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문화계의 이슈메이커, 기생 

 

5. 우리는 속을 태우는 노동자다! 


   

   
 

우리도 노동자다. (……) 우리 기생도 요릿집이나 어디를 물론하고 가서 한 시간에 1원 금전을 받는 것이 즉 노동의 삯전을 받는 것이다.
남자 노동자는 곡괭이로 땅을 팔 때 이마에서 땀을 흘리며 노동하지만 우리 기생은 속을 태우는 노동자다. 입을 열어 노래를 부르는 것과 손으로 양금이나 가야금을 뜯는 것도 기생은 남자 노동자보다 무한 고초 가운데서 노동한다. (……) 노동자라도 정정당당한 노동자다. (……) 이 세상 사회에서는 기생이라고 우리를 부르지 말고 노동자라고 불러 주었으면 하는 생각이 난다. 그리고 한층 더 나가서 일반 손님도 노동자 중에도 빈약한 노동자, 편안히 먹고사는 기생은 아니라는 생각을 해주기 바라며 우리 기생된 노동자는 철저한 노동을 해서 철저한 노동자 되기를 단결해야만 되겠다.
―田蘭紅, “妓生도 勞動者다-ㄹ가?”, 〈장한〉, 1927년 2월

 
   

 

웃음을 팔고, 남성들의 등골을 빨아먹는다는 비난을 받아야만 했던 기생. 전난홍이란 기생이 ‘기생도 노동자다!’라고 힘주어 외쳤던 이유는 무엇일까. 예기가 되는 길은 생각처럼 쉬운 것이 아니었다. 사람들로부터 손가락질을 당하는 ‘직업’이었지만, 기생이 ‘직업’이 되기까지는 힘겨운 수련 과정을 필요로 했다.

 


  
예기가 되려면 권번에서 약 3년 동안 수업을 받아야 했다. 수업만 받는다고 다 끝나는 것은 아니었다. 약 3년 동안의 수업을 마치면 시험을 보아 합격한 자만이 졸업할 수 있었다. 권번에 입학한 동기(童妓: 아직 머리를 얹지 않은 어린 기생)의 교육 기간이나 내용은 지역별·권번별로 차이가 있었지만, 교과 내용은 노래(가곡, 잡가, 소리, 일본 창 등)와 가사, 시조, 서예, 가야금, 현금, 검무, 승무, 조선어, 일본어 등으로 거의 같았다. 예기들이 일본 창과 일본어를 배운 것은 일본 고객들이 급증했기 때문이었으며, 샤미센(三味線)을 배우는 경우도 있었다.

매달 한 번씩 열리는 ‘삭회(朔會)’는 동기들의 실력과 교육 과정을 테스트하는 자리였으며 1년에 한두 차례씩 정기 연주회를 열기도 했고 이 자리에서 새내기 기생들은 데뷔를 하기도 했다. 권번에서 모든 과정을 마치고 졸업한 기생들은 드디어 ‘놀음’을 나간다. 권번은 예기의 요릿집 출입 및 기생들의 놀음차, 즉 화대를 받아주는 매니지먼트 회사 역할을 했다. 

 

 

예기로 활동하기 위해서는 꼭 권번에 가입을 해야만 했다. 권번에 가입하기 위해서는 10원에서 20원의 입회금과 매달 50전씩 회비를 내야 했다. 1900년대 초반 일패 기생의 놀음차는 시간당 약 4원 정도였으나 1910년대로 접어들면 1원 20~50전, 1920년대에 들어서면 1원 30전 정도였다. 그중에서 97전 5리가 예기의 실수입이었고, 32전 5리는 요정과 권번에 수수료 명목으로 들어갔다. 또한 예기는 매달 5전씩 경성부에 영업세도 내야만 했다.

예기의 놀음차는 1900년대 초반에 비해 상당히 저렴해진 편이었다. 예기의 놀음차가 저렴해진 배경에는 기생을 대신할 수 있는 다양한 ‘유흥 공간들(다방, 카페, 바, 영화관 등)’이 새롭게 형성되고 있었기 때문이며, 권번들 간의 경쟁 역시 한몫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처럼 예기들은 국가의 허가를 받은 권번을 통해 철저하게 관리되었다. 예기는 조세 징수의 원칙에 따라 매달 세금을 내고 활동하는 공식적인 ‘직업’이었다. 1929년 총독부 문서과에서는 조선에서 ‘영업’을 하고 있는 예기와 창기에 관해 조사를 했다. 조선인 예기는 총 2,263명이었고, 창기는 1,789명이었으며, 작부는 1,219명이었다. 일본인 기생도 조선인 기생과 경쟁하며 영업을 하고 있었는데, 일본인 예기는 2,049명이었고, 창기는 1,787명이었으며, 작부는 472명이었다.

