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의 영광
죤 오웬 지음, 서문강 옮김 / 지평서원 / 201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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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의 영광](존 오웬/서문강 옮김, 지평서원)

개혁주의 성경공부 모임에서 읽은 책이다. 다 읽은지는 몇 주 되었는데, 이 일 저 일 하다 보니 이제야 서평을 남기게 되었다.
이 책은 앞서 읽은 존 오웬의 책 [신자 안에 내재하는 죄]보다 훨씬 어렵게 다가왔다. 그것은 아마 이 책에서 설명하는 다음과 같은 이유에서일 것이다. ‘그리스도의 영광을 생각하는 것이 우리에게 피곤하게 느껴지는 것은, 우리가 영적이지 못하거나 육신에 속한 사람이라서 우리의 생각과 정서가 늘 다른 것들을 즐거워하는 데 익숙하기 때문이 아닐까? 그것이 바로 우리의 마음을 복음의 위대한 비밀을 생각하는 데 기울이지 않거나 기울일 능력이 없는 주된 이유다.‘(86쪽)
그리스도의 영광에 대해서 얼마나 자주 생각했나? 얼마나 자주 묵상하고 있는가? 이 책을 읽으면서 나는 그리스도의 영광에 대해 거의 생각하지 않고 있음을 알았다. 대학생 때 이후로 영적 침체에 자주 빠졌던 까닭도 그리스도의 영광을 묵상하지 않아서였던 것 같다는 생각이 드는 건 그냥 내 생각일 뿐일까.
교회에서는 그리스도를 닮아야 한다고 말한다. 하지만, 그리스도를 닮는 것이 단지 선한 행동을 하는 것일까?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과 믿지 않는 사람을 구분하려는 것도 선한 행동으로는 (열매로 안다고 하지만) 구분할 수 없다고 여겼다. 이 책에서는 이렇게 말한다.

그리스도의 행동을 단순히 모방하는 것만으로는 ‘그리스도를 닮아 가는‘ 사람이 될 수 없다. 사람들을 그리스도의 형상으로 변화시키는 능력을 수반하는 그리스도의 영광을 보거나 그 영광을 직관적으로 느끼지 않고서는 그런 변화를 가져올 수 없다.(85쪽)

교회에서는 이렇게 명확하게 설명하지 않는다. 그게 지금으로서는 참 아쉽다. 단순히 선한 행동을 하는 것으로, 예수님을 믿는다고 말하는 사람들과 교제하는 것으로 복음의 열매를 나타낸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고 말할 수 없을 것이다. 어쨌든, 정답은 내가 그리스도의 영광을 묵상하지 않음에 있다는 것을 알았다. 맘몬을 따르지 않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따르고 있는 게 아닐까. 하나님과 맘몬은 동시에 섬길 수 없고, 그리스도의 영광을 묵상하면서 맘몬을 따를 수는 없을 것이다. 맘몬을 따르는 것은 내가 육신에 속한 사람이라는 증거가 아닐까? 그렇기에 [유사 그리스도인]에서 유사 그리스도인에 해당하는 항목이 많은 것처럼 여겨졌는지도 모르겠다. 많은 사람들이 이 세상에서는 맘몬을 따르며 내세에서는 구원을 얻고 싶어 한다. 그리고 그런 사람들이 전도를 한다. 우리의 ‘구원받음‘이 주목적인 전도를 한다. 그게 너무 싫다. ‘많은 사람들이 이 세상에서 사는 동안에는 믿음으로 그리스도의 영광을 전혀 바라보지도 않으면서 하늘에서 그리스도의 영광을 보기를 소망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런 식의 태도는 자신을 속이는 상상에 불과한 것이다.‘(53쪽)
‘그리스도만이 하나님이 사랑이심을 탁월하게 나타내신다.‘(82쪽) 하나님이 사랑이시라고 말하면서 왜 그리스도의 영광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는 걸까. 우리의 ‘구원받음‘에만 초점을 두고 예수님이 하신 일(직무)과 그의 인격(인성과 신성)에 대한 묵상은 뒷전이다([밥심으로 사는 나라]에서 ‘복음은 예수님이 왕이시라는 메시지입니다.‘라고 했다.). 설교 본문은 성경이지만, 성경을 풀어서 말씀하시는 것보다 세상에서, 교회에서 어떻게 선한 영향력을 끼쳐야 하는지 말씀하시는 내용이 훨씬 많다. 사실은 그래서 기대가 안 되고 가슴이 꽉 막힌 것 같은 기분이 들 때가 많다.

