는˝이게 무슨 뜻이지?˝보다는 ˝어떤 마음이었을까?˝라고 질문해야 한다‘(85쪽)는 구절에 대해서는 동의를 하지만(아무래도 텍스트에 빠지기에는 그 질문이 훨씬 유력하므로) 그 방법을 시도하는 데 있어서는 주춤거리게 되는 것 같다. 묵상 본문으로 설화체를 (무의식적으로) 피하고 있는 것은 그런 까닭일까.
직장인을 위한 묵상법에서 많은 분량은 묵상에 적절하지 않다고 하시며 대체로 10-15절이면 충분하다(133쪽)는 구절을 읽고서는 나는 10-15절도 많은 것 같다고 생각했다. 문맥까지 고려하려면 그 정도 읽어야 할 것 같기도 하지만, 조그마한 것도 놓치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드는 모양이다(세세하게 따지는 스타일이라서일까.).
적용 부분은 권일한 선생님의 강의에서도 들었던 ‘적용하지 마라‘가 나왔다. 적용의 방법으로 SPACE와 3P를 언급하는데, SPACE는 묵상캠프에서 묵상할 때의 질문과 일치해서 조금 놀랐다.
묵상과 기도 파트에서는 묵상과 기도를 이원화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되었고, ‘기도가 없다면 묵상을 제대로 한 것일 리 없습니다.‘(168쪽), ‘그래서 뮬러는 잘라 말합니다. 기도는 ˝속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묵상을 통해 양육된 후에 가장 잘 이루어질 수 있다.˝(173쪽)는 구절을 보고 묵상을 제대로 하지 않았구나, 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하지만 같은 기도를 여러 번 반복한다는 것은 중언부언이라는 구절 때문인지 쉽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하지만 묵상이 곧 기도이고, 기도가 곧 묵상이라면, 같은 기도를 여러 번 반복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성경 봉독은 대충 넘어가도 되는 순서가 아닙니다.˝(239쪽) 저자는 거스리의 말을 인용했다. 친정 교회에서는 다같이 봉독, 교독을 했고, 지금 교회에서는 목사님만 봉독하신다. 이 책을 읽고 보니 같이 읽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묵상의 문제 중 ‘묵상은 자의적인가?‘ 파트에서는 지금 읽고 있는 [아직도 가야할 길]을 또 읽은 느낌이었다. [아직도 가야 할 길] 3부 ‘성장과 종교‘ 끝부분에서 과학, 아기와 목욕물을 다루고 있었기 때문이다. ˝대담하게 죄를 지어라.˝는 루터의 말도 [유사 그리스도인]에서였는지, [아직도 가야할 길]에서 봤는지 아무튼 또 보게 되었다.
매우 세세한 부분이지만 마시멜로 이야기나 요더 이야기를 읽으며 책이 나오기 직전에 김기현 목사님 페이스북 타임라인에서 봤던 기억에 아, 이 부분 쓰시려고 그랬던 거구나, 하는 뒤늦은 깨달음이 있기도 해서 재미있었다. 시냇가에 심은 나무와 복 있는 사람 큐티집을 좋아하시는 건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고(일부러 쓰시는 것 같은데 말이다.).
이 책을 읽고 묵상모임을 만드는 것은 더욱 간절해졌지만, 한 번 흐지부지되었던 까닭에 어떻게 모임을 운영하는 것이 좋을지는 아직도 생각하고 있다. 바라기는 내가 운영하든 숟가락을 얹든 묵상모임의 일원이 되고 싶다는 것이다. 묵상이 자의적이기는 하지만, 공동체 내에서 자기확장(스캇 펙 버전)이 일어나기를 바라고 있다. 전도서를 페이스북 타임라인에 계속 올렸던 것도 자기확장의 욕구 때문이었던 것 같은데, 다음 책 함께하실 분 어디 없나요..ㅠㅠ
다음 책에서는 말씀에 침잠해서 내 생각보다 말씀이 앞서면 좋겠다.
(여담인데, 성령님이 성경을 통해 말씀하신다는 것은 믿지만, 성령님이 정확하게 이러이러하게 말씀하셨다고 말하는 것은 왜인지 거부반응이 든다. 정말 끝으로... 오늘도 길어진 서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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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내안에 하나님이 없다 -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신비 그리고 그분과의 인격적인 사귐
필립 얀시 지음, 차성구 옮김 / IVP / 201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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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내 안에 하나님이 없다](필립 얀시/차성구 옮김, IVP)

필립 얀시 책으로는 아마도 네 번째 읽었던 책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것도 이미 13, 14년 전쯤 되었다. 다시 읽게 된 것은 이번 달 독서모임 책이기 때문이다. 지난 달 독서모임 책이었던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만큼 고구마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역시나 고구마였다. 얼른 사이다를 마셔야 할 것 같다(사이다로 낙찰된 책은 [유사 그리스도인]). 아무래도 필립 얀시와 나는 신앙의 결이 무척이나 다른 모양이다. 게다가 얀시를 수용하는 것도 어렵다. 나이가 들수록 고집만 세진다더니 아직 불혹도 아닌데 벌써부터 이러면 어쩌나.

