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서운 칼바람과 싸라기눈이 내리치던 추운 날이었다. 할머니는 피난 짐을 싸고 남은 음식을 모아 봄이에게 줬다. 반쯤 말린 숭어를 정신없이 먹는 봄이의 모습을 보며 할머니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짐을 다 꾸리고 집밖으로 나가자 봄이가 낑낑거리며 따라 나왔다. 평소 봄이는 꼬리를 치면서 따라오다가도 집으로 돌아가라고 하면 바로 알아듣고 돌아가던 아이였다. 하지만 그날은 할머니가 따라오지 말라고 아무리 얘기해도 신작로까지 쫓아왔다. 사람들이 자신을 떠난다는 것을 알아챈 듯이 낑낑대면서 돌아가지 않겠다고 고집을 부렸다. 증조모가 신작로 모퉁이에 쪼그리고 앉아서 봄이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 봄이야, 우리 봄이야. 

   봄이가 바닥에 배를 깔고 엎드려서 증조모를 올려봤다. 

   - 여기서 헤어지자. 이제 우리를 따라오지 말라는 말이야. 내레 미안해......

   증조모의 말이 끝나자 봄이는 자리에서 일어나 가족들의 냄새를 한 번씩 맡더니 집 쪽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한참 멀어졌을 때야 한 번 뒤돌아봤을 뿐이었다. 할머니는 혹시나 봄이가 돌아올까봐 봄이의 이름도 부르지 못했다. 등을 돌린 채로 걸어가는 봄이를 보며 할머니는 목에 두른 목도리가 다 젖도록 소리 없이 울었다. 그후로 누구도 다시는 봄이를 언급하지 않았다. 봄이가 존재하지도 않았다는 듯이. 그냥 개일 뿐이야. 할머니는 그렇게 생각하려 했지만 그런 거짓말로 스스로를 위로할 수는 없었다. 


(...)

  

   그렇게 며칠을 더 걸어서 대전에 도착한 그들은 경부선 철길을 따라 대구 쪽으로 걸어갔다. 대구에 가까워지면서 가져온 양식도 바닥을 드러냈다. 가끔 마주치는 민가에서 주먹밥이나 물을 건네기도 했지만 대부분 하루에 겨우 한 끼를 먹었다. 하루는 민가에서 내놓은 주먹밥을 먹다가 어떤 아이를 만나게 됐다. 많아봐야 대여섯 살 정도로 보이는 여자아이였는데 가족 없이 혼자였다. 한쪽 눈은 다래끼 때문에 부어올랐고 봄에나 입을 만한 얇은 겉옷을 걸치고 있었다. 아이는 증조모의 치맛자락을 붙잡고 증조모를 한참 동안 쳐다봤다. 

   증조모는 짐에서 할머니의 겉옷을 꺼내 아이에게 입히고 목도리로 머리를 싸매줬다. 삶은 감자와 고구마 몇 개를 보자기로 싸서 아이의 손에 들려줬다. 그러고는 자신을 잡고 있는 아이의 손을 떼어내고 걷기 시작했다. 아이가 증조모에게 달려가서 치맛자락을 잡았지만 증조모는 아이의 손을 다시 한번 떼어내고는 따라오지 마라, 따라오지 마, 소리를 질렀다. 

   - 어마이, 같이 가도 되지 않갔어요.

   그 말을 들은 아이가 할머니를 꼭 안았다. 그 와중에도 피난민들은 빠른 속도로 그들을 지나쳐 걸어가고 있었다. 여자애 둘이 길 한복판에 서 있으니 방해가 된다는 듯이 화를 내는 사람들도 있었다. 증조모가 짐을 내려놓고는 아이를 할머니로부터 떼어냈다. 

   - 어마이.

   - 됐다. 

   - 이렇기 간다는 말이시까.

   - 기래. 

   - 어마이, 이러지 마시라요. 