식민지 시대의 기생은 이중으로 관리를 받게 되었는데, 첫 번째는 권번을 통한 관리였으며, 두 번째는 국가로부터의 관리였다. 식민지 조선의 ‘기생들’은 총독부로부터 정기적으로 위생검사를 받아야만 했다. 혹시 모를 위험한 질병으로부터 기생들을 관리하기 위해서였다.
 

   
 

충남 공주경찰서 서장은 (……) 요리옥에는 반드시 목욕탕을 설비시키고, 예·창기, 작부는 절대로 공개목욕탕에 입욕하지 못하게 하여 숙옥(宿屋), 음식점 등은 전부 가옥 내외를 대수선하게 하여 도회지와 시대의 진전에 적당하게 하여 더욱 여름 절차에 일반 위생을 위하여 많은 색주의 아씨들을 일소하여 302호나 되는 각 영업자의 면목이 일신되었다고 한다.
―“공개 욕장에 예·창기 입욕 엄금”, 〈매일신보〉, 1930년 6월 15일

 
   

 

여름철 ‘위생’에 만전을 기해야 한다는 공주 경찰서장의 명령이야 타당하다. 하지만 위생을 이유로 예기와 창기와 작부의 대중목욕탕 출입을 금지시킨 것은 가혹한 일이다. 공주 경찰서장의 입장에서 기생들은 성적인 전염병을 언제든지 옮길 수 있는 ‘보균자’나 다름없었다. 기생들은 자신들에게 쏟아지는 사회적 냉대를 묵묵히 감내하는 데 이미 이골이 나 있었다.

사회적인 냉대보다 기생들의 가슴을 더욱 멍들게 하는 것은 다름 아닌 동종 업계에 종사하던 권번의 ‘포주들’이었다. 모든 권번이 다 그런 것은 아니었지만, 소규모 권번의 ‘포주들’은 기생을 구타하거나 그들의 놀음차를 강탈했고, 늦잠을 잔 기생을 하루 종일 굶기거나 자신들 마음대로 ‘매매’하기도 했다.

돈을 버는 기생은 따로 있었다. 손님들에게 인기가 있는 기생의 경우는 수입이 좋았지만, 대다수의 기생들은 겨우 생계를 유지할 정도였다. 더욱이 돈이 없다고 치장을 하지 않을 수도 없었다. 언제 자신을 부를지 모를 고객을 위해 기생들은 외모를 가꿔야만 했다. 영업 실적이 부실한 기생들은 최소한의 생계나 치장을 위해 포주에게 빚을 냈고, 끝내는 빚더미에 앉게 되었으며, 그 빚을 갚지 못해 이리저리 팔려 다니는 신세로 전락했다. 사회적 냉대와 포주들의 횡포, 그리고 생활고를 견디지 못한 기생 중에는 자살로 생을 마감하는 이들도 종종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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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11-04-06 12: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진 속 여인의 눈빛에 슬픔이 가득하네요.
 

 

4. 문화계의 이슈메이커, 기생 

 

4. 기생이라고 다 같은 기생이 아니다!: 화초기생의 탄생

  


점점 더 세력을 확장해가는 삼패 기생의 위력 앞에 일패 기생들은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 1900년대 초반에도 일패 기생은 삼패 기생과 구별 짓기를 하기 위해 노력했다. 종전까지 일패 기생과 삼패 기생을 구별하는 방법은 ‘붉은 우산’이었다. ‘붉은 우산’은 일패 기생에게만 허락된, 일패 기생의 상징이었다. 그런데 1906년 7월에 들어 삼패 기생들이 경무청에 자신들도 ‘붉은 우산’을 쓰겠다고 호소했고, 경무청에서는 이 요구를 받아들였다. 대신 일패 기생의 신발만 달리해 삼패 기생과 구별하도록 했다. 일패 기생에게 검은색 외코신을 착용하게 하여 삼패 기생과 구별시킨 것이다. 
  



그렇지만 이러한 구별 방법만으로는 일패 기생의 ‘자존심’이 회복되지 않았다. 더군다나 기생을 대하는 고객들의 취향도 예전 같지 않았다. 일패 기생들은 권번에서 철저하게 가무(歌舞) 및 시조 등을 교육받았다. 자신들이야말로 조선 시대의 ‘예술’을 전승하는 사람들이라는 자긍심이 강했던 일패 기생들이었다. 일패 기생들은 ‘일류’ 선생들 밑에서 춤과 노래와 악기와 서화 등을 전수받았으며, 자신들의 롤 모델을 논개와 춘향, 황진이와 같은 의기(義妓)와 정절, 예인(藝人)의 대명사들로부터 찾았다. 