얀시의 머릿속을 따라가기가 쉽지 않다. 오히려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가 더 쉬웠던 것 같다.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는 사례의 나열이기나 했지, 이 책은 사례도 있고, 다른 사람의 말도 있고, 여러 가지가 짬뽕으로 섞여 있다 보니 말하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지 집중해야 해서 힘들었다.
어릴 때 논리야 시리즈를 재미있게 읽었던 기억이 있다. 세 권 중 어느 책이었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데, 이런 내용이 있었다. 세계에서 제일 예쁜 눈, 제일 예쁜 코, 제일 예쁜 입, 이런 식으로 제일 예쁜 부분만 모은 얼굴이 실제로는 제일 예쁜 얼굴이 아니더라는 내용. 이 이야기를 하는 것은, 이 책이 그런 느낌이 들어서였다. 얀시는 똑똑한 사람임에 틀림없고, 책도 많이 읽었고, 경험도 많이 한 사람인데, 그런 것들을 다 끌어모으니 제일 좋은 책이 되지는 않은 것 같은 느낌이라고 해야 할까. 또, 분당우*교회 목사님 설교도 생각났다. 얀시처럼 예민한 감성, 감정에 호소하는 것 같은 서체와 분위기가 많이 닮은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지난 달 독서모임 책에서 얀시에게 실망했기에 이번에도 실망감 가득 안고 반대를 위한 반대를 하는 것이 아닐까, 계속 자기검열을 했다.
이 책은 대략적으로 의심에서 시작해서 회복에 이르기까지의 여정이라고 소개해야 할까. 의심이 믿음으로 가는 출발점임에는 분명하다고 생각한다. 내 신앙이 자란 것은(자랐다고 볼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하나님이 계시는지에 대한 의심이 만연했던 중고등학생 시절 때부터였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66쪽에 재미있는(?) 기도가 나온다. ‘부유한 나라에 사는 그리스도인들은 주로 ‘주님, 이 고난을 내게서 물리쳐 주옵소서‘라고 기도하는 반면, 옥에 갇히고 핍박받는 그리스도인들과 가난한 나라에 사는 그리스도인들은 ‘주여, 이 고난을 견뎌 낼 힘을 주소서!‘라고 기도한다.‘ 이것은 부유한 나라와 핍박받는 그리스도인, 가난한 나라와 상관이 없는 기도라고 생각한다. 내 기도가 바뀐 과정이 이랬다. 처음에는 ‘힘든 일을 겪지 않게 해주세요.‘였고, 그 다음에는 ‘힘든 일에서 벗어나게 해주세요.‘였고, 그 다음은 ‘힘든 일을 잘 버틸 수 있게 해주세요.‘였다. 아마도 그 다음은 ‘내가 매일 기쁘게 순례의 길 행함은‘이 되겠지만 그 단계까지는 아직 한참 남은 것 같다. 어쨌든, 사람은 누구나 고난을 겪고, 그 가운데 믿음으로 이겨나갈 때마다 기도는 바뀌게 되는 것 같다는 게 내 생각이다.
대학생 때 선교단체 간사님이 ‘믿음은 이성적인 것도, 감정적인 것도 아니다.‘고 하신 적이 있다. 그런데 이 책에서는 루이스의 말을 인용하면서 ‘분명 그런 믿음은 논증이 아닌, 감정을 통해 형성된다.‘고 한다. 이 구절을 읽으니 [신앙감정론]을 꼭 읽어야 되겠다는 생각이 든다(곧 복직인데 한 달에 세 권 읽을 수밖에 없고 도대체 언제 읽느냐는 말이다.). 믿음이 감정을 통해 형성된다? 믿음은 은혜에 의해 주어지는 것이 아니었나. 교리를 공부하는 이유는 믿음을 가지게 되었을 때 더 풍성히 하나님과의 교제를 누리기 위함이 아닌가. 음, 루이스의 글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것일 수도 있다. 루이스도 늘 어려웠다. [스크루테이프의 편지]는 마음이 너무 힘들었고, [나니아 연대기]는 소설 속에 녹아든 루이스의 세계관에 경탄하며 읽었고, [순전한 기독교]와 [고통의 문제]는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고 생각하며 읽었다. 맥락을 생각하지 않고 내 마음대로 해석하는 것일까.
이 책에서 의문나는 몇 구절들을 소개하며 내 생각을 써본다. 싸우자는 것은 아니고, 개혁주의적 입장에서 생각한 것임을 밝힌다.

그 교리 가운데 우리가 예상했던 방식대로 효력을 발휘한 것은 하나도 없었다.(15쪽)

자칫 교리가 중요하지 않다고 말하는 것 같아서 언짢았다. 교리와 신학을 가르쳤다면 지금 한국교회가 이렇게까지 바닥을 치고 있을까.