그리스도의 영광을 보지 않고서도 그리스도인이 실천해야 할 일들과 거룩한 도덕적 의무들을 이행할 수 있다고 말하는 사람은, 사실상 그리스도도 알지 못하고 복음도 모르며, 교회가 가진 보편적인 믿음도 모르는 사람이다. 그렇다. 다른 모든 그리스도인의 의무들이 그 뿌리에서 나온다.(89쪽)

성경을 읽지 않으면서 그리스도의 영광을 묵상하고 선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가? 절대 아니라고 생각한다. 교회에서는 연말 시상으로 성경 다독상을 주는 것으로 끝낼 것이 아니라 계속해서 성경을 읽으라고 권면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리스도의 영광을 들여다볼 수 있는 이 유일한 거울을 잃지 않기 위하여 우리는 우리에게서 성경을 빼앗아 가거나 날마다 성경을 부지런히 연구하지 못하도록 낙담시키는 모든 것에 대항하여 성경을 지키도록 부단히 애써야 한다.‘(114쪽)
그리고 이 책에서는 영적 침체에 대해서도 어떻게 해야 하는지 잘 서술하고 있다. 그 영적 침체라는 것이 ‘때때로 우리가 부지런히 그리스도를 찾는데도 그분의 음성을 들을 수 없거나 그분의 얼굴을 보지 못할 수도 있다‘(117쪽)는 것이라면 말이다. 부지런히 찾는데도 그리스도를 만날 수 없을 때가 있다는 게 위로가 되었다. 부지런히 찾지 않아서 그리스도를 만나지 못하는 경우만 있는 것은 아니라는 생각에서였다. 적고 보니 참 부끄럽다. ‘이런 경우에 우리가 취해야 할 마땅한 도리는 기도와 묵상과 애통과 성경 읽기와 말씀 듣기, 그리고 하나님께 개인적으로든 공적으로든 간에 예배 드릴 때에 주어지는 모든 규례를 지속적으로 유지하면서 사모하는 심정을 가지는 것이다. 그러면서 부지런히 순종해야 한다. 그리스도께서 다시 예전처럼 자신에게로 돌아와 계신 것을 발견하기까지 그 일을 해야 한다.‘(118~119쪽) 부지런히 찾음에도 그리스도를 만날 수 없을 때가 있는 것을 이 책에서는 믿음의 속성 때문이라고 보는 것 같다. ‘그러나 우리는 이 세상에 사는 동안 그리스도의 영광을 부단하고 분명하게 그리고 줄기차게 보지는 못한다. 우리가 ‘보는 것으로 하지 않고 믿음으로 하기‘ 때문이다.‘(254쪽) ‘여기에는 두 가지 다른 요인이 있다. 하나는, 믿음 자체의 성질 때문이다. 직접 눈으로 보는 것과 비교할 때 믿음으로 보는 것은 이 탁월한 영광을 직접 바라보고 온전하게 이해할 수 없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믿음의 눈앞에 제시되는 그리스도의 영광이 그 실체 자체가 아니라 희미한 거울에 비쳐서 나타나는 것 같은 형상일 뿐이기 때문이다.‘(273쪽)

정말 그리스도의 영광을 갈구하고 있는가? ‘나‘의 구원받음에만 초점을 두고 있는 건 아닐까? 세상 일의 수많은 힘든 일을 겪으면서 ‘위로‘와 관련된 찬양을 원하는 것은 얕디 얕은 신앙을 유지하게 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세상 일은 힘든 것이 당연하다. 그 힘든 일은 믿는 자에게도, 믿지 않는 자에게도 동일하게 일어난다. 힘든 일을 겪으면서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도 동일하게 필요한 ‘위로‘를 하나님이 주시는 ‘위로‘로 둔갑시켜 찬양을 부르는 것이 과연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일까? 힘든 일 가운데에서도 하나님을 찾으며 하나님과의 깊은 교제로 들어가도록 북돋는 것이 교회의 역할 아닐까? 신앙의 선배들이 당한 힘든 일은 우리가 겪는 세상 일의 고단함의 수준을 뛰어넘는 것일 것이다. 세상 일의 고단함을 무시하는 것이 아니라, 그 고단함은 믿는 자에게나 믿지 않는 자에게나 동일하게 임하는 것이기에 믿는 자라면 믿음의 행위를 보여야 한다는 것이다(내가 그렇게 할 수 있다는 말은 절대 아니다.). ‘오직 그 영광이 우리가 이 모든 일을 쉽고도 즐겁게 여기도록 만들어 줄 것이다. 심지어 죽음 자체까지도 말이다. 왜냐하면 죽음이 우리를 그리스도의 충만한 영광을 누리도록 인도하는 방편이기 때문이다.‘(41쪽)

이 책은 그리스도의 영광을 묵상하는 것이 무엇인지, 그리고 왜 그리스도의 영광에 대해서 묵상해야 하는지 매우 세세하고 자세하게 기술하고 있다. 성경의 주제가 우리의 삶이 아니라 예수님이시라고 고백하는 개혁신앙을 가진 사람이라면 꼭 정독을 권한다. 존 오웬의 기도문으로 서평을 마친다.

