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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도 노동자다. (……) 우리 기생도 요릿집이나 어디를 물론하고 가서 한 시간에 1원 금전을 받는 것이 즉 노동의 삯전을 받는 것이다.
남자 노동자는 곡괭이로 땅을 팔 때 이마에서 땀을 흘리며 노동하지만 우리 기생은 속을 태우는 노동자다. 입을 열어 노래를 부르는 것과 손으로 양금이나 가야금을 뜯는 것도 기생은 남자 노동자보다 무한 고초 가운데서 노동한다. (……) 노동자라도 정정당당한 노동자다. (……) 이 세상 사회에서는 기생이라고 우리를 부르지 말고 노동자라고 불러 주었으면 하는 생각이 난다. 그리고 한층 더 나가서 일반 손님도 노동자 중에도 빈약한 노동자, 편안히 먹고사는 기생은 아니라는 생각을 해주기 바라며 우리 기생된 노동자는 철저한 노동을 해서 철저한 노동자 되기를 단결해야만 되겠다.
―田蘭紅, “妓生도 勞動者다-ㄹ가?”, 〈장한〉, 1927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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웃음을 팔고, 남성들의 등골을 빨아먹는다는 비난을 받아야만 했던 기생. 전난홍이란 기생이 ‘기생도 노동자다!’라고 힘주어 외쳤던 이유는 무엇일까. 예기가 되는 길은 생각처럼 쉬운 것이 아니었다. 사람들로부터 손가락질을 당하는 ‘직업’이었지만, 기생이 ‘직업’이 되기까지는 힘겨운 수련 과정을 필요로 했다.

예기가 되려면 권번에서 약 3년 동안 수업을 받아야 했다. 수업만 받는다고 다 끝나는 것은 아니었다. 약 3년 동안의 수업을 마치면 시험을 보아 합격한 자만이 졸업할 수 있었다. 권번에 입학한 동기(童妓: 아직 머리를 얹지 않은 어린 기생)의 교육 기간이나 내용은 지역별·권번별로 차이가 있었지만, 교과 내용은 노래(가곡, 잡가, 소리, 일본 창 등)와 가사, 시조, 서예, 가야금, 현금, 검무, 승무, 조선어, 일본어 등으로 거의 같았다. 예기들이 일본 창과 일본어를 배운 것은 일본 고객들이 급증했기 때문이었으며, 샤미센(三味線)을 배우는 경우도 있었다.
매달 한 번씩 열리는 ‘삭회(朔會)’는 동기들의 실력과 교육 과정을 테스트하는 자리였으며 1년에 한두 차례씩 정기 연주회를 열기도 했고 이 자리에서 새내기 기생들은 데뷔를 하기도 했다. 권번에서 모든 과정을 마치고 졸업한 기생들은 드디어 ‘놀음’을 나간다. 권번은 예기의 요릿집 출입 및 기생들의 놀음차, 즉 화대를 받아주는 매니지먼트 회사 역할을 했다.

예기로 활동하기 위해서는 꼭 권번에 가입을 해야만 했다. 권번에 가입하기 위해서는 10원에서 20원의 입회금과 매달 50전씩 회비를 내야 했다. 1900년대 초반 일패 기생의 놀음차는 시간당 약 4원 정도였으나 1910년대로 접어들면 1원 20~50전, 1920년대에 들어서면 1원 30전 정도였다. 그중에서 97전 5리가 예기의 실수입이었고, 32전 5리는 요정과 권번에 수수료 명목으로 들어갔다. 또한 예기는 매달 5전씩 경성부에 영업세도 내야만 했다.
예기의 놀음차는 1900년대 초반에 비해 상당히 저렴해진 편이었다. 예기의 놀음차가 저렴해진 배경에는 기생을 대신할 수 있는 다양한 ‘유흥 공간들(다방, 카페, 바, 영화관 등)’이 새롭게 형성되고 있었기 때문이며, 권번들 간의 경쟁 역시 한몫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처럼 예기들은 국가의 허가를 받은 권번을 통해 철저하게 관리되었다. 예기는 조세 징수의 원칙에 따라 매달 세금을 내고 활동하는 공식적인 ‘직업’이었다. 1929년 총독부 문서과에서는 조선에서 ‘영업’을 하고 있는 예기와 창기에 관해 조사를 했다. 조선인 예기는 총 2,263명이었고, 창기는 1,789명이었으며, 작부는 1,219명이었다. 일본인 기생도 조선인 기생과 경쟁하며 영업을 하고 있었는데, 일본인 예기는 2,049명이었고, 창기는 1,787명이었으며, 작부는 472명이었다.
식민지 시대의 기생은 이중으로 관리를 받게 되었는데, 첫 번째는 권번을 통한 관리였으며, 두 번째는 국가로부터의 관리였다. 식민지 조선의 ‘기생들’은 총독부로부터 정기적으로 위생검사를 받아야만 했다. 혹시 모를 위험한 질병으로부터 기생들을 관리하기 위해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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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남 공주경찰서 서장은 (……) 요리옥에는 반드시 목욕탕을 설비시키고, 예·창기, 작부는 절대로 공개목욕탕에 입욕하지 못하게 하여 숙옥(宿屋), 음식점 등은 전부 가옥 내외를 대수선하게 하여 도회지와 시대의 진전에 적당하게 하여 더욱 여름 절차에 일반 위생을 위하여 많은 색주의 아씨들을 일소하여 302호나 되는 각 영업자의 면목이 일신되었다고 한다.
―“공개 욕장에 예·창기 입욕 엄금”, 〈매일신보〉, 1930년 6월 1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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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철 ‘위생’에 만전을 기해야 한다는 공주 경찰서장의 명령이야 타당하다. 하지만 위생을 이유로 예기와 창기와 작부의 대중목욕탕 출입을 금지시킨 것은 가혹한 일이다. 공주 경찰서장의 입장에서 기생들은 성적인 전염병을 언제든지 옮길 수 있는 ‘보균자’나 다름없었다. 기생들은 자신들에게 쏟아지는 사회적 냉대를 묵묵히 감내하는 데 이미 이골이 나 있었다.
사회적인 냉대보다 기생들의 가슴을 더욱 멍들게 하는 것은 다름 아닌 동종 업계에 종사하던 권번의 ‘포주들’이었다. 모든 권번이 다 그런 것은 아니었지만, 소규모 권번의 ‘포주들’은 기생을 구타하거나 그들의 놀음차를 강탈했고, 늦잠을 잔 기생을 하루 종일 굶기거나 자신들 마음대로 ‘매매’하기도 했다.
돈을 버는 기생은 따로 있었다. 손님들에게 인기가 있는 기생의 경우는 수입이 좋았지만, 대다수의 기생들은 겨우 생계를 유지할 정도였다. 더욱이 돈이 없다고 치장을 하지 않을 수도 없었다. 언제 자신을 부를지 모를 고객을 위해 기생들은 외모를 가꿔야만 했다. 영업 실적이 부실한 기생들은 최소한의 생계나 치장을 위해 포주에게 빚을 냈고, 끝내는 빚더미에 앉게 되었으며, 그 빚을 갚지 못해 이리저리 팔려 다니는 신세로 전락했다. 사회적 냉대와 포주들의 횡포, 그리고 생활고를 견디지 못한 기생 중에는 자살로 생을 마감하는 이들도 종종 있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