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면 
기슭마다 내가 벗어둔 

흩어져 있는 옷가지들

그리다 만 그림 저기
신승훈 2집 저기
동그랗고 맑은 그 눈동자 저기

아무도 손을 흔들어 주지 않는 건 
이제 그곳엔 아무도 없기 때문

우리가 처음 만났던 
세상에 없는 
북일동 산 8-1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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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을 떠보니 아침이었다. 너의 말대로 시계가 있었다. 오전 10시짜리 시계. 아직 자료 전송 중이라 나는 눈으로 물체들을 훑었다. 저것의 계기, 저것의 활용, 저것의 사연을 알게 된다고 해도 저것은 탁자이다. 저것에 대해 내가 더 알아야 할 것은 없다. 이 일은 생각보다 단순하다. 삶을 살려고만 들지 않는다면.


초인종이 울렸다. 이 모델의 예상 방문객은 택배 기사, 말씀드릴 게 있는 이웃, 가스 검침원 정도이다. 좋은 소식이 아침부터 남의 집 문앞에서 웃고 있는 일은 없다. 오전 10시에서 12시 사이에는 최신 휴대폰을 공짜로 주고 돈을 빌려주고 싶다는 전화들이 쇄도한다. 친절한 사람들. 통장 잔고가 36,920원이라는 걸 아는 모양이다.      


비가 오는 날이면 빨래를 한다. 마침 외출해서 빨래를 못한 사람들은 옷 입은 채로 빗속을 뛰어다닌다. 비는 자 대고 쭉쭉 그어주면 되는데 그 일은 누가 하는지 모르겠다. 한참 고위직이겠지. 위에서 하는 일은 밑에서는 잘 안 보이는 법이다. 날씨 따라 변하는 게 사람이라 아무나 맡을 수 있는 일은 분명 아니다.


등장인물이 많은 삶에서 번번이 실수하는 바람에 나는 벌써 몇 년째 외딴 삶이다. 어떻게 생각해? 좋아요. 그랬어야 했다. 대개의 의문문은 명령문이다. 수당이 월급 대신 시간으로 나왔고 고지서가 쌓였다. 월급 받는 사람들이 커피를 마시고 있는 스타벅스 앞을 지날 때면 호주머니 속에서 동전이 짤그랑거렸다. 


어느 날 갑자기 남편이. 어느 날 갑자기 삶이. 어느 날 갑자기 내가. 변하지 않는다. 삶의 모든 날은 어느 날이므로 어느 날은 없다. 어느 날 눈을 떠보면 오전 10시짜리 시계가 있을 뿐이다. 탁자가 있고 양말이 있고 책이 있다. 그리고 어느 삶에는 이제 그만 일어나라고 등짝을 후려치는 엄마나 아내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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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넘겨 준 너의 머리카락

너는 내게 모르는 얼굴이지만

삶에서 죽음은 가엾은 일이라

괜찮다고 쓰다듬어 주고 싶었어


너에게 버림받은 사람들이

잘 가라고 너에게 손을 흔들어

살았다는 안도감에 착한 사람들

왜 아무도 네게 화를 내지 않는 걸까


최승자 시집 속에 숨겨둔 일만 엔

결백한 자의 비밀이란 겨우 그런 것

괜히 울어주지 않아도 돼 꼬마야

눈물로써 밝혀지는 건 아무것도 없단다


이럴 때일수록 잘 먹어둬야 한다며

오늘따라 유별난 끼니의 당위성

표정을 만드느라 애쓰며들 파이팅

그러나 정작 끼니를 놓치고 있는 한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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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운대에 작은 빵집 치즈 프레첼

어떤 맛이냐면 눈이 동그래지는 맛

한 손에 치즈 프레첼을 들고 횡단보도 앞에서 

나와 우주와 치즈 프레첼 크로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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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야 우등 고속버스 안에서 

별탈없이 곯아떨어진 사람들

창밖으로 넘어가는 밤의 페이지 속엔

자고 있는 산의 조용한 옆얼굴


정해진 도로 규칙을 준수하며

남의 도시 외곽으로만 달리는 버스

그래서 가장 인기 있는 불빛은

그래 봤자 조금도 위험해 보이지 않는 모텔들


밤은 어디서든 외롭기 마련

자정의 35번 고속도로 위에서 나는

메뚜기처럼 9, 10, 11, 다시 10

모르는 남자의 코 고는 소리 BGM


누구나 이별하는 부산을 떠나

흔한 첫사랑의 환승지 대전이 저어기

그러나 오늘 밤 내 차비로는 이제 그만 톨게이트

차비 받는 재미에 이 야밤에 혼자 씩씩한 톨게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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