5세기의 신비주의자나 글도 모르는 이민자가 20세기의 신학자보다 더 깊이 하나님을 알 수도 있다.(32쪽)

아무래도 나는 신비주의를 수용할 생각이 없어서, 신비주의에는 거부반응이 든다. 신비주의자들의 확신은 성령님이 주시는 것인가? 그 확신은 성경적인가? 기도할 때 하나님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라고 말하는 경우가 왕왕 있는데, 그 확신은 성령님께서 주신 확신이 분명한가? 개인적인 기도는 은밀하게 해야 하는 것이라면, 굳이 저렇게 하나님이 나에게 말씀하신 것 운운하는 이유는 믿음을 굳게 세우기 위함이 아니라면 왜 하는 걸까?

즉, 지금 현재 감각적으로 느낄 수 있는 증거가 없기 때문에 우리와 관계를 맺고 계신 하나님을 떠올리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과거를 되돌아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자신을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라고 소개하신 것 역시, 택하신 백성들에게 자신과 함께한 과거의 역사를 상기시키고, 그 위대한 조상들 역시 ‘시험‘과 ‘의심‘의 시간을 견뎌야 했다는 사실을 일깨워 주기 위해서였다.(99쪽)

우리가 과거를 되돌아 보아야 하는 이유는 하나님을 떠올리기 위해서인가? 시편에 등장하는 수많은 역사 이야기가 그런 이유였나? 단지 하나님을 찬양하기 위함이 아닐까? 과거를 돌아보면 하나님이 떠오르는 것은 맞지만, 하나님을 떠올리기 위해 과거를 계속 되돌아 본다는 것은 좀 이상한 것 같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라고 말씀하신 것도,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라 산 자의 하나님이기 때문에 그렇게 말씀하셨던 것이 아닌가? 과거의 역사를 상기시키려는 의도로 말씀하셨을 수는 있지만, ‘시험‘과 ‘의심‘의 시간을 견뎠던 위대한 조상들을 생각하게 하기 위한 의도였다는 것은 납득하기 어렵다. 너무 자의적인 해석인 것 같다.

제일 황당했던 주장은 이것이다.

하나님과의 관계도 마찬가지다. 하나님을 기쁘게 해 드리려는 본능적인 열망에 사로잡혀 그분에게 완전히 순종하고 싶다. 그런데 그렇게 할 수 없다. 신앙 생활이란, 때로는 마치 그 모든 것이 사실인 것처럼 행하는 행동으로 이루어진다고 나는 생각한다. 하나님이 나를 무한히 사랑하시며, 선이 악을 정복할 것이고, 결국에는 그 모든 역경을 극복하게 될 거라고 가정하는 것이다. 비록 완전히 확신할 수 없고, 신령한 기운이 내려와 나를 자극하는 일이 없을지라도 말이다. 하나님이 사랑 많은 아버지인 것처럼 여기고, 그들이 정말 하나님의 형상을 지니고 있는 것처럼 이웃들을 대한다.(120쪽)

모든 것이 사실인 것처럼 행하다니, 이 말의 속뜻은 나는 사실이 아니라고 생각하지만 사실로 받아들이겠다라는 것 아닌가? 신랑은 이 부분을 듣더니 ‘세뇌‘, ‘자기기만‘이라고 했다. 믿음은 없지만 그렇게 ‘여긴다‘는 것. 내가 그렇게 살아봐서 안다. 그것은 가식이다. 가짜다. 내가 제일 싫어하는 것이다. 부모님이 목회자이시니 믿음이 있는 양, 사실인 것처럼 여기고 행동했다. 부모님이 그러했듯, 나도 다른 사람의 이목을 신경썼다. 껍데기를 부수면 아무것도 없는데. 그렇게 ‘여기면‘ 믿음이 생기나? 천만의 말씀. 믿음은 은혜로 주어지는 선물이다. 행동이 없기에 믿음이 없다고 여긴다면, 실제로 믿음이 없는 것이 아닐까? 믿음이 없다는 것을 받아들이지 못하면서 ‘여겨서‘ 행동하는 것은 자신을 속이는 것이다. 또 다른 죄를 짓는 것이다. 가차없다고 여길지 모르지만, 가차없어야 바닥까지 갈 수 있고, 그래야 간절해질 수 있다. 믿음은 생기는 것이 아니라 주어지는 것이다. 믿음이 생기기 위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다.

우리는 하나님을 결코 ‘우연히‘ 만날 수 없다. 내가 나서서 찾지 않는 이상, 하나님을 생각나게 하는 가시적인 단서를 우연히 발견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하나님을 찾아나서는 행동, 그같은 추구가 있어야만 우리는 하나님을 만날 수 있다.(121쪽)

내가 하나님을 찾아나서다니, 개혁주의에서는 이렇게 말하지 않는다. 예수님이 인간에게 찾아오신 것이지, 사람이 하나님을 찾아나서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이 부분은 얼핏 보면 우리의 노력으로 하나님을 만날 수 있다고 말하는 것처럼 들린다(이게 바로 알미니안적 발언.). 하지만, 우리가 노력하는 것 같은 그 일들이 실제로는 하나님께서 마음을 주셔서 되는(섭리) 일이라는 것이 개혁주의의 입장이다.
늘 소제목의 처음과 끝에 작은 글씨로 소제목과 연관 있는 글들을 실어놓는데, 155쪽 소제목 밑에 이런 글이 있었다.