   말이 끝나자마자 증조모가 할머니의 얼굴을 때렸다. 한 번, 두 번, 다음에는 머리를 쳤다. 바닥에 쓰러질 정도로, 증조부가 말릴 때까지. 아이는 더이상 그들을 따라오지 않았다. 입을 다물고 길을 걷다보니 해가 졌다. 그믐밤이었다. 별 무리가 아주 낮게까지 내려와 밝게 빛났다. 그걸 보면서 할머니는 생각했다. 우리는 이런 아름다움을 보고 느낄 자격이 없는 존재들이라고. 짐승만도 못한 존재들, 천한 존재들, 세상에서 사라져야 할 존재들이라고. 

나는 이런 장면을 잘 못 읽는다. 눈 앞이 뿌얘지면서 숨이 잘 안 쉬어진다. 고통스러워서 차라리 죽어버리고 싶다는 생각마저 든다. 한 마디로 어쩔 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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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주에는 점심 1조다. 구내식당에서 점심을 후딱 먹고 식자재마트에 당근을 사러 간다. 당근은 월화에는 100g에 190원인데, 수요일이 되고 주말이 가까워지면 380원, 두 배가 된다. 당근과 함께 레몬도 샀다. 보통은 치토스 바비큐 맛도 한 봉 사는데 오늘은 점심을 두둑히 먹어서 군것질 생각이 안 났다. 아침에 해의 방향을 고려하지 않고 아무렇게나 차를 세워둔 탓에 차 안은 맙소사, 여름이다.


집에 잠깐 들렀다. 고양이는 오전 내 낮잠을 잔 모양이다. 어두컴컴한 작은 방 서랍장 위에서 잠이 덜 깬 멍한 얼굴로 나를 맞는다. 내가 점심 시간에 잠깐 집에 들르는 것을 삼월이는 좋아하지 않는다. 하긴 자기 생활 리듬이라는 게 있는데 불쑥 내가 나타나면 스케줄이 좀 흐트러지기는 하겠다. 그래도 고양이에게 다가가 고양이 얼굴을 양손으로 감싸쥐고 다정하게 코에 뽀뽀를 해준다. 잘 잤어? 오늘 해가 좋은데 일광욕이라도 해. 고양이의 귀여움은 광합성으로 생성되는 것. 무릇 귀여운 고양이라면 일광욕을 소홀히 할 수 없다. 햇볕에 배를 드러내고 발라당 누워서는 머리를 옆으로 꺾고 앞발을 오므려 귀여운 주먹을 만들며 '앙!' 하는 삼월이는 그래서인지 정말 귀엽다. 확신의 귀여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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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쓸쓸할 때가 제일 제정신 같애. 그래서 밤에 더 제정신 같애. 


어려서 교회 다닐 때 기도 제목 적어내는 게 있었는데 애들이 쓴 거 보고 이런 걸 왜 기도하지? 

성적, 원하는 학교, 교우관계... 고작 이런 걸 기도한다고? 신한테? 신인데? 

난 궁금한 건 하나밖에 없었어. 

나... 뭐 해요? 

나 여기 왜 있어요?

91년 이전에 존재하지 않았고 50년 후면 존재하지 않을 건데 이전에도 존재했고 이후에도 존재할 것 같은 느낌. 

내가 영원할 것 같은 느낌. 그런 느낌에 시달리면서도 마음이 어디 한 군데도 한 번도 안착한 적이 없어. 

이불 속에서도 불안하고, 사람들 속에서도 불안하고. 

난 왜 딴 애들처럼 해맑게 웃지 못할까? 

난 왜 늘 슬플까? 

왜 늘 가슴이 뛸까? 

왜 다 재미 없을까?


인간은 다 허수아비 같애. 자기가 진짜 뭔지 모르면서 그냥 연기하며 사는 허수아비. 

어떻게 보면 건강하게 잘 산다고 하는 사람들은 이런 모든 질문을 잠재워두기로 합의한 사람들일 수도. 

인생은 이런 거야 라고 어떤 거짓말에 합의한 사람들.