 

   
 

예기란 무엇인가. 연석에 초대받아 음악과 가무를 연주하여 연석에 흥을 한층 높이게 일단의 풍류를 가미함에 종사하는 여성이다. (……) 영웅열사가 만란(漫瀾)과 악전고투하며 고심참담하여 성공의 월계관을 쓸 때에 우리는 가무로써 그의 영화를 더욱 빛나게 하는도다. 어찌 일개 유아탕자의 수중물이 되고 마는 것이 예기(藝妓)의 본이랴. (……) 가무 그것은 예술이며, 적어도 우리는 예술가로다.
―尹玉香, “예기의 입장과 자각”, 〈長恨〉, 1927년 2월

 
   

   

 

윤옥향이 ‘우리는 적어도 예술가인 예기’라고 힘주어 말하는 이유는 당시 일패 기생의 지위가 예전만 못할 뿐만 아니라 삼패 기생과 구별 없이 ‘동류’로 취급되는 사회적 분위기 탓이었다. 일패 기생의 입장에서 보면 정조를 쉽게 여기고 몸을 파는 삼패 기생과 예기인 자신들은 분명히 달랐다. ‘기생’이라는 이유로 그들과 똑같이 취급되는 것을 참을 수 없는 노릇이었다. 더군다나 ‘고객들’ 또한 기생의 가무보다는 기생의 ‘교태’에 더 끌리고 있었다. 40년 넘게 기생 노릇을 한 어떤 여인의 한탄을 들어 보자. 
  

   
 

얼굴이 희끔하고 모양이나 과히 흉치 아니하면 그래도 부르는 사람이 있어서 이리 간다, 저리 간다 하고 벌어먹지요. 지금은 기생만 그러할 뿐 아니라 기생을 불러 노는 사람도 또한 같은 축이지요. 가무는 둘째 하고 먼저 보는 것은 얼굴이지요. 물론 기생이면 얼굴도 추하여서는 못 쓰는 법이지요마는 기생을 얼굴만 취하려면 기생이라는 이름은 지어 무엇 합니까? 은군자나 색주가만 데리고 놀아도 그만 족할 것이지요. 예전 기생이라 하면 첫째는 가무를 보고, 둘째는 사람을 보는 것이요, 셋째는 얼굴을 보는 것인데, 지금 와서는 아주 정반대가 되었지요. (……) 정말로 망측한 것은 요사이 기생이올시다. 가무는 할 줄 모르면서 지껄이는 것으로 반 벌충을 하지요. 노는 손님도 그것을 받기는 잘하니까 그렇지요마는. 속속들이 비단옷에 금시계 줄이나 한 옆으로 떨어뜨리고 철 갖추어 패물이나 몸에 지니고 사람 만나 변이나 잘 쓰고, 돈 많은 사람의 간장이나 살살 녹여서 보자기 씌우고, 돌아서면 욕하고 얼굴 대하면 헤헤 웃고, 없는 정도 있는 듯이 능청을 부리다가 돈만 없는 모양을 보면 언제 보던 행로인(行路人)이냐 하고 보아도 못 본 체하는 것이 제일 명기라 하니 요사이 기생 노릇같이 하기 쉬우리까?
―“一老妓의 自白(二)”, 〈매일신보〉, 1914년 7월 29일

 
   

  

40년 풍상을 견디고 기생 노릇을 한 어느 노기의 신세 한탄이 이유가 없는 것은 아니었다. 기생은 더 이상 관기가 아니었고, 이제 권번이라는 매니지먼트 회사에 고용된 존재가 되었다. 기생은 더 많은 수익을 창출해야 하는 일종의 상품에 불과한 시대가 도래한 것이었다. 기예가 아닌 얼굴을 무기로 손님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던 기생을 ‘화초기생(花草妓生)’이라 불렀다. 나름 일패 기생으로서의 자부심이 강했던 기생들에게 화초기생은 동종 업계의 ‘적’이나 다름없었으며, 기생의 수준을 떨어뜨리는 존재로 인식되었다. 화초기생은 창기인 삼패 기생과 거의 비슷한 부류였다.

화초기생들의 무기는 어쩌면 ‘변신술’이었다. 화초기생들의 가무 수준은 형편없었다. 그렇기에 그들은 일패 기생과의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 화려한 복색과 야릇한 화장을 통해서 자신들의 부족한 점을 감추었다. 일패 기생들은 고객들의 눈을 현혹하는 ‘아름다운’ 얼굴과 화려한 패션으로 무장한 화초기생들과 끊임없이 구별 짓기를 해야 했다. 여학생들도 마찬가지였다.   