하나님은 우리가 당신을 추구할 수 있는 정도의 암시만 주실 뿐
자신을 완전히 발견할 수 있을 정도의 충분한 것을 알려 주시지는 않는다.
거기서 더 나아가면 우리는 자유를 잃게 될 것이나
하나님은 우리의 자유를 귀하게 여기신다.
-론 한센

이 부분을 본 신랑은 이 글이 잘못되었다고 말하며 이렇게 말했다. ‘하나님은 우리가 알려고 해도 알 수 없다. 하나님이 친히 알려주셨다. ‘ 하나님이 암시를 주시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하나님을 완전히 발견하려고 해도 할 수 없다는 말이다. 더 나아간다면 자유를 잃는 것이 아니라, 그만큼 하나님을 알게 되었다고 가정할 때 하나님을 감당할 수 있는 사람이 누가 있을까.

나는 결정적으로 무엇 때문에 하나님 편에 서게 되었는지를 여러 자리에서 말해 왔는데, 그것은 성경도, 기독교 서적도, 누군가의 설교도 아니었다. 내가 하나님께로 돌아선 것은 자연과 클래식 음악, 낭만적인 사랑을 통해 이 세계 속에 누군가의 선함과 은혜가 움직이고 있다는 것을 발견했기 때문이었다.(162쪽)

일반계시와 특별계시로 이 부분을 설명할 수 있을 것 같다. 하나님 편에 선다는 것이 하나님을 믿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라면, 일반계시로도 충분히 하나님을 알 수 있으니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구원의 문제는 특별계시를 통해서만 가능한 문제이기에.. 여기서 얀시가 발견한 하나님은, 성경에서 말하는 하나님이 아닐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연, 클래식 음악, 낭만적인 사랑을 통해 하나님(신)을 만나는 것은 기독교인이 아니라도 가능한 것이니까.