난 합의 안 해. 

죽어서 가는 천국 따위 필요 없어. 살아서 천국을 볼 거야. 

- 몰랐는데 나 운전할 때 되게 다정해진다. 희한하게 핸들 잡자마자 다정해져. (...) 

  내가 사람들 틈에서 오바하고 있었나 봐. 혼자 있으니까 되게 차분하고 다정해져. 

- 혼자 다정한 건 뭐야?

- 몰라. 그냥 혼자 다정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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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수철 2022-05-15 00: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뭐야.... 내 얘긴 줄 알았네.....

Joule 2022-05-15 13:58   좋아요 1 | URL
염미정 라인인가요.

한수철 2022-05-17 04:19   좋아요 0 | URL
이 드라마를 보지 않아서..... 인물관계도를 검색하고 왔네요.ㅎㅎ^^

아마도 ˝혼자 다정해˝라는 말에 꽂혔던 것 같은데..... 아무튼 뭐 그렇다고요.

Joule 2022-05-17 11:22   좋아요 0 | URL
ㅋ 그럼 염창희! 저도 염창희!
 

라지가 돌아왔다. 석 달 전 죽은 줄 알았는데. 벌써 서른 번도 넘는 환생이지만 매번 살아 돌아오는 라지를 볼 때마다 얼마나 반가운지 모른다. 엄마 껌딱지였던 진식이가 풀죽은 모습으로 패기와 어울려 다녔던 것도, 라지가 최근 거처로 삼았던 집 앞을 내가 기웃거렸을 때 라지의 기척이 나지 않았던 것도 그냥 아무것도 아니었던 것이다.     


뒷베란다에 나갔다가 습관처럼 창 밖을 내다보니 눈에 익은 삼색 고양이의 뒷모습이 고양이식당 앞에서 서성거린다. 소리나게 방충문을 열고 닫아 라지를 부른다. 라지는 쳐다보지 않고 그냥 식당 앞에 예쁘게 자세를 고쳐 잡고 앉는다. 기다릴테니 내려오라는 뜻이다. 오늘따라 늦게 일어난 터라 출근 준비에 마음이 급했지만 여차하면 전화해서 연차를 써야겠다고 생각하며 서둘러 운동화에 발을 구겨 넣는다.


3년 전 중성화수술 이후로 라지는 나와 사이가 멀어져 거처를 옮기고 내가 주는 것은 아무리 맛있는 것이라 해도 먹지 않으며 나와 눈도 마주치지 않는다. 그래도 알은척은 해준다. 내가 사는 다가구주택 단지에 가끔 마실도 오고 나를 보면 반갑게 야옹~ 인사도 하고 달려와서 자기를 쓰다듬게도 해준다. 그래도 눈만은 절대 마주치지 않는다. 그것은 말하자면 라지의 결심 같은 것인 듯하다. 라지의 그윽하고 따뜻한 시선이 그립기는 하지만 괜찮다. 내가 라지에게 잘못했으니까.


배가 고플 것 같아서 먹든 안 먹든 국물이 걸쭉한 파우치 두 개를 종이접시에 담아 내밀었다. 라지는 주의를 게을리하지 않고 아무리 오랜만이라고 해도 너라는 인간을 섣불리 믿을 수는 없다는 메시지를 전달하며 한참을 킁킁거리며 냄새를 맡더니 할짝할짝 국물을 핥는다. 고맙다. 나는 라지가 먹기 편하라고 접시를 들어준다.