˝내 영혼이 주의 영광을 바르게 이해하면서 살 수 있게 해주시기를 바라나이다. 저로 하여금 그것을 믿는 믿음 안에서 죽게 하옵시고, 그 영광의 아름다움과 충만함 속에 영원히 거하기 위하여 지금 이 세상에 살 때에도 그 영광으로 감격하게 하옵소서.˝(212~21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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밥심으로 사는 나라 - 기도와 삶의 부흥을 이끄는 주기도 강해
박영돈 지음 / IVP / 202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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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밥심으로 사는 나라](박영돈, IVP)

2월부터 읽은 책인데, 5개월만에 다 읽었다. 중간 중간에 읽어야 할 책들이 있다 보니(성서교육회 독서모임, 개혁주의 성경공부에서 읽는 책) 집중해서 읽기 어려웠다. 큰 그림을 그리지 못한 느낌이 든다.

박영돈 교수님은, 지금은 은퇴하셨지만 고신대학원에서 교수님으로 재직하셨던 분이다. 페친 중 한 명이 박영돈 교수님 글에 가끔 ‘좋아요‘를 누르는 것을 보고 박영돈 교수님 글을 접하게 되었다. 그리고 유튜브에 교수님 설교(?)를 편집한 영상을 보기도 해서 교수님이 어떻게 책을 쓰셨는지 궁금했다. [성경으로 풀어낸 사도신경] 책을 보고 살짝 충격을 받기도 해서 고신대학원에서 강의하신 분이니 주기도문 강해를 [성경으로 풀어낸 사도신경]처럼 하셨을 것 같다는 기대감으로 책을 읽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내 기대가 너무 컸던 것 같다. 아니, 내가 기대하던 방향과 달랐던 것 같다. 내 생각과 같은 생각의 책을 찾았던 것은 아니다. [성경으로 풀어낸 사도신경]처럼 풀어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을 뿐이다. 하지만 밑줄 그어야 할 부분이 많았고, 띠지를 붙여서 다시 한 번 더 보아야 할 부분도 많았다.
주기도문은 산상수훈 중 가운데에 위치해 있다. 그래서 매우 중요한 기도라는 것은 알고 있지만, 깊이 생각해본 적은 없기 때문에 이 책을 통해 깊이 깨달았으면 좋겠다는 바람도 있었다. 교회에서 적어도 일주일에 한 번은 주기도문을 외우지만 이방인처럼 중언부언 외고 있었던 것은 아닌지 생각하고 있다. 따로 묵상하는 시간을 내야 할 것 같다.
이 책은 주기도문 설교집이다. 부제는 ‘기도와 삶의 부흥을 이끄는 주기도 강해‘이다. 어렸을 적 교회 목사님이 소위 ‘부흥사‘로 불리던 분이셨다. 2000년쯤 ‘부흥‘이란 곡도 나오면서 교회의 양적 부흥을 말하는 설교자도 많았다(이 곡의 의도가 그러하다는 뜻은 아니다.). 그래서인지 ‘부흥‘에 대해 말하면 색안경을 끼게 된다.

주기도문의 첫 부분,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로 시작한다. 아버지라는 데에서 묵상할 부분이 많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이 가진 육신의 아버지에 대한 이미지는 그리 긍정적이지 않습니다. ...(중략)... 하나님의 아버지 되심을 인간 아버지를 통해 이해하는 데는 심각한 한계가 있습니다. 오히려 우리는 하나님의 아버지 되심에서 우리가 어떤 아버지가 되어야 하는지를 배우고 도전받을 필요가 있습니다.(35쪽)

따라서 하나님을 아빠라고 부르는 것은 복음에 대한 믿음의 반응입니다. 주님이 우리를 위해 행하신 놀라운 일과 그로 인해 우리에게 주어진 은혜와 특권에 대한 감사와 찬양의 반응입니다. 무엇을 얻어내기 위해서가 아니라, 예수님의 구속으로 하나님이 우리 아버지가 되어 주신 놀라운 은혜를 찬양하기 위해 아빠를 부르는 것입니다.(42~43쪽)

하나님이 자신을 아버지라고 부르라고 명하신다는 것은, 우리의 호출에 반드시 응하신다는 약속에 스스로 매이신다는 뜻입니다.(57쪽)

하나님을 아버지, 아빠라고 부르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에 대해서도 깊이 생각해 보지 않았다. 육신적인 아버지의 의미를 넘어서서 생각하지 못했던 것 같다. 나에게 아버지란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지 곰곰이 생각해봐야겠다.

예전에 한신대학교(기장)에서 학생회장이었던가, ‘민중의 이름으로‘ 기도한다고 했다가 논란이 되었던 적이 있다. 다음 인용이 그 논란에 대한 개혁주의적 답이 될 수 있지 않을까 한다.