이 외에도 정말 많지만, 시간과 지면 관계상 생략한다. 적으면 적을수록 얀시와 내 신앙의 결이 다르다는 것을 확인할 뿐이었다. 3부의 하나님에 대한 내용도 하나님의 속성에 대해 성경을 너무 자의적으로 해석한 것 같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고, ‘4부 연합 : 전혀 다른 나와 하나님이 하나가 되다‘는 제목만 보더라도 신인합일을 이야기하고 있고(이 말이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말하는 것은 아닐 테니 말이다.), 5부 성장의 3단계도 하나님을 너무 인간에 끼어맞추려고 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6부 회복은 에덴으로의 회복을 말하는 것 같아 계시록의 새 나라와 새 땅이 에덴은 아닐 텐데, 라는 생각이 들어 답답했다. 이번 책도 정말 꾸역꾸역 읽었다.
20대 때에 도움 받았다고 생각했는데, 이 책을 통해 얻게 된 것이 무엇이었는지 모르겠다. 거짓 확신이었을까. 모호하게 설명하며 대충 뭉뚱그려 놓음으로 모든 사람을 수용하는 것처럼 보이는 책은, 나에게는 너무 넓은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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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4-22 02:39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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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4-22 07:10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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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확실의 시대, ‘오직’을 말하다 단단한 기독교 시리즈 7
신호섭 지음 / 좋은씨앗 / 201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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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확실의 시대, ‘오직‘을 말하다](신호섭, 좋은씨앗)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를 꾸역꾸역 읽고 있을 때, 이 책을 생일 선물로 받았다. (생일) 선물로 책을 받기는 매우 오랜만이었다. 얇은 책인데 어쩐지 진도는 잘 나가지 않아서 조금 안달이 났다. 운동을 해서인지 겨울이 와서인지 신랑이 불러주는 찬송가에 아기보다 계속 빨리 잠드는 현상으로 밤에는 도통 책을 읽을 수 없고 아침에는 묵상을 주로 하다보니 묵상을 다 하면 아기가 깨는 일이 발생해서 진도가 통 나가지 않았다. 오늘도 여전히 아기보다 일찍 잠들었지만 새벽에 잠이 깨어 잠이 오지 않는 통에 이 책을 다 읽고 서평을 남긴다.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를 읽으면서 답답함에 괴로워하다가 이 책을 읽으니 고구마 먹다 사이다를 마신 듯 체기가 내려가는 느낌이었다. 궁금해서 앞의 몇 장을 읽다 보니 계속 읽게 되어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와 함께 읽게 되었다. 독서모임 전까지 다 못 읽을까 싶어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를 얼른 다 읽고 이 책을 읽었는데, 독서모임이 아니었다면 이 책을 먼저 다 읽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이 책은 종교개혁의 5대 표제에 대한 책이다. 종교개혁의 5대 표제는 흔히 5 솔라로 말하는데, 오직 믿음, 오직 은혜, 오직 그리스도, 오직 하나님께 영광, 오직 성경이다. 오직 믿음, 오직 하나님께 영광, 오직 성경은 20대 시절 마음에 와 닿아서 라틴어(라틴어식 영어라고 해야 할까..)로 메신저 대화명을 해놓곤 했었다. 그때 5대 표제를 다 알고 있었는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표제를 아는 것만으로 만족했던 시절이었던 것 같다.
이 책은 5 솔라를 정확하게 설명하는 것으로 시작하여(실제로는 3솔라, 1솔리, 1솔루스) 이 책의 순서를 정한 의미(오직 믿음, 오직 은혜, 오직 그리스도, 오직 하나님께 영광, 오직 성경)와 부록(마르틴 루터의 종교개혁 4대 특징)을 저술한 까닭을 서문에서 밝힘으로써 내용이 어떻게 진행될 것인지 한 눈에 볼 수 있도록 했다. 저자는 인식론적 차원에서 오직 믿음을 제일 처음에 두었다고 했고(10쪽), 교의신학에 기초하여 썼다고 했다(13쪽). 교의신학이 무엇인지는 서평 쓰고 나서 더 공부해 보는 것으로 한다(동생한테 물을까.).
5대 표제에 대한 책인 만큼 각 표제가 소제목이 되고, 소제목에 따른 내용이 전개되기 전에 소제목과 관련된 로이드 존스의 강해설교와 칼빈의 기독교 강요 내용 일부가 함께 실려 있어 이해를 도왔다. 그리고 이 책은 하나의 설교집인데, 성경 구절과 5대 표제를 연결지어 설교하신 내용을 책으로 엮은 것 같았다. 교단과 교파에 별 차이가 없어보이는 때를 살고 있는 지금은 교리라는 것이 별 의미가 없어 보일지도 모르지만, 성경을 읽을수록, 신앙생활을 할수록, 교회사가 궁금해지고, 선조들은 왜 이런 신앙고백들을 했으며, 웨스터민스터 대/소요리문답과 도르트신경을 신앙고백의 골자로 하는 교단에 몸담고 있는 사람으로써 내가 믿는 바가 무엇인지는 분명하게 설명할 수 있어야 하고, 그 믿는 바를 행할 수 있어야 하겠다는 생각에 요즘은 교리에 관심을 가지고 있다. 5대 표제를 하나의 교리라고 말할 수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리고 종교개혁 당시 사람들이 만든 표제도 아니지만, 후대 사람들이 이렇게 다섯 개의 표제를 만든 데에는 의미가 있을 것이다.

1. 오직 믿음
첫째, 오직 믿음은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것입니다...(중략)... 바라본다는 것은, 전적으로 믿고 신뢰하며 의지하는 영혼의 행위입니다...(중략)...이런 의미에서 믿음은, 믿는다는 행위가 아니라 믿음의 대상에 집중하는 것입니다.(19쪽)
믿음이 무엇인가, 믿는다는 것이 무엇인가에 대한 명확하게 설명을 해주고 있다. 보통 믿는다고 하면 사람이 어떤 대상을 ‘믿는‘ 행위에 집중할 때가 많다. ‘사람‘에 초점이 가 있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 믿음의 시작은 주님께서 하시고 우리 믿음의 마지막은 우리가 마치는 것이 아니(24쪽)‘라는 저자의 말처럼 믿음의 초점은 사람에게서 하나님께로 옮겨져야 할 것 같다.

2. 오직 은혜
이 부분을 읽으면서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가 갑갑했던 이유를 알았었다. ‘...선한 일이 은혜를 낳지 않고, 도리어 은혜가 선한 일을 낳습니다.‘(48쪽) 이 부분에 대한 내용은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 서평으로 갈음한다.

우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다면, 우리의 노력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은혜가 반드시 열매를 맺게 하실 것입니다.(51쪽)

내 힘으로 열매를 맺으려고 애쓰지 않아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나는 오히려, 이 구절을 읽으며 위로를 얻었다.

3. 오직 그리스도
오직 그리스도의 핵심 내용은 아니지만 어떤 태도를 견지하는 것이 옳은 것인가에 대해 생각할 수 있어서 구절을 가져온다.

여러분은 무슨 이유로 목사를 잘 섬깁니까? 목사가 그리스도의 신실한 종으로, 오직 우리의 유일한 중보자이시며 우리를 위해 대속물로 자신의 몸을 드리신 그리스도를 가장 잘 설교하는 영광스러운 설교자의 직분을 맡았기 때문에 우리는 그를 귀히 여기고 존경해야 합니다.(66쪽)

사실 이 이유로 목사님을 잘 섬기라고 하지는 않으니까. 이때까지 들어왔던 것도 그렇고. 얄팍하게 복 받으려면 목사님을 잘 섬겨야 한다고 하니까 거부반응이 드는 것을.