 



규방에 갇혀 있던 여성들이 세상으로 나오기 시작하고, 근대 교육이라는 미명하에 ‘여학생’도 생겨났다. 여학생은 ‘모던 걸’ 이자 ‘신여성’을 뜻하는 말이었고, 어떤 면에서는 개화·계몽 시대의 아이콘이었다. 삼패 기생들은 여학생들을 주목했다. 가진 재주라고는 남성들을 사로잡는 ‘미모’ 밖에 없었던 그들은 자신들의 단점을 감추기 위해서 여학생의 이미지를 도용했다. 삼패 기생들은 개화·계몽 시대의 아이콘이었던 여학생들의 복장을 입고 길거리에서 호객 행위를 했다. 삼패 기생들은 자신들의 학문적 성취와 관계없이 여학생의 패션을 모방함으로써 신학문을 배운 ‘신여성’이라는 표지를 내세웠으며, 이를 이용하여 ‘영업’을 했던 것이다. 옷차림만으로는 그 사람이 여학생인지 삼패 기생인지 알 수 없었다. 이러한 일이 빈번하게 일어나자 경시청에서는 여학생 이외에는 절대로 여학생 복장을 착용하지 못하도록 고시했다. 삼패 기생들이 흔히 자신의 신분을 속이는 대표적인 방법은 여학생과 간호사를 사칭했던 것이다. 이는 물론 비난받을 만한 행동이었지만, 삼패 기생들의 이러한 행태는 서구적인 개화·계몽을 무작정 추종했던 1900년대 일부 조선인들의 심리와 ‘유행으로서의 개화·계몽’이 무엇이었는지를 잘 보여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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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글몽글 2010-11-08 18: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오늘 자료들이 다 너무 좋네요. 사진들도 참 이쁩니다....^^

비로그인 2011-04-06 11: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학생복과 간호원복이 조선인들의 심리? 묘하게 연결지으면 이렇게 되네요.
 

 

4. 문화계의 이슈메이커, 기생 

 

3. 기생이 해방되고, 권번이 생기다
  

 

1894년 갑오개혁이 단행되었다. 갑오개혁의 일환으로 궁중 연회를 담당했던 장악원(掌樂院)이 폐지되었고 그 명칭도 이후 장례원(掌隷院), 협률과(協律課), 장악과(掌樂課) 등의 이름으로 바뀌어갔다. 기생의 운명도 점점 변해갔다.
   


 


갑오개혁과 함께 신분제 폐지가 단행되었다. 그러나 신분제가 폐지되었다고 해서 곧장 ‘관기’들의 신분까지 해방된 것은 아니었다. 1904년 러일전쟁 이후 조선의 신분제는 완전히 철폐되었으며, 관기였던 기생들의 신분은 이때 해방된다. 모든 관기 제도가 폐지된 것은 1908년에 이르러서였다. 그러나 기생의 입장에서 관기 제도의 완전한 폐지가 마냥 반가운 일만은 아니었다. 관기 제도가 폐지되자 기생들의 일자리도 함께 사라지게 되었다.

마침 1908년 9월 경시청에서 <기생 단속령>과 <창기 단속령>을 제정하여 반포하였다. <기생 단속령>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기생 단속령
1908년 9월 25일 경시청령 5호

  제1조. 기생으로 생업을 삼는 자는 부모나 혹은 이에 대신할 친족의 연서(連署)한 서면으로써, 소할(所轄) 경찰관서를 경(經)하고 경시청에 신고하여 인가증을 얻음이 가함. 기업을 폐지한 때는 인가증을 경시청에 환납함이 가함. 

  제2조. 기생은 경시청에서 지정한 시기에 조합을 설치하고 규약을 정하여 경시청에 인가를 얻음이 가함.
  제3조. 경시청은 풍속을 해하거나 혹 공안(公安)을 문란하게 하는 우(虞)가 있는 줄로 인정할 때는 기생을 업으로 삼는 것을 금지하며, 혹 정지하는 일이 있음.
  제4조. 제1조의 인가증을 얻지 않고 기생을 업으로 하는 자는 10일 이하의 구류나 또는 10환 이하의 벌금에 처함.

-부칙-
  제5조. 현재 기생으로 업을 삼은 자는 본령 시행일로부터 30일 이내에 제1조의 규정을 준행함이 가함. 

―〈관보〉, 내각 법제국 관보과, 1908년 9월 28일

 
   



<창기 단속령>은 경시청령 6호로 같은 날 반포되었는데, 내용은 동일하고 다만 ‘기생’이란 말 대신에 ‘창기(娼妓)’라는 말이 사용되었을 뿐이다. 이제 관기 제도가 폐지된 자리에 일명 ‘기생조합’이 들어서게 되었으며, 당국의 허가를 받아야 했다. 매매춘이 국가의 법에 의해 공식화된 것이다.

최초의 기생조합은 박한영 등 30여 명이 발기하여 세운 ‘한성기생조합’이었다. 한성기생조합은 기생들의 기둥서방들이 남편이 있는 유부기(有夫妓)들을 모아서 조직한 것이었다. 한성 기생조합은 훗날 ‘광교기생조합’으로 명칭을 바꿨으며, 1914년에는 일본식 명칭인 ‘권번(券番)’으로 이름을 바꾼 ‘한성권번’으로 조직을 개편하였다.

