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기생 ‘롱운’이의 반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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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에 서울 와서 각 연희장을 구경하여 본즉 각 학교 학도들이 삼삼오오 무리지어 입장표를 사가지고 들어가서 (연극을) 보되, 그중에 어여쁜 계집과 기생 삼패들만 눈여겨보며 음란한 말이 곁에 사람의 귀를 현란케 하니 교육이 발달되겠는가. 본 항에도 연희장이 있으나 유의유식하는 부랑패류의 사치를 궁극히 할 뿐 아니라, 주사청루에 아리따운 계집이나 데리고 매일 다니는 사람들이야 족히 말할 것도 없거니와, 본 항 학교는 그 연희장에 들어가 구경하였다는 말은 도무지 듣지 못하였더라.
―기생 롱운, “교육이 제일 급선무”, 〈대한매일신보〉, 1908년 5월 2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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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생은 매음을 이유로 언제나 음탕한 요부이자 ‘공공의 적’으로 지목받았다. 그러나 기생에도 급이 있었다. 일명 관기(官妓)이자 예기(藝妓)라 불리는 일패 기생이 있고, 일패 기생에서 물러나 ‘은근히’ 몸을 파는 이패 기생인 은군자(隱君子)가 있었으며, 창기(娼妓)인 삼패 기생이 있었다. 삼패 기생은 정조를 팔아서 재물을 만든다고 해서 ‘답앙모리’라고도 불렸으며, 혹은 ‘논다니’라고도 불렸다. 일패, 이패, 삼패에 따라 기생의 급이 달랐고, ‘음탕한 요부’라는 말에 들어맞는 것은 엄밀히는 밀매음에 종사하는 삼패 기생뿐이었다. 그러나 1900년대 일반 사람들은 일패 기생, 이패 기생, 삼패 기생을 엄밀하게 구별하지 않았고, 기생들에게는 매번 밀매음이라는 부정적인 꼬리표가 따라다녔다.

기생이라는 계층은 시대적으로 보면 사회적 마이너리티였으며, 계몽의 ‘대상’이었다. 그렇지만 계몽 지식인들로부터 온갖 비난을 받을 수밖에 없던 기생이라고 사회에 대한 관심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오히려 변화하는 사회적 분위기에 누구보다 예민한 촉수를 대고 있었던 계층이 바로 기생이었다. 그렇다면 그 예민한 촉수란 어떤 것인가.
인천에서 영업을 했던 ‘롱운’이라는 기생이 있었다. 롱운이는 개인적인 용무 때문에 경인선을 타고 문명개화와 교육의 메카인 서울에 올라온다. 조선은 개화풍에 휩싸여 있었고, 그 중심은 역시 서울이었다. 롱운이는 서울 구경을 통해 문명화된 세상, 개화된 세상이 어떤 모습인지 알고 싶었다. 그러나 롱운이에게 서울은 실망스럽고, 한심하기 짝이 없는 곳에 불과했다. 오죽이나 실망스러웠으면 신문사에 독자 투고를 했겠는가.
롱운이의 기서(寄書), 요즘으로 말하면 독자 투고는 〈대한매일신보〉에 장장 3회(1908년 5월 22일, 23일, 28일)에 걸쳐 연재되었다. 롱운이가 신문사에 ‘기서’를 보낸 이유는 서울에 실망했기 때문이었는데, 무엇이 롱운이의 마음을 상하게 했던 것일까. 먼저 롱운이가 기서를 보낸 이유부터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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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인은 일개 미천한 여자로 팔자가 기박하여 약하고 쓸데없는 몸이 되어 남에게 속박을 받아 일평생 자유를 얻지 못하매 부득이하여 사람을 대하면 강잉하여 웃는 낯으로 그 뜻을 맞출 따름이매 세상에 난지 십팔 년 동안에 전혀 무용지물로 지내었도다. (……) 우리 2000만 동포 자매들이여. 깊이 생각할지어다. 오늘날 생존 경쟁하는 시대를 당하여 만국이 교통하고 각 요처에 항구를 열고 만국 사람이 분답(紛沓)히 섞여 사는 때니 그중의 무슨 일이 바쁘지 아니하리오. 우리나라 목금 형편을 보건대 이 천한 여자의 생각으로는 결단코 교육이 완전히 성취하지 못하여 남의 웃음을 취할까 하노라.
―기생 롱운, “교육이 제일 급선무”, 〈대한매일신보〉, 1908년 5월 2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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롱운이 서울에 올라가 가장 먼저 방문한 곳은 유명한 연희장(연극장)과 학교였다. 연극장과 학교는 문명개화를 위해 새롭게 설립된 근대식 공간의 상징이었으며, 그곳이야 말로 문명개화된 세상의 축소판이었다. 문명개화한 사람들의 모습은 다음과 같았다.
머리카락을 짧게 자르고 가르마를 타서 양쪽으로 갈라붙였다. 물론 머릿기름도 발랐다. 여기에 ‘맥고모(밀짚모자)’나 ‘샐쭉 안경’을 쓰고, 가죽 구두를 신고, 손에는 단장을 들고 다녔다. 문명개화했다는 사람들의 외모를 보며 롱운은 ‘과연 이들이 진정 문명개화한 사람들이란 말인가!’라며 의심했다. 롱운이 보기에 이들은 다만 서구의 패션만을 추종하는 ‘얼개화꾼’이나 협잡꾼에 지나지 않았다. 롱운은 이들을 가리켜 겉으로만 근대식 학문을 숭상할 뿐이지 사실은 문명을 방해하는 ‘교육계의 마귀’라고 지탄한다.

또한 롱운은 교육계에 복무하는 사람들이 입으로는 ‘독립을 회복한다.’, ‘교육을 확장한다.’며 일장 연설을 하지만 실천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고 여겼다. 롱운은 겉으로만 문명개화된 세상과 조선의 교육 현실을 비탄하면서, 조선 교육의 메카인 ‘서울’의 교육계가 이토록 한심할 수 있냐며 통곡하기에 이른다. 당시 문명, 개화, 근대식 교육의 실질적인 문제가 다름 아닌 기생의 입에서 폭로되고 있는 셈이었다. 더 나아가 롱운이는 교육에 힘쓰기 위해서, 그리하여 진정한 문명개화한 사람이 되기 위해서 일본으로 유학할 것을 결심하며 글을 마친다. 그동안 철저하게 ‘계몽의 적’으로 비난받았던, 계몽의 외부로 밀려났던 기생의 목소리를 통해 당시 조선의 현실이 철저하게 비판받았고, 이는 계몽가들이 문명개화의 적들에게 날렸던 비난의 화살을 고스란히 되돌려 받은 형국이었다.
그런데 롱운이의 독자 투고는 또 다른 의미를 함축하고 있었다. 그것은 다름 아닌 〈대한매일신보〉라는 당대의 가장 전투적인 ‘민족주의’를 내세웠던 신문사 편집진의 전략이다. 그 전략이란, 그동안 국가의 수치, 민족의 부끄러운 대상으로 지목되었던 기생의 입을 통해 최첨단 엘리트라고 자임하고 있었던 지식인들에게 수치와 부끄러움을 주는 것이었다. 당대의 지식인들이 진정으로 바랐던 것은 기생이 근대식 학문을 연마하여 무지를 떨쳐내고 계몽된 인간으로 성장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롱운이와 같은 ‘미천한 신분’의 사례를 통해 지식인들이 ‘부끄러움’을 느끼고 이전보다 더 적극적으로 문명개화를 위해 몸과 마음을 바치는 것이 아니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