우리가 ‘아버지‘를 부르며 기도한다는 것은, 예수님의 공로를 힘입어 예수님과 같은 아들의 자리에 서서 아들의 특권을 가지고 기도한다는 뜻입니다. 그것이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한다는 말의 의미입니다.(74쪽)

요즘 한국교회의 답답한 점 가운데 하나, 복음이 구원으로 끝난다고 여기는 것에 대해서는(이런 생각을 하게 된 대표적인 질문이 ‘오늘 밤 죽어도 천국에 갈 수 있습니까?‘라고 생각한다.) 책에서 이렇게 말한다.-두 번째 간구 ‘나라가 임하시고‘에 있는 내용이다.

복음이 무엇입니까? 내가 구원받는 것입니까? 내가 천국에 가는 것입니까? 복음을 그런 차원에서만 이해하면 결코 하나님 나라에 대한 온전한 기도를 드릴 수 없습니다. 복음은 예수님이 왕이시라는 메시지입니다.(105쪽)

다음 문단은 참 위로가 되었다.

우리의 미미한 기도를 그분의 나라를 앞당기고 확장해 나가는 중요한 방편으로 택하신 이유는 우리를 자신과 함께 왕적 권위를 행사하는 자녀로 대우하시기 위해서입니다. ...(중략)... 기도는 우리가 예수님과 함께 하늘에 앉게 된 것을 구체적으로 체험하는 일입니다. 예수님과 함께 이 세상을 다스리는 특권을 누리는 것입니다.(108~109쪽)

다음은 기도가 어떤 것인지에 대해 더 생각해야 했던 대목이었다. 요즘 기도를 쉬는 죄를 범하고 있어서 사실상 할 말은 없지만, 공적 기도의 자리에 나오는 것을 (스스로) 대단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은 것은 이런 이유 때문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기도는 늘 어렵다.-세 번째 간구,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에 있는 내용이다.

이렇게 기도는 삼위 하나님과의 연합 및 교제인 동시에, 하나님과 함께 그 뜻을 이 땅에 이루어 가는 동역이기도 합니다. 사귐과 동역은 사실상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습니다. 기도를 하나님과의 사귐으로만 생각하면 그분의 임재를 홀로 누리는 영적 이기주의에 빠질 수 있습니다. 반면에 기도를 하나님과의 동역으로만 여기면 기도가 고역스러운 의무가 되고 맙니다. 교회와 세상을 위한 봉사와 사역으로서의 기도는 매우 힘든 것이지만, 하나님과의 깊은 사귐에서 오는 영적 즐거움과 평강이 이 수고에 활력을 불어넣어 줍니다. 그래서 기도가 힘들지만 즐거운 행위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163~164쪽)

그리고 다섯 번째 간구,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시고‘에서 ‘여러분의 심령이 마지막으로 하나님의 용서를 맛본 때는 언제입니까? 언제 마지막으로 회개하셨습니까?‘(209쪽)는 너무 찔렸고, ‘회개할 것이 없을수록 회개가 깊어진다‘(211쪽)는 소제목과 ‘회개할 것이 많을수록 회개가 없다‘(213쪽)는 소제목도 통찰의 문구라 ‘아, 그렇지.‘ 하면서 읽었다.우리가 용서해야만 우리 죄를 용서해 주시는 것인가에 대해서도 언급하는데, 그렇지 않다고 말한다.

용서의 비밀은 그리스도와의 연합에 있습니다. 용서란 인간에게 불가능한 일입니다. 오직 우리 안에 거하시는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는 용서할 수 있습니다. ...(중략)... 하나님의 용서가 반드시 우리의 용서로 열매 맺고 계속 이어져야 한다는 바로 그 의미에서, 주님은 우리의 죄사함이 우리가 다른 이를 용서하는 데 달려 있는 것처럼 말씀하신 것입니다.(219쪽)

여섯 번째 간구,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고 다만 악에서 구하소서‘에서 주목했던 부분은 다음 내용이었다.

가난보다 부의 시험을 이기기가 더 어렵습니다. 낮아졌을 때보다 높아졌을 때 교만의 시험에 빠지기 쉽고, 무명이었을 때보다 유명해졌을 때 인기와 명성의 유혹에 쓰러지기 쉽습니다.(243쪽)

국회의원들이 이해하지 못할 정도로 이상한 행동을 하는 것도, 정상에 있는 것처럼 보이는 목회자들이 쉽게 유혹에 빠지는 것도, 다 이와 같은 이유 때문이 아닐까. 만물보다 더 부패한 것이 사람의 마음이라 하였다. 나이가 들수록 (경제력을 가지게 되므로) 가난하기보다 부하게 되고, 높아지는 위치에 있을 확률이 높다(교사의 경우에는 부장이나 관리자로 볼 수 있겠다.). 그만큼 쓰러지기 쉽다는 말일 것이다. 나이가 들면, 어릴 때보다 판단력이 높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유혹거리는 그만큼 더 늘어나 있다. 여전히 기도할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그 어떤 것도 우리에게 시험이 되지 않도록 항상 깨어서 기도해야 합니다.‘(249쪽)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시험을 주시는 것은 ‘우리 안에 믿을 만한 것이 있어서가 아니라, 우리가 자신의 무력함을 알고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지하며 기도할 것을 아시기 때문‘(250쪽)이다. ‘만왕의 왕이 드리는 기도를 함께 드리는 우리는 얼마나 영광스러운 특권을 지닌 사람들입니까?‘(295쪽)

기도와 찬양을 드리는 태도에 대해 언급하신 내용을 인용하며 서평을 마친다.

