놀라운 하나님의 은혜
필립 얀시 지음, 윤종석 옮김 / IVP / 2003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필립 얀시/윤종석, IVP)

한때 필립 얀시를 좋아했던 때가 있었다. 20대 초중반 시절로, 신앙적인 고민을 많이 하던 내게 하나의 이정표를 제시해준 사람이었다. 나 같은 사람이 또 있구나, 하는 안도감이 들었고 위로가 되었었다. 필립 얀시 책은 총 다섯 권을 읽었고([하나님이 나를 외면할 때]-[(내가 그리스도인이 되었을 때) 아무도 말해주지 않았던 것들], [하나님 당신께 실망했습니다], [아, 내 안에 하나님이 없다],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 그때는, 제목만으로도 막혔던 마음이 내려가는 느낌이었다.), 그 중 마지막으로 읽은 책이 이 책,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이다. 그게 어언 12, 13년 전의 일이 되었다. 최근에 다시 읽게 되었는데, 이번 달 독서모임에서 나누고자 하는 책이기 때문이다.

20대 초중반에는 도움을 많이 받은 책임에 분명하지만, 30대 후반을 달려가고 있는 지금은 조금 답답한 구석이 많았다. 내가 너무 비은혜의 사람이라서 이 책을 답답하게 여기는 것일까, 하는 생각도 든다.
총 4부로 이루어진 이 책은 사례 중심으로 서술되어 있다. 1부에서는 은혜에 대해 여러 가지 관점에서 사례를 들어 설명하고, 2부에서는 용서, 3부에서는 율법주의와 은혜, 4부에서는 사회에의 적용이라고 해야 할까. 워낙 사례 중심으로 서술되어 있는 것 때문인지 명확한 것을 좋아하는 나로서는 애매한 것을 잘 수용하지 못하는 경향이 있어 제대로 읽은 건지도 모르겠다.
먼저, 저자가 설명하는 은혜는 너무 추상적이고 포괄적인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요즘 예전에는 이단으로 취급했으나 현대 교회에서는 이단으로 취급하지 않는 알미니안주의에 대해 강력한 거부반응을 보이고 있는데, 저자는 알미니안주의적이라고 오해할 만한 소지의 글을 쓰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교단과 교파의 차이가 무엇이 중요할까, 싶긴 하지만, 현대 교회 내에서 이단으로 취급하고 있지 않으니 알미니안주의적인 사고를 허용해도 괜찮을까, 하는 생각이 계속 들어서 책을 읽는 내내 불편했다. 또, 아무리 교단과 교파를 초월한다고 하더라도 이단격인 천주교에 대해서도 허용하는 듯한 글, 세상적인 관점에서 바라보는 종교에 대해서도 거리낌 없이 적어내려가고 있었다. 내가 지나치게 수용하지 못하는 것일까, 라는 생각이 많이 들어서 괴로웠고, 저자는 어떤 의도에서 썼는지 모르겠지만 모든 것을 포용하려고 하다 보니 ‘진리가 달라도 사랑만 베풀면 된다‘는 식의 사고방식이 드러나는 것 같아 불편했다. 저게 실제 저자의 생각인 것일까, 내가 잘못 이해한 것일까? 저자의 생각이라면, 저 생각은 범신론적으로 흐를 여지가 있고, 포스트모던 사고를 그대로 적용시키고 있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요즘 읽고 있는 책 [불확실의 시대, ‘오직‘을 말하다]에서 이렇게 말한다. ‘...이 순서를 바꾸면 안 됩니다. 선한 일이 은혜를 낳지 않고, 도리어 은혜가 선한 일을 낳습니다.‘(48쪽) 이 책은 기독교인이 왜 정죄만 하고 은혜를 베풀지 못하느냐, 라고 물으면서 행하라(은혜를 베풀어라)고 말하는 듯한데, ‘우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다면, 우리의 노력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은혜가 반드시 열매를 맺게 하실 것입니다.‘([불확실의 시대, ‘오직‘을 말하다], 51쪽)는 개혁주의적 입장을 견지하는 나로서는 저자의 주장을 받아들이기 어렵고 알미니안주의적이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은혜를 받았으면 열매를 맺게 되어 있는 게 아닌가, 열매를 맺지 못하는 사람에게 열매를 맺으라고 하는 것은 독이 든 열매(잘못된 지식)라도 열매만 맺으면 된다고 말하는 것과 무엇이 다른 것인지 나는 잘 모르겠다. 또, 열매를 통해 자기의를 주장할 가능성과, 열매가 자기의에서 기인한 것인지, 하나님의 은혜에서 기인한 것인지 혼동할 수도 있다는 점에서도 저자의 주장은 받아들이기 어렵다. ‘예수님 믿는 다른 사람은 이런 식으로 은혜를 베푸는데 너도 그렇게 해야 하지 않겠어?‘라고 말하는 느낌이다.
사실, 우리나라는 은혜라는 말을 오용, 남용하는 경향이 있기도 하다. 은혜받았다고 말하지만 변화하지 않는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이 아닌 다른 말에 대해서도 좋은 말이면 무조건 은헤받았다, 아멘이라고 화답하는 경향도 있다. 상담, 심리학을 교회 내에 들여와 노력하면 바뀔 수 있다(이것이 바로 알미니안적 태도이다.)고 가르치며, 이 영향은 구원론에도 영향을 끼친다. 교회에서 정치 이야기하는 것을 엄청 싫어하는 것만큼이나, 상담과 심리학을 이용해 사람을 끌어모으고 복음을 싸구려로 만드는 것 같은 행태도 싫어한다. 이토록 상담과 심리학을 경계하는 이유는, 교묘하기 때문이다. 왜 이렇게 열을 내는지는 독서모임을 하기까지 조금 더 생각을 해봐야 할 것 같다.
1부를 읽으면서 내내 생각한 것은, ‘도대체 은혜가 뭐지? 사랑을 베푸는 것인가? 은혜의 반대는 정죄인가?‘ 라는 생각에 혼란스러웠다. 은혜를 행하는 사람들을 나열함으로써 ‘이 많은 게 다 은혜다‘라고 말하고 싶었던 것일까.
그러나 2부에서 내 마음이 심각하게 요동친다. 내가 매우 힘들어하는 ‘용서‘ 파트이다. 생각해보면 나는 하나님 외에 사람에게서 용서받은 경험이 있는지 잘 모르겠다. 물론 잘못을 했을 때 사과는 했지만 용서받아야 할 만큼 그게 큰 잘못이었나,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내가 용서했던 경험은.. 이것도 잘 모르겠다. 그냥 시간이 지나서 아무렇지도 않게 된 문제는 있는데 이것을 용서했다고 말할 수 있을까? 용서의 문제는 늘 어렵다.
다음은 용서 파트에서 마음에 와닿았던 구절들이다.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용서할 수 없는 죄를 용서하는 것을 말한다. 하나님이 우리의 용서받을 수 없는 죄를 사하셨기 때문이다.˝(71쪽)
먼저 용서받은 경험이 있어야 남을 용서할 수 있는 법이다.(101쪽)
˝... 그래도 불의를 용서한다는 건 어딘가 불공평해 보이죠. 용서와 정의 사이에서 진퇴양난이에요.˝(103쪽)
정의와 자비 사이에서 균형을 이루어야 할 저울을 하나님 손에 놓아드리는 것이다.(105쪽)
폴 틸리히는 용서를, 과거를 잊기 위해 과거를 기억하는 것이라고 정의했다.(149쪽)
내가 최선의 모습이 아니라 최악의 모습일 때 하나님의 사랑이 나를 찾아오신 것과 그 놀라운 은혜가 나 같은 죄인을 살리신 것을 나는 안다.(171쪽)
루이스는 내 표현으로 ‘은혜 남용‘이 묵인과 용서를 혼동한 데서 오는 것이라 설명한다. ˝... 용서란 베푸는 편 못지않게 받아들이는 자가 있어야 온전한 것이 된다. 죄를 인정하지 않는 자는 용서를 받아들일 수 없다.˝(213쪽)