중보자이시고 대속자이시며 유일한 주님(the Lord)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하면서 그분께 삶을 드리지 않습니다. 예수님을 믿음으로 얻는 죄 사함은 좋아하고, 의롭다 함을 얻는 것을 기뻐하며, ‘오직 예수‘라는 찬양을 부르기 좋아하지만 정작 예수님께 생명을 드리지는 않습니다. 구원은 좋지만 나의 삶은 간섭하지 말라는 것입니다.(67-68쪽)

대학원에서 마지막 학기에 발달심리 강의를 들을 때, 교수님이 자주 하신 말씀이 있다. 그 일을 했을 때 내가 얻는 것이 무엇인지 생각하라는 것. 사람은 자기가 얻는 것이 있는 쪽으로 행동을 하게 되어 있다. 예수님을 믿음으로 죄 사함을 ‘얻는 것‘과 의롭다 함을 ‘얻는 것‘은 좋아하지만 정작 고통을 ‘얻는 것‘은 싫어한다. 그리고 내 것(실제로는 내 것이 아니지만)을 내어주는 것도 싫어한다. 손해보기 싫어하는 마음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도 여실히 드러난다.

4. 오직 하나님께 영광
이 소제목 옆에 있는 로이드 존스 목사님 강해를 읽을 때 갸우뚱했는데, 이 대목 때문이었다. ‘만일 우리가 하나님에 대해 그 어떤 것이라도 진정으로 알게 되었다면, 우리는 담뱃불을 끄고 파이프를 멀리 던져 버렸을 것입니다.‘(70쪽) 실제로 로이드 존스는 골초였다고 하고, 금연을 하게 된 것도 건강상의 이유로 금연을 하게 된 것이라고 신랑이 말해주었었는데 그게 아니었던 건가?
그리고 다음 구절에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는 의미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었다. ‘...영광이 하나님께, 또는 하나님을 향해 영광이 있다는 말입니다. 영광이 하나님께만 있다는 뜻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영광을 하나님께 돌린다는 뜻이 아닙니다. 우리의 행동으로는 하나님을 영화롭게 할 수 없습니다.‘(73쪽) 종종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자는 말을 많이 하고, 사람이 어떻게 해야만, 내가 어떻게 해야만 하나님이 영광스러워지시는 것으로 착각하는 경우가 많은데 교만해도 한참 교만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 영광이란 무엇입니까? 그것은 이미 영광스러우신 하나님의 영광을 인정하고 바울처럼 그것을 찬양하는 것입니다.(75-76쪽)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는 것은 마치 거울처럼 자꾸만 하나님의 영광에 나를 비추어 보고 고쳐 나가는 것입니다.(84쪽)

5. 오직 성경
교회가 하나님의 말씀을 정한 것이 아니라 이미 존재하고 있는 하나님의 말씀이 교회로 하여금 정경을 받아들이게 만든 것입니다.(96쪽)
하나님이 우리에게 말씀하신다는 것은 바로 우리에게 책임을 부과하시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고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책임말입니다.(96-97쪽)

하나님이 말씀하신다는 것의 의미를 잘 생각하지 못했던 것 같다. 단순히 ‘나는 말했으니 너는 지켜!‘가 아니라는 것은 생각해볼 만하다.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하고 있기도 하니까.

부록에 나오는 루터의 종교개혁 4대 특징은 신학의 개혁, 미사(예배)의 개혁, 말씀의 개혁, 많은 이들이 조력한 개혁이라는 네 가지 관점에서 서술하고 있다. 사실 루터는 말만 많이 들었지 실제 어떤 삶을 살았는지는 잘 몰랐다. 루터가 굉장히 다혈질적인 사람이었다는 것도, 루터와 츠빙글리가 무엇으로 논쟁을 했는지도(루터와 츠빙글리가 논쟁을 했는지도 몰랐지만) 이 대목을 보면서 알게 되었다.-성찬의 요소에 그리스도께서 임재하시는지 아닌지의 문제로 분열되었다고 한다. 루터는 공재설(떡과 포도주에 그리스도의 몸이 실재한다)을 말했고, 츠빙글리는 떡과 포도주를 그리스도의 살과 피를 상징하는 기호로만 보았다.
그리고 이어 나오는 추천도서는 5대 표제에 대한 추천도서이다. 5대 표제 전체를 볼 수 있는 추천도서와, 각각의 표제를 볼 수 있는 추천도서가 있었다. 그리고 루터 관련 추천도서도 따로 정리되어 있었다.