한성기생조합이 유부기 중심이었다면, 황해도와 평안도 지역에는 무부기(無夫妓)들이 중심이 된 ‘다동기생조합(茶洞妓生組合)’이 설립되었다. 다동기생조합은 1914년에 대정권번(大正券番)으로 명칭을 바꾸었다. 1920년대 식민지 조선을 대표하는 4대 권번은 대정권번, 경상도와 전라도 기생들을 중심으로 만들어진 한남권번(漢南券番), 한성권번, 평양 기생을 중심으로 구성된 조선권번이었다. 이 중에서 대정권번은 일본인이 경영하는 권번이었다. 

 



권번은 기생들의 일상적인 관리 및 교육을 비롯하여 기생의 수입까지도 관리했으며, 명월관과 국일관 같은 유명한 요리점에 기생들을 ‘공급’했다. 식민지 조선의 4대 권번이 조선시대로 말하면 ‘일패 기생’을 양성하는 곳이었다면, ‘삼패 기생’이 중심이 된 권번도 등장했다. 삼패 기생 중심의 권번이 공공연하게 등장할 수 있었던 것은 경시청의 <기생 단속령> 및 <창기 단속령>이 반포됨으로써 매매춘이 공식화되었기 때문이다. 경시청의 기생과 창기에 관한 정책으로 인해 삼패 기생들의 활동은 급격히 왕성해졌고, 그 세력도 성장하여 권번이라는 조합까지 결성한 것이다. 삼패 기생 중심의 권번으로는 경화권번(京和券番), 경성권번, 종로권번 등이 존재했다.

삼패 기생 중심의 권번이 등장하자 스스로 일류 혹은 일패 기생이라고 자부했던 기생들의 반발도 적지 않았다. 일패 기생은 언제나 삼패 기생과 ‘구별 짓기’를 해야만 했다. 그렇지 않으면 세간의 ‘기생=매음녀’라는 비난 섞인 조롱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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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w 2010-11-07 16: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기생 내부의 구별짓기, 참 씁쓸하네요...어떤 직업이든 이런 식의 차별화가 일어나는 것 같습니다.

비로그인 2011-04-06 11: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명월관, 국일관 이제 좀 이해가 되네요.
 

 

4. 문화계의 이슈메이커, 기생 

 

 

2. 기생 ‘롱운’이의 반격?

 
 
  

   
 

이번에 서울 와서 각 연희장을 구경하여 본즉 각 학교 학도들이 삼삼오오 무리지어 입장표를 사가지고 들어가서 (연극을) 보되, 그중에 어여쁜 계집과 기생 삼패들만 눈여겨보며 음란한 말이 곁에 사람의 귀를 현란케 하니 교육이 발달되겠는가. 본 항에도 연희장이 있으나 유의유식하는 부랑패류의 사치를 궁극히 할 뿐 아니라, 주사청루에 아리따운 계집이나 데리고 매일 다니는 사람들이야 족히 말할 것도 없거니와, 본 항 학교는 그 연희장에 들어가 구경하였다는 말은 도무지 듣지 못하였더라.
―기생 롱운, “교육이 제일 급선무”, 〈대한매일신보〉, 1908년 5월 28일

 
   

 

기생은 매음을 이유로 언제나 음탕한 요부이자 ‘공공의 적’으로 지목받았다. 그러나 기생에도 급이 있었다. 일명 관기(官妓)이자 예기(藝妓)라 불리는 일패 기생이 있고, 일패 기생에서 물러나 ‘은근히’ 몸을 파는 이패 기생인 은군자(隱君子)가 있었으며, 창기(娼妓)인 삼패 기생이 있었다. 삼패 기생은 정조를 팔아서 재물을 만든다고 해서 ‘답앙모리’라고도 불렸으며, 혹은 ‘논다니’라고도 불렸다. 일패, 이패, 삼패에 따라 기생의 급이 달랐고, ‘음탕한 요부’라는 말에 들어맞는 것은 엄밀히는 밀매음에 종사하는 삼패 기생뿐이었다. 그러나 1900년대 일반 사람들은 일패 기생, 이패 기생, 삼패 기생을 엄밀하게 구별하지 않았고, 기생들에게는 매번 밀매음이라는 부정적인 꼬리표가 따라다녔다.

 


 

기생이라는 계층은 시대적으로 보면 사회적 마이너리티였으며, 계몽의 ‘대상’이었다. 그렇지만 계몽 지식인들로부터 온갖 비난을 받을 수밖에 없던 기생이라고 사회에 대한 관심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오히려 변화하는 사회적 분위기에 누구보다 예민한 촉수를 대고 있었던 계층이 바로 기생이었다. 그렇다면 그 예민한 촉수란 어떤 것인가.
인천에서 영업을 했던 ‘롱운’이라는 기생이 있었다. 롱운이는 개인적인 용무 때문에 경인선을 타고 문명개화와 교육의 메카인 서울에 올라온다. 조선은 개화풍에 휩싸여 있었고, 그 중심은 역시 서울이었다. 롱운이는 서울 구경을 통해 문명화된 세상, 개화된 세상이 어떤 모습인지 알고 싶었다. 그러나 롱운이에게 서울은 실망스럽고, 한심하기 짝이 없는 곳에 불과했다. 오죽이나 실망스러웠으면 신문사에 독자 투고를 했겠는가.
롱운이의 기서(寄書), 요즘으로 말하면 독자 투고는 〈대한매일신보〉에 장장 3회(1908년 5월 22일, 23일, 28일)에 걸쳐 연재되었다. 롱운이가 신문사에 ‘기서’를 보낸 이유는 서울에 실망했기 때문이었는데, 무엇이 롱운이의 마음을 상하게 했던 것일까. 먼저 롱운이가 기서를 보낸 이유부터 보자. 
 