하나님은 내가 죄인되었을 때 찾아오셨고, 용서해 주셨다. 내가 죄를 고백하기도 전에 이미 용서해 주셨다. 이 대목이 마음을 울렸다. 사람과의 관계에 있어서는 잘못한 사람이 잘못했다는 것을 인지하고 반성해야 용서를 할 수 있을 것 같은데, 하나님은 그 전에 이미 용서를 해주시다니! 물론 용서를 받았다는 것을 깨닫는 것은 내가 죄인임을 깨달은 이후이겠지만 말이다. 죄의 대가는 죽음이다. 이것을 깊이 생각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용서는 깊이 와닿지 않는다.

그리고 논란이 될 수 있는 알미니안주의적 발언이 있었다.

선한 삶을 사는 최고의 이유는 스스로 선한 삶을 원하는 것이다.(227쪽)

사람의 본성상 어떻게 스스로 선한 삶을 원할 수 있다는 말인가! 스스로 선한 삶을 원할 수는 없다. 하나님의 은혜로 하나님을 간절히 원할 수 있게 된다면 열매를 맺는 은혜도 또한 주시겠지. 이 구절은 헷갈릴 수 있게 할 수 있는 여지가 다분하다.

어쨌거나, 2부에서 말랑말랑해졌을 때를 제외하고는 불편함이 많았던 책이었다. 바른 지식(완전한 지식이 아님)이 바른 열매를 맺게 한다고 믿고 있는데, 물론 100% 바른 지식을 가질 수는 없겠지만, 이렇게까지 허용적이어도 되는 걸까, 라는 생각이 들어서 당황스러웠다. 내가 너무 비은혜의 사람이기에 은혜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걸까, 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정말 그런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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