듣기만 하고 잘 모르는 분야(교리)여서 서평이 더 길어진 것 같다. 워낙 주옥 같은 말씀이 많기도 했다. 교리 쪽 책을 계속 보다보면 서평이 줄어들지 않을까 싶긴 하다. 이렇게 쓸 수 있는 것도 휴직 중이고 아기가 자고 있으니 가능한 일. 나는 새벽에 왜 잠이 깨었나. 책 읽고 서평 쓰라고 깨어 있나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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놀라운 하나님의 은혜
필립 얀시 지음, 윤종석 옮김 / IVP / 200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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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놀라운 하나님의 은혜](필립 얀시/윤종석, IVP)

한때 필립 얀시를 좋아했던 때가 있었다. 20대 초중반 시절로, 신앙적인 고민을 많이 하던 내게 하나의 이정표를 제시해준 사람이었다. 나 같은 사람이 또 있구나, 하는 안도감이 들었고 위로가 되었었다. 필립 얀시 책은 총 다섯 권을 읽었고([하나님이 나를 외면할 때]-[(내가 그리스도인이 되었을 때) 아무도 말해주지 않았던 것들], [하나님 당신께 실망했습니다], [아, 내 안에 하나님이 없다],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 그때는, 제목만으로도 막혔던 마음이 내려가는 느낌이었다.), 그 중 마지막으로 읽은 책이 이 책,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이다. 그게 어언 12, 13년 전의 일이 되었다. 최근에 다시 읽게 되었는데, 이번 달 독서모임에서 나누고자 하는 책이기 때문이다.

20대 초중반에는 도움을 많이 받은 책임에 분명하지만, 30대 후반을 달려가고 있는 지금은 조금 답답한 구석이 많았다. 내가 너무 비은혜의 사람이라서 이 책을 답답하게 여기는 것일까, 하는 생각도 든다.
총 4부로 이루어진 이 책은 사례 중심으로 서술되어 있다. 1부에서는 은혜에 대해 여러 가지 관점에서 사례를 들어 설명하고, 2부에서는 용서, 3부에서는 율법주의와 은혜, 4부에서는 사회에의 적용이라고 해야 할까. 워낙 사례 중심으로 서술되어 있는 것 때문인지 명확한 것을 좋아하는 나로서는 애매한 것을 잘 수용하지 못하는 경향이 있어 제대로 읽은 건지도 모르겠다.
먼저, 저자가 설명하는 은혜는 너무 추상적이고 포괄적인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요즘 예전에는 이단으로 취급했으나 현대 교회에서는 이단으로 취급하지 않는 알미니안주의에 대해 강력한 거부반응을 보이고 있는데, 저자는 알미니안주의적이라고 오해할 만한 소지의 글을 쓰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교단과 교파의 차이가 무엇이 중요할까, 싶긴 하지만, 현대 교회 내에서 이단으로 취급하고 있지 않으니 알미니안주의적인 사고를 허용해도 괜찮을까, 하는 생각이 계속 들어서 책을 읽는 내내 불편했다. 또, 아무리 교단과 교파를 초월한다고 하더라도 이단격인 천주교에 대해서도 허용하는 듯한 글, 세상적인 관점에서 바라보는 종교에 대해서도 거리낌 없이 적어내려가고 있었다. 내가 지나치게 수용하지 못하는 것일까, 라는 생각이 많이 들어서 괴로웠고, 저자는 어떤 의도에서 썼는지 모르겠지만 모든 것을 포용하려고 하다 보니 ‘진리가 달라도 사랑만 베풀면 된다‘는 식의 사고방식이 드러나는 것 같아 불편했다. 저게 실제 저자의 생각인 것일까, 내가 잘못 이해한 것일까? 저자의 생각이라면, 저 생각은 범신론적으로 흐를 여지가 있고, 포스트모던 사고를 그대로 적용시키고 있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요즘 읽고 있는 책 [불확실의 시대, ‘오직‘을 말하다]에서 이렇게 말한다. ‘...이 순서를 바꾸면 안 됩니다. 선한 일이 은혜를 낳지 않고, 도리어 은혜가 선한 일을 낳습니다.‘(48쪽) 이 책은 기독교인이 왜 정죄만 하고 은혜를 베풀지 못하느냐, 라고 물으면서 행하라(은혜를 베풀어라)고 말하는 듯한데, ‘우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다면, 우리의 노력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은혜가 반드시 열매를 맺게 하실 것입니다.‘([불확실의 시대, ‘오직‘을 말하다], 51쪽)는 개혁주의적 입장을 견지하는 나로서는 저자의 주장을 받아들이기 어렵고 알미니안주의적이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은혜를 받았으면 열매를 맺게 되어 있는 게 아닌가, 열매를 맺지 못하는 사람에게 열매를 맺으라고 하는 것은 독이 든 열매(잘못된 지식)라도 열매만 맺으면 된다고 말하는 것과 무엇이 다른 것인지 나는 잘 모르겠다. 또, 열매를 통해 자기의를 주장할 가능성과, 열매가 자기의에서 기인한 것인지, 하나님의 은혜에서 기인한 것인지 혼동할 수도 있다는 점에서도 저자의 주장은 받아들이기 어렵다. ‘예수님 믿는 다른 사람은 이런 식으로 은혜를 베푸는데 너도 그렇게 해야 하지 않겠어?‘라고 말하는 느낌이다.
사실, 우리나라는 은혜라는 말을 오용, 남용하는 경향이 있기도 하다. 은혜받았다고 말하지만 변화하지 않는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이 아닌 다른 말에 대해서도 좋은 말이면 무조건 은헤받았다, 아멘이라고 화답하는 경향도 있다. 상담, 심리학을 교회 내에 들여와 노력하면 바뀔 수 있다(이것이 바로 알미니안적 태도이다.)고 가르치며, 이 영향은 구원론에도 영향을 끼친다. 교회에서 정치 이야기하는 것을 엄청 싫어하는 것만큼이나, 상담과 심리학을 이용해 사람을 끌어모으고 복음을 싸구려로 만드는 것 같은 행태도 싫어한다. 이토록 상담과 심리학을 경계하는 이유는, 교묘하기 때문이다. 왜 이렇게 열을 내는지는 독서모임을 하기까지 조금 더 생각을 해봐야 할 것 같다.
1부를 읽으면서 내내 생각한 것은, ‘도대체 은혜가 뭐지? 사랑을 베푸는 것인가? 은혜의 반대는 정죄인가?‘ 라는 생각에 혼란스러웠다. 은혜를 행하는 사람들을 나열함으로써 ‘이 많은 게 다 은혜다‘라고 말하고 싶었던 것일까.
그러나 2부에서 내 마음이 심각하게 요동친다. 내가 매우 힘들어하는 ‘용서‘ 파트이다. 생각해보면 나는 하나님 외에 사람에게서 용서받은 경험이 있는지 잘 모르겠다. 물론 잘못을 했을 때 사과는 했지만 용서받아야 할 만큼 그게 큰 잘못이었나,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내가 용서했던 경험은.. 이것도 잘 모르겠다. 그냥 시간이 지나서 아무렇지도 않게 된 문제는 있는데 이것을 용서했다고 말할 수 있을까? 용서의 문제는 늘 어렵다.
다음은 용서 파트에서 마음에 와닿았던 구절들이다.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용서할 수 없는 죄를 용서하는 것을 말한다. 하나님이 우리의 용서받을 수 없는 죄를 사하셨기 때문이다.˝(71쪽)
먼저 용서받은 경험이 있어야 남을 용서할 수 있는 법이다.(101쪽)
˝... 그래도 불의를 용서한다는 건 어딘가 불공평해 보이죠. 용서와 정의 사이에서 진퇴양난이에요.˝(103쪽)
정의와 자비 사이에서 균형을 이루어야 할 저울을 하나님 손에 놓아드리는 것이다.(105쪽)
폴 틸리히는 용서를, 과거를 잊기 위해 과거를 기억하는 것이라고 정의했다.(149쪽)
내가 최선의 모습이 아니라 최악의 모습일 때 하나님의 사랑이 나를 찾아오신 것과 그 놀라운 은혜가 나 같은 죄인을 살리신 것을 나는 안다.(171쪽)
루이스는 내 표현으로 ‘은혜 남용‘이 묵인과 용서를 혼동한 데서 오는 것이라 설명한다. ˝... 용서란 베푸는 편 못지않게 받아들이는 자가 있어야 온전한 것이 된다. 죄를 인정하지 않는 자는 용서를 받아들일 수 없다.˝(213쪽)