기도와 찬양은 감정과 감동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바라보는 관점으로 하는 것입니다. 미래에 온전히 나타날 하나님 나라와 영광을 바라보며 그 관점에서 우리의 고통스러운 현실을 해석할 때만, 낙심되는 상황에서도 비로소 찬양할 수 있게 됩니다.(28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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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자 안에 내재하는 죄 존 오웬 전집 1
존 오웬 지음, 김귀탁 옮김 / 부흥과개혁사 / 200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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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자 안에 내재하는 죄](존 오웬/김귀탁 옮김, 부흥과개혁사)

개혁주의 성경공부 모임에서 읽은 세 번째 책이다. 예장 고신과 합동에서 개혁주의를 표방한다고 하지만, 실제로 이 책과 같은 내용 들어본 적 없고, 자세하게 가르치지도 않는다. 현재 고신 교회를 다니고 있지만, 합동과 다른 것이 무엇인지 잘 모르겠다. 요즘 전도서 영어성경 필사를 하고 있는데, 전도서의 영어명이 교회라는 뜻이고, 라틴어 에클레시아라는 말은 드물게 교사로도 사용된다고 하니, 교회는 가르치는 곳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아무튼, 책의 내용으로 돌아와서, 이 책이 시작되기 전에 김남준목사님이 쓰신 [존 오웬의 {신자 안에 내재하는 죄} 해제]라는 소논문(?)이 실려 있는데, 나는 단순히 이 책을 요약 정리한 것일까, 하고 생각했더니(이 책 다 읽은 후에 읽었다.) 존 오웬의 신학적 기반이 되는 사상들을 정리한 내용이었다(이 책의 내용을 철학적으로(?) 풀어내시기도 했다.). 김남준목사님이 존 오웬 좋아하신다(?)는 것도 개혁주의 성경공부의 리더(?)님께서 말씀해주셔서 알게 된 것이다. 대학원 다닐 때 김남준목사님 말씀이 좋아서 열린교회에도 갔던 적이 있었는데, 우리나라에는 청교도 신학을 연구하시는 분이 많이 없을까, 싶은 생각도 든다. 그만큼 개혁주의와 조직신학에 대해 심도 있게 가르치시는 분들을 만난 적이 없다.-하지만 열린교회의 운영(?) 방식이 마음에 든다는 것은 아니다.

이 책은 죄에 대한 성경 본문(롬 7:21)에서부터 시작한다. 롬 7:21에서 도출한 것은 네 가지 사실인데, 1. 죄는 곧 법이다(죄의 법의 이중적 의미는 죄의 존재와 본질, 죄의 힘과 효능이다.). 2. 죄의 법은 신자들 안에서 발견된다. 3. 신자들의 의지의 경향적인 성향은 선을 행하기 원하는 것이다. 4. 신자들 안에 악이 존재한다는 것이다(1부).
이 책에서는 죄의 효능과 힘에 초점을 두고 있는데(3부), 특히 신자 안에 내재하는 죄의 효능과 힘에 초점을 두고 있다. 처음에 죄의 법의 특징에 대해 다루고, 그 다음 내재하는 죄가 구체적으로 어떻게 작용하는지를 다룬다. 여기서 죄의 법의 주체는 마음이라고 이야기하는데, 마음이라고 하면 추상적으로 생각하기 쉬우나, 오웬은 그리스 철학자들의 영향을 받아 지성, 의지, 정서, 양심의 기능을 묶어 마음이라고 한다고 정의한다. 오히려 ‘마음이 지성, 의지, 정서, 양심의 기능을 묶은 것이다.‘라고 정의하니까 마음에 대해 한결 이해가 쉬워지는 느낌이었다. 특별한 반론이 없는 한, 오웬이 말하는 마음의 정의(?)를 그대로 받아들일 것 같다(내가 생각하기에 제일 합리적이기도 하다.). 그리고 이어 마음의 속성, 내재하는 죄의 속성을 다루는데, 마음의 속성을 다룰 때 내가 마음에 대해 과대평가, 혹은 과소평가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마음이 나를 기만할 때가 많은데, 나는 그 사실을 늘 흐지부지 넘어가면서 다음에 잘하면 된다고 합리화했다. 물론, 그 다음에도 스스로 기만하는 것은 되풀이된다. 만물보다 심히 부패한 것이 마음이라고 하신 그 말씀을 진리로 받아들이지 않았던 것이다. 늘 마음에 자리잡은(?) 죄의 유혹을 뿌리치지 못하고 다음을 기약한다. 만물보다 심히 부패한 것을 말씀보다 더 믿었다는 깨달음이 생기자 신앙생활을 이렇게 느슨하게 해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죄의 행위와 활동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죄가 싸운다고 말하는 데에도 조금 정신이 들었다. -죄는 싸운다. 내가 지치고 싸움에 패하도록 물어지고 끈덕지게 싸운다. 한 번 싸워서 이긴 것처럼 보일 때 끝내면 되는 싸움이 아니다.
죄가 어떻게 속임으로 역사하는가에 대해서 크게 5단계로 살펴보는데, 140쪽에 잘 나와 있다. 첫 번째 단계는 지성을 끌어내리고, 두 번째 단계는 정서가 미혹되고, 세 번째 단계는 죄를 잉태시키고(의지와 관련), 네 번째 단계는 실제로 수행되어 죄를 낳고, 다섯 번째 단계는 죄가 장성하는 것이다. 오웬은 지성이 어떻게 끌어내려지는지에 대해 꽤 많은 분량을 할애하고 있다. 지성이 한 번 끌어내려지면 그 뒤는 걷잡을 수 없기 때문인 것 같은데, 이 부분을 보고 현대 상담치료의 하나인 인지행동치료가 생각이 났다. 인지행동치료에서 생각이 정서와 행동을 바꾼다고 주장하기 때문이다. 내가 한동안 좋아했던 로렌스 크랩이 인지치료를 지지하기도 했다(여기에 대해서 할 말은 많지만 다음으로 넘긴다.).
오웬에 의하면 죄를 파괴하는 데 적합하고 유용한 수단은 묵상과 기도이다(158쪽). 내가 묵상과 기도를 게을리하는 데에는 죄의 힘을 크게 여기지 않기 때문은 아닌지 생각해 보게 되었다. 실제로, 나는 마음도 과대평가, 혹은 과소평가했지만, 죄도 과소평가하고 있었다. 오웬이 이렇게 하나씩 짚어주니, 속임을 당하면서도 마음의 일시적 즐거움을 위해 일부러 속임을 당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하는 의구심이 생기기도 했다.
3부에서 신자 안에 내재하는 죄를 주의 깊게 다룬 후 4부에서는 일반적인 죄의 효능과 힘에 대해 다룬다.