   
 

본인은 일개 미천한 여자로 팔자가 기박하여 약하고 쓸데없는 몸이 되어 남에게 속박을 받아 일평생 자유를 얻지 못하매 부득이하여 사람을 대하면 강잉하여 웃는 낯으로 그 뜻을 맞출 따름이매 세상에 난지 십팔 년 동안에 전혀 무용지물로 지내었도다. (……) 우리 2000만 동포 자매들이여. 깊이 생각할지어다. 오늘날 생존 경쟁하는 시대를 당하여 만국이 교통하고 각 요처에 항구를 열고 만국 사람이 분답(紛沓)히 섞여 사는 때니 그중의 무슨 일이 바쁘지 아니하리오. 우리나라 목금 형편을 보건대 이 천한 여자의 생각으로는 결단코 교육이 완전히 성취하지 못하여 남의 웃음을 취할까 하노라.
―기생 롱운, “교육이 제일 급선무”, 〈대한매일신보〉, 1908년 5월 22일

 
   

 

롱운이 서울에 올라가 가장 먼저 방문한 곳은 유명한 연희장(연극장)과 학교였다. 연극장과 학교는 문명개화를 위해 새롭게 설립된 근대식 공간의 상징이었으며, 그곳이야 말로 문명개화된 세상의 축소판이었다. 문명개화한 사람들의 모습은 다음과 같았다.
머리카락을 짧게 자르고 가르마를 타서 양쪽으로 갈라붙였다. 물론 머릿기름도 발랐다. 여기에 ‘맥고모(밀짚모자)’나 ‘샐쭉 안경’을 쓰고, 가죽 구두를 신고, 손에는 단장을 들고 다녔다. 문명개화했다는 사람들의 외모를 보며 롱운은 ‘과연 이들이 진정 문명개화한 사람들이란 말인가!’라며 의심했다. 롱운이 보기에 이들은 다만 서구의 패션만을 추종하는 ‘얼개화꾼’이나 협잡꾼에 지나지 않았다. 롱운은 이들을 가리켜 겉으로만 근대식 학문을 숭상할 뿐이지 사실은 문명을 방해하는 ‘교육계의 마귀’라고 지탄한다.

 



또한 롱운은 교육계에 복무하는 사람들이 입으로는 ‘독립을 회복한다.’, ‘교육을 확장한다.’며 일장 연설을 하지만 실천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고 여겼다. 롱운은 겉으로만 문명개화된 세상과 조선의 교육 현실을 비탄하면서, 조선 교육의 메카인 ‘서울’의 교육계가 이토록 한심할 수 있냐며 통곡하기에 이른다. 당시 문명, 개화, 근대식 교육의 실질적인 문제가 다름 아닌 기생의 입에서 폭로되고 있는 셈이었다. 더 나아가 롱운이는 교육에 힘쓰기 위해서, 그리하여 진정한 문명개화한 사람이 되기 위해서 일본으로 유학할 것을 결심하며 글을 마친다. 그동안 철저하게 ‘계몽의 적’으로 비난받았던, 계몽의 외부로 밀려났던 기생의 목소리를 통해 당시 조선의 현실이 철저하게 비판받았고, 이는 계몽가들이 문명개화의 적들에게 날렸던 비난의 화살을 고스란히 되돌려 받은 형국이었다.  


그런데 롱운이의 독자 투고는 또 다른 의미를 함축하고 있었다. 그것은 다름 아닌 〈대한매일신보〉라는 당대의 가장 전투적인 ‘민족주의’를 내세웠던 신문사 편집진의 전략이다. 그 전략이란, 그동안 국가의 수치, 민족의 부끄러운 대상으로 지목되었던 기생의 입을 통해 최첨단 엘리트라고 자임하고 있었던 지식인들에게 수치와 부끄러움을 주는 것이었다. 당대의 지식인들이 진정으로 바랐던 것은 기생이 근대식 학문을 연마하여 무지를 떨쳐내고 계몽된 인간으로 성장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롱운이와 같은 ‘미천한 신분’의 사례를 통해 지식인들이 ‘부끄러움’을 느끼고 이전보다 더 적극적으로 문명개화를 위해 몸과 마음을 바치는 것이 아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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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키 2010-11-02 10: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롱운이의 독자투고는 요샛말로 하면 그러니까 '개념 댓글'이군요.^^ 단지 독자투고가 아니라 한 편의 드라마입니다.