3년 전, 그러니까 삼월이가 태어나기 전, 라지가 중성화되기 전, 내가 아직 취준생이었을 무렵, 라지와 나는 둘이서 함께 빈둥거리며 하루를 보내곤 했다. 라지도 나도 딱히 서로가 마음에 들거나 그런 건 아니었는데 어쩌다 세상에 둘만 남아 버려서 어쩔 수 없이 같이 돌아다니는 무리처럼 우리 사이에는 적당한 마음의 거리가 있었다. 그래도 라지는 매일 하루에도 몇 번씩 나를 찾아와 기다렸고 나는 라지에게 손을 흔들며 우리는 즐겁게 계절들을 통과했다. 어떤 날들에는 솟구치는 애정에 숟가락으로 라지의 밥을 떠먹여줄 때도 있었는데 그러면 라지는 아기처럼 얌전하게 숟가락을 핥았다. 라지의 접시를 들고 있는데 가만히 그때 생각이 났다.


밥을 먹고 있는 라지를 보고 있으려니 문득 우리 엄마 같다. 늙은 우리 엄마. 물론 우리 엄마는 라지처럼 상냥하고 노련하고 유능하지 않다. 그래서 한때 나는 정말로 라지가 우리 엄마였으면 좋겠다고, 나도 라지 같은 엄마가 있었으면 좋겠다고 자주 생각했었다. 나의 늙어가는 엄마를 보면서는 아무렇지 않은데 왜 나이든 나의 고양이를 바라보며 나는 가슴이 뭉클해지는 걸까. 라지는 제 양을 다 먹고 그대로 돌아서 떠난다. 나중에 출근하면서 보니 라지가 근처 아파트 단지로 들어간다. 나는 항상 라지가 어디 사는지 궁금하다. 그런 걸 보면 라지는 내 친구가 맞는 것 같다.         

 


2021. 4. 25.(일) 오전 11:21  라지와 진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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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천생 여자라는 말을 들으며 자랐지만 어머니는 그 말을 싫어했다. 현모양처, 알뜰한 당신, 어머니 손맛 같은 말도 마찬가지였다. 여자와 노인이 합해진 의미에서의 할머니로만 대해지는 것 역시 탐탁지 않게 생각했다. 희생과 헌신, 고향의 이미지, 경제적 무능, 부지런함과 절약, 쇠약함과 퇴행, 그리고 지혜로움 같은 미덕까지. 어머니는 자신이 힘들게 살아온 것은 맞지만 누구에게도 그것을 동정할 권리는 없다고 생각했다. 

   누나는 어릴 때 같은 반의 고아원 아이가 도시락을 싸오지 못해 불쌍하다고 말했다가 어머니에게 야단을 맞은 적이 있었다. 불쌍한 게 아니라 너보다 운이 나쁜 거다. 뭐 그런 식으로 혼났는데 누나는 어린애가 어떻게 알아듣느냐며 지금까지도 억울해해했다. 어머니는 관공서의 현수막에 적힌 어르신이라는 표현도 호들갑스럽다고 싫어했다. 귀여운 할머니라는 말 역시 좋아하지 않았다. 아버지가 틀니를 아무데다 빼놓는 걸 보고 눈살을 찌푸렸지만 그것은 싫어하면 안 되는 물건이었으므로 귀엽게 여기려고 노력했고 결국 성공했는데, 귀여움은 그처럼 너그럽게 보아주거나 기특한 느낌인 경우에 쓰는 말이라는 거였다. 

   어머니는 '할머니 같다'라는 말 못지않게 '할머니 같지 않다'는 말에도 거부반응을 보였다. "내가 인자하게 대하면 할머니라서 그렇다고 하고 냉정하게 대하면 할머니인데도 그렇다고 하고, 결국 할머니가 인자하다는 생각은 안 바뀌지. 근데 내 성격이 냉정한 것하고 할머니인 것하고는 아무 상관 없어. 그럼 누가 잘못 생각한 거겠냐. 그 사람들이냐 나냐." "뭐가 그렇게 복잡하고 까탈스러워요."  형은 어머니가 보통의 어머니답지 않은 말을 할 때면 곧잘 짜증을 냈다. "그래봤자 할머니는 할머니잖아요." 어머니는 곧바로 대꾸했다. "내가 할머니지만, 그 사람들이 아는 그 할머니는 아니야. 그러니까 아는 척 좀 하지 말라는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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