이 책의 내용은 이 말이 그 말 같고, 그 말이 이 말 같은 부분이 상당히 많아서, 몇 번이나 문장을 다시 읽어야 했다. 가볍게 읽을 책은 아니지만, 죄의 문제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반드시 읽어야 할 책이라고 생각한다. 시간이 허락한다면, 책 내용을 정리하고 싶은 욕심이 있다. 이 책을 읽고 생각한 바가 많아서 적고 싶은 이야기는 많지만, 다 적기에는 너무 길어질 것 같아 다 못 적어 아쉽다. 위에 쓴 서평도 생각이 정리되지 않은 상태에서 쓰려고 하니 내 생각을 제대로 표현하지 못한 것 같아 안타깝다. 끝으로, 이 책으로 독서모임을 하면 참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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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을 아는 지식 IVP 모던 클래식스 7
제임스 패커 지음, 정옥배 옮김 / IVP / 2008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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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을 아는 지식](제임스 패커/정옥배 옮김,IVP)

이 책은 수 년 전, 거제요회에서 함께 읽었던 책이다. 그때 끝까지 다 읽지는 않았고, 뒤에 다섯 챕터 정도를 안 읽었다가 이번에 개혁주의 성경공부 모임에서 읽게 되어 다 읽었다.
제임스 패커는 존 스토트와 함께 WCC를 찬성한 신학자라고 하는데, 이 책 이전에 읽었던 존 스토트의 [그리스도의 십자가]보다 이 책이 더 읽기 어려웠다. 그 이야기를 개혁주의 성경공부 모임에서 했더니, 제임스 패커는 교수 쪽이고, 존 스토트는 목회 쪽이라고 한다. 이 모임이 조직신학 쪽이고, 이제껏 접해왔던 성경신학 영역과는 또 다른 분야(성경신학을 많이 팠다면 조직신학에까지 이르렀을지도 모르나, 조직신학에 이르기까지는 내 성경신학 밑천이 얕아서)라 공부를 많이 해야 했다. 아무래도 성경신학은 귀납적이고, 조직신학은 연역적인 것 같아서, 내가 연역법에 약한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목회는 성경신학적인 부분이 많으니 귀납적일 것이고, 교수는 조직신학적인 부분이 많으니 연역적일 것이라는 생각을 했다. 그래서 존 스토트를 더 쉽게(그럼에도 그 책도 어려웠다.) 생각한 것은 아무래도 이제껏 성경신학을 더 많이 접해왔기 때문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했던 것이다.
아무튼, 제일 첫 파트를 읽으면서 들었던 생각은, ‘나는 왜 하나님의 지혜를 얻고자 하는가?‘였다. 이 질문은 상담 공부를 하며 통찰력을 얻고자 하는 나에게, ‘나는 왜 통찰력을 얻고자 하는가?‘의 질문과 맞닿아 있었다. 통찰력을 달라는 기도를 한동안 하다가 하지 않았는데, 통찰력을 얻고자 하는 목적이 상대방을 위함이 아니라 나를 위함이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상대방에 대한 사랑 없이 통찰력을 얻고자 하면 그 통찰력이 무슨 소용이 있나,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대학원 졸업을 위한 상담사례발표 정리를 하면서 느꼈지만, 직면은 되지만 공감이 되지 않았기에 공감 없는 직면이 무슨 소용인가, 싶었던 생각이 들기도 했던 것 같다. 내가 원했던 통찰력은 아마 직면이었던 것 같다. 아무튼, 하나님의 지혜를 얻고자 하는 까닭도 이와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랑하기 위해서가 아닌, 내 지식 추구의 만족을 얻기 위해 하나님의 지혜를 얻으려는 것이 마땅할까. 하나님의 지혜는 결국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닐까.