쾌몽 2010-11-02 15: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귀한 자료와 정보들을 얻어갑니다.^^

이승원 2010-11-06 01: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통키님, '롱운'. 참, 정감이 가는 이름이죠^^*.
쾌몽님, 제 글이 조금이나마 쓸모가 있었다니, 좀, 으쓱합니다^^.

비로그인 2011-04-06 11: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이비리그에 입학하는 유학파들, 명문대에 입학하는 수재들이 대세이지만 나라를 구할 이가 이들 중에서 나오겠습니까!
 

 

4. 문화계의 이슈메이커, 기생 

 

 

   
 

향문의 물결에 이 몸을 싣고/ 사랑의 돛대를 고요히 저어/ 화평한 우주의 자연미에 취하랴/ 멀-리 수평선을 눈에 그리며/ 한 곡조 두 곡조 화평을 노래하고/ 고요히 고요히 저으려 할 때/ 아- 얼마나 저주받던 이 몸이랴/ 벽장 같던 구름덩이 한 조각 두 조각/ 노호하는 폭풍은 사랑의 돛을 분지르며/ 저주하는 파도는 고요한 물결을 멀리 멀리 쫓아버리고/ 한 걸음 두 걸음 외로운 이 몸을/ 불운의 함정에 넣으려 한다/ 아- 얼마나 애달픈 이 몸의 운명이랴 (……)//
―옥향, “저주받은 이 몸”, 〈長恨〉, 1927년. 2월

 
   

 

1. 계몽의 적, 기생
 


모든 길은 ‘계몽의 빛’을 통과해야만 했다. 사랑도 명예도 문명도 국가도 민족도 ‘계몽의 빛’을 통과하지 않고서는 제 위상을 부여받지 못했다. 서구로부터 유입된 낯선 삶의 양식과 개념들은 개화·계몽의 이름으로 정당화되었다. 1894년부터 1910년까지 조선은 ‘개화·계몽’의 시대였다. 구시대적 삶의 양식은 대부분 척결의 대상으로 지탄받았으며, 서구적 삶의 양식과 문물들이 조선의 미래를 밝혀줄 것이라고 계몽 지식인들은 믿어 의심치 않았다.

서구와 같은 문명부강한 국민국가를 건설하는 것이 당시 계몽 지식인들의 바람이었다. 계몽 지식인들은 자신들의 이러한 바람을 실현하기 위해 과거와의 적극적인 ‘단절’을 시도했다. 계몽 지식인들이 생각하기에 과거 조선의 가장 큰 폐단 중에 하나는 ‘성(性)’에 대한 관리가 철저하지 못하다는 점이었다. 갑오개혁 때 공식적으로 폐지를 선언하기는 했지만 조혼(早婚)은 여전히 성행하는 ‘사회악’이었다. 조혼이 ‘사회악’으로 단죄 받았던 배경에는 ‘사회진화론’과 ‘인종론’ 같은 새로 수입된 이데올로기가 포함되어 있었다.

국가를 위해 헌신해야 할 소년들의 열정과 에너지가 조혼과 같은 구시대의 악습 때문에 ‘색욕(色慾)’에 낭비되고 있다는 것이 계몽 지식인들의 생각이었다. 특히 부모들 간에 협의로 성사되는 강제적인 결혼 제도인 조혼은 가정불화의 원흉이기도 했다. 이성 간의 사랑과 애정을 기반으로 하지 않은 결혼 때문에 남자들이 기생이나 매음녀(삼패 기생)를 찾기 일쑤라고 계몽 지식인들은 믿었다. 따라서 계몽 지식인들은 조혼제도의 영원한 폐지와 함께 기생과 매음녀의 척결을 개화·계몽의 중요한 과제로 삼았다. 

  

   
 

소위 기생이란 것은 관부에 매였거니와 그 외 음녀들이 각처에 많이 있어 빈부를 막론하고 어리석은 사나이들을 유인하여 돈을 뺏으며 혹 돈을 지체하면 패류들과 결연하여 무수히 곤욕을 보이고 때려서 몸이 상한 지경에 이르며 또 무뢰지배들이 남의 계집아이들을 사다가 오입을 가르친다니 이런 일은 경무청에서 마땅히 엄금할 일이더라.
―“잡보”, 〈독립신문〉, 1896년 7월 11일

 
   

 


1890년대 조선 ‘최대’의 민간 신문인 〈독립신문〉의 편집진들, 예를 들어 서재필과 같은 당대의 대표적인 지식인들이 기생과 매음녀를 비판하고, 국가 권력을 통해 이들을 엄중히 처단할 것을 주장한 것은 한편으로는 색욕에 빠진 인민의 ‘게으르고 나약한 신체’를 교정하려는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기생과 매음녀들의 위생 관리를 통해 그들과 관계를 갖는 ‘남성들의 몸’을 관리하자는 의미도 있었다. ‘성’이 관리의 대상으로 부각된 것은 우생학을 기반으로 ‘건강한 인종’을 육성하려는 열망 때문이었다. 매음은 성병을 유발하며 이로 인해 건강하지 못한 자녀가 태어나게 되고 결국 조선의 백성은 나약한 인종으로 전락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 당시의 인종 개량 담론의 핵심이었다.