하나님은 내가 죄인되었을 때 찾아오셨고, 용서해 주셨다. 내가 죄를 고백하기도 전에 이미 용서해 주셨다. 이 대목이 마음을 울렸다. 사람과의 관계에 있어서는 잘못한 사람이 잘못했다는 것을 인지하고 반성해야 용서를 할 수 있을 것 같은데, 하나님은 그 전에 이미 용서를 해주시다니! 물론 용서를 받았다는 것을 깨닫는 것은 내가 죄인임을 깨달은 이후이겠지만 말이다. 죄의 대가는 죽음이다. 이것을 깊이 생각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용서는 깊이 와닿지 않는다.

그리고 논란이 될 수 있는 알미니안주의적 발언이 있었다.

선한 삶을 사는 최고의 이유는 스스로 선한 삶을 원하는 것이다.(227쪽)

사람의 본성상 어떻게 스스로 선한 삶을 원할 수 있다는 말인가! 스스로 선한 삶을 원할 수는 없다. 하나님의 은혜로 하나님을 간절히 원할 수 있게 된다면 열매를 맺는 은혜도 또한 주시겠지. 이 구절은 헷갈릴 수 있게 할 수 있는 여지가 다분하다.

어쨌거나, 2부에서 말랑말랑해졌을 때를 제외하고는 불편함이 많았던 책이었다. 바른 지식(완전한 지식이 아님)이 바른 열매를 맺게 한다고 믿고 있는데, 물론 100% 바른 지식을 가질 수는 없겠지만, 이렇게까지 허용적이어도 되는 걸까, 라는 생각이 들어서 당황스러웠다. 내가 너무 비은혜의 사람이기에 은혜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걸까, 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정말 그런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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