하나님을 아는 것은 첫째로,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성령께서 해석해 주시는 대로 그것을 자신에게 적용하는 것, 둘째로 하나님의 말씀과 사역이 드러내는 하나님의 본질과 특성에 주목하는 것, 셋째로, 하나님의 초청을 받아들이고 하나님이 명하시는 일을 행하는 것, 넷째로, 하나님이 이처럼 가까이 오사 당신을 이러한 신적 교제로 이끌어들인 것에서 보이신 사랑을 인식하고 기뻐하는 것을 포함한다고 말할 수 있다.(57쪽)

하나님을 아는 것은 이처럼 간단한 일이 아니다. 하나님에 ‘대해‘ 알고 있는 사람은 많지만(나 포함), 하나님을 아는 사람은 드물다. 어떤 사람에 대해 안다고 말할 때, 그 사람에 ‘대해‘ 아는 것은 피상적인 앎일 뿐일 것이다. 피상적으로 알면서 어떻게 사랑한다고 말할 수 있을까.

제임스 패커는 지혜를 얻기 위한 선행조건으로 두 가지를 이야기한다.(158쪽)
1. 하나님을 공경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2. 하나님의 말씀을 받는 법을 배워야 한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이라고 했던 잠언 말씀이 떠오르는 대목이다.

하나님의 자녀, 우리의 인도자 하나님, 내적 시련 세 파트가 나에게는 가장 재미있고 흥미로운 부분이었다.
하나님의 자녀 파트에서 양자됨에 대해 말하는데, 양자됨에 대해 이제껏 생각해온 바는 너무 단편적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왜 나만 겪는 고난이냐고 원망하지 마세요‘라는 찬양이 있다(사실 찬양이라고 해야 할지 잘 모르겠다. 초점은 온통 하나님이 아니라 자신에게 가 있는데, 이것이 자기 찬양이 아니면 무엇인지 말이다.). 그 물음이 ‘왜 신자를 악의 구렁텅이로 인도하시는가?‘의 질문과 이어져 있다는 생각이 든다. 악의 구렁텅이로 걸어들어간 것은 사람이지 하나님이 아니다. 사람은 의지의 자유를 가지고 있다. 그러면 또 이렇게 묻는다. ‘하나님은 왜 악의 구렁텅이를 허용하시는가?‘ 첫째로, 사람은 하나님의 큰 계획을 다 알 수 없다. 이해할 수 없기 때문에 막아놓으셨다라고 할 수밖에 없다.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 우리에게 유익이 되기 때문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둘째는, 악의 구렁텅이나 고난을 통해 신자의 믿음을 확인할 수 있다. 진짜 사랑은, 믿음은, 힘들 때 드러난다. 위기의 때에 드러나는 내 믿음은, 위기로 약해진 믿음이 아니라 내 믿음이 그만큼밖에 안 된다는 것을 보여주는 지표이다. 이것이 ‘우리의 인도자 하나님‘ 파트를 읽으면서, 4년 전 일을 겪으면서 내린 결론이다.
371-373쪽에 보면 하나님의 인도에 대해 잘못 가르치고 있는 가르침에 대해 나오는데, 오늘날 한국교회와 같다는 생각에 깜짝 놀랐다. 하나님의 인도를 ‘본질적으로 기록된 말씀과는 별개로 성령이 주시는 내적 충동‘으로 생각하는 것이라는 대목이다. 대학생 때 수양회를 가면 ‘하나님의 뜻 알기‘ 이런 선택강의가 항상 있었다. 그 강의 내용이 어땠는지 들어보지 않아서 잘 모르겠지만, 이 책을 읽었다면 그 해답을 찾을 수 있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사람들은, 패커의 용어로 ‘소명을 위한 선택‘에서 주로 하나님의 뜻이나 하나님의 인도를 찾는다. 이 ‘소명을 위한 선택‘이 바로 결혼을 할까요, 말까요, 어떤 직업을 가질까요, 등등의 질문을 말한다. 패커의 답은 이렇다. ‘이러한 문제들은 성경의 가르침을 직접 적용해서 해결할 수 없다. 성령으로부터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선택이 어떠한 적법한 가능성 가운데서 이루어져야 하는지에 대한 경계를 정하는 것 뿐이다. 성경이 어떤 사람의 선택을 직접 지도해 줄 수 없다는 바로 그 점 때문에, 하나님이 주시는 충동과 기호와 성향이라는 요소가 결정적인 것이 된다.‘ 이렇게 잘못된 개념을 갖게 되는 까닭은 ‘근본적으로 모든 인도의 문제가 이와 똑같은 두 가지 특징을 지니고 있다는 추정이 있으며, 둘째, 모든 사람의 삶을 이런 종류의 인도를 추구해야 하는 영역으로 다루는 면이 있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이 되기만 하면 세상과 육신과 사탄이 우리에게 어떤 심각한 문제도 일으키지 않을 것이며, 환경과 인간관계도 결코 우리를 곤란하게 하지 않을 것이고, 우리 역시 자신에게 문제가 되지 않을 것이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주장은 해롭다. 잘못된 주장이기 때문이다.(389-390쪽)