 

 

 

근대 전환기에 실시된 기생과 매음녀 관리, 더 나아가 위생 관리의 목적은 ‘화류계에 정신을 허비하지 않는 대장부’, 즉 국가를 위해 기꺼이 자신의 몸을 바칠 수 있는 건강한 개인을 양산하는 데 있었다. 계몽 지식인들은 ‘풍속 개량’을 주장했다. 조선인들의 ‘건전한’ 놀이 문화를 양산하기 위해서였다. 이 주장에 따라 연흥사, 단성사, 협률사, 원각사 등의 근대식 연극장이 새로 건립되었다. 그러나 풍속 개량이라는 애초의 목적은 서서히 변질되기 시작한다.

풍속개량을 위해 만든 연극장은 정작 부랑방탕한 사람들의 집합소가 되었다. 연극장을 찾는 대다수의 남성들, 특히 나이 어린 학생들은 ‘부인석’에 앉아 있는 여성들을 구경하거나, 당시의 표현을 빌면 ‘갈보들’을 엿보기 위해 그곳을 찾는 경우가 많았다. 당시 서울에서 밀매음에 종사하는 여성들의 수는 대략 2,500여 명 정도였는데, 대부분 삼패 기생들이었다. 이들의 주요 활동 장소가 연흥사를 비롯한 근대식 극장이었다. 따라서 경시청에서는 사복 경찰을 연극장에 잠입시켜 밀매음녀를 검거하는 등, 바야흐로 밀매음과의 전쟁을 치르기 시작했다.

이처럼 국가 권력이 매음녀를 단속했던 이유는 패악스러운 풍속을 개량하려는 의도도 있었지만, 직접적으로는 성병으로부터 남성들을 ‘보호’하고 동시에 성적 욕망을 자유롭게 분출할  대상을 제거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미 통감부 정치가 실시되고 있었고, 일본의 제도를 본떠 만든 기관인 경시청 역시 통감부의 입김이 강하게 작용했기 때문에 경시청의 매음녀 단속이 순수하게 조선의 문명 진보를 위한 것이었다고는 단언하기 어렵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삼패 기생의 밀매음에 대한 경시청의 공권력 행사에 계몽 지식인들은 동조했으니, 일종의 적대적인 공모 관계를 형성한 것이었다.

비록 통감부 정책의 일환으로 경시청에서 밀매음 단속을 펼쳤지만, 조선의 계몽 지식인들의 입장에서도 그 정책에 반기를 들 이유는 없었던 것이다. 계몽 지식인들이 바랐던 것은 미미한 개인의 열정이라도 ‘애국’ 이외의 목적으로 낭비해서는 결코 안 되며, 따라서 개개인의 모든 열정은 ‘충군애국(忠君愛國)’으로 회수되어야 하는 것이었다. 물론 계몽 지식인들의 바람은 경시청의 정책 목표와는 달랐다. 그러나 이러한 상황 속에서 기생, 특히 매음에 종사했던 삼패 기생은 ‘계몽의 적’이자 ‘국가의 적’으로 지탄을 받게 되었다. 


   
 

색이라고 하는 것은 목숨을 해치는 함정이라. 요교색(夭嬌色)에 정신을 빼앗겨 밤낮 없이 교유할 제, 가정사를 불고하고 재산을 허다하게 낭비할뿐더러 기혈(氣血)까지 감손(減損)하여 명이 짧아지는 자가 허다하니, 조심할 게 이 아닌가.
―“시사평론(四戒)”, 〈대한매일신보〉, 1909년 9월 18일. 국문본·국한문본 통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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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키 2010-10-28 10: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와우, 드디어 기생 이야기가 나왔군요. 언제 기생의 문화사가 펼쳐지나 궁금했었는데^^

둥이 2010-10-28 18: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근데 기생이 사라진 직업인가?^^
명칭만 다를뿐 왠지 언젠가 본듯한데....^^텐프로던가?

이승원 2010-10-28 20: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그런가요?? 정확하게 말하면, 직업은 사라진 게 아니라 변화되는 거겠죠^^* 변사도, 전화교환수도, 인력거꾼도, 그리고 기생도.....

거리에서 2010-11-27 23: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컴컴한 극장이 왠지 달리 보입니다? 하하! 재미있네요.

비로그인 2011-04-06 11: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황진이가 지하에서 벌떡 일어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