그리스도인이 된 이후의 변화에 대해서 믿기만 하면 변화한다고 말하는 것을 그만두었으면 좋겠다. 그리고 (성령님의 역사가 없이) 비신자에게처럼 ‘사랑해야 한다‘고 말하는 것도 그만두었으면 좋겠다.

책 뒷부분 해설 458쪽을 보면 이 책을 잘 요약해주고 있다. 그리고 해설 뒤에 연구 및 토론문제가 있는데, 수 년 전 이 책을 읽을 때 연구 및 토론문제가 있는 것을 알았다면(책 뒷부분도 유심히 볼 걸 그랬다.) 이 부분으로 이야기를 나누었어도 좋았겠다는 생각이 든다.
마지막 한 문장으로 이 책에 대한 서평을 마친다.

우리는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려고 애쓰는 바로 그만큼만 진정 인간적인 삶을 사는 것이다.(17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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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의 십자가 (특별판)
존 R. 스토트 지음, 황영철.정옥배 옮김 / IVP / 2019년 1월
평점 :
절판


[그리스도의 십자가](존 스토트 글/황영철*정옥배 옮김, IVP)

작년부터 개혁주의 성경공부 모임을 시작했다. 웨스터민스터 신앙고백서 대요리문답으로 공부하고 있다. 많은 기독교인이 그렇겠지만, 그동안 성경신학에 치중되어 왔었고, 조직신학의 ㅈ도 몰랐던 터에 조직신학 공부는 매우 반가웠다. 조직신학과 성경신학을 병행해서 공부하면 균형 있게 배워나갈 수 있을 것 같다.-여기에 대해서는 더 하고 싶은 말이 많지만 이만 줄인다.
아무튼, 이 모임에서 1월부터 책 읽기를 시작했다(책 읽기만 하고 싶은 분들은 연락주시면 초청해 드립니다.). 두 달에 걸쳐 이 책을 읽었다. 이 책은 존 스토트의 역작으로 불릴 만 했다. 십자가에 대해 이토록 깊이 있는 고찰을 보여준 책이, 혹은 설교가 있었던가? 이 책은 십자가에 대한 주제 설교라고 봐도 무방할 것 같다.
존 스토트에 대해서는 사실 잘 모른다. 이 책을 읽고 이런 사람이구나, 할 뿐이다. 아는 지식이라고는 제임스 패커와 함께 WCC를 찬성했다는 것 정도? 존 스토트와 제임스 패커의 신학은 인정할 만 하지만 WCC 찬성은 옥의 티랄까.
이 책은 총 4부 13장으로 이루어져 있고, 한 장이 끝날 때마다 토론 문제가 있어 책을 같이 읽으면 더 좋게 만들어져 있다. 물론 우리 모임에서는 책에 대한 토론은 하지 않고, 책을 읽었는지만 확인을 해서 초큼 아쉽긴 하지만(더 이상 일을 벌이면 큰일난다..;;;;;) 말이다. 조금 아쉬운 점이 있다면 번역상의 문제인데, 번역이 매끄럽지 않아서 읽는 데 고생했다. 원서를 보기에는 실력이 짧은 데다 번역을 잘할 자신은 없으니 어쩔 수 없다. 번역 잘하는 분이 다시 번역해 주시면 좋겠다. 그게 아니라면, 존 스토트 글이 원래 그런 걸까?
이 책에 대해서는 할 말이 너무 많다. 띠지를 붙여놓은 부분을 일일이 언급하면 글이 매우 매우 길어질 것이다. 개혁주의를 표방한다면 꼭 읽어봐야 하는 책임은 분명하다. 십자가에 흐릿해질 때마다 두고두고 다시 읽어봐야 할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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