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난을 대물림할 수는 없다, 그래서 배워야 한다!
직업에 귀천이 없다지만 엄연히 사회적으로 귀천은 존재했고, 가난에 죄가 없다지만 곤궁함은 ‘죄’가 되기 일쑤였다. 인력거꾼은 사회적으로 천대 받는 직업이었고, 가난한 부류였다. 하지만 모든 부모가 그렇듯이 인력거꾼들도 자신의 천한 직업을, 가난을 자식들에게까지 대물림하지 않기 위해서 온갖 노력을 다했다. 그 첫째가 바로 ‘공부’다. 세계 최고의 교육열은 바로 이때 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1924년 인력거꾼 3,000여 명이 뜻을 같이했다. 김만수를 중심으로 ‘경성차부협회’를 조직한 것이다. 회원으로 가입한 인력거꾼들은 매달 20전씩 돈을 모았다. 그들에게는 꼭 하고 싶은 일이 있었다. 희망찬 미래를 설계하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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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록 인력거를 끌어도 배워야 하고 알아야겠다. 하물며 우리들의 자손에랴! (……) 직업에 귀천이 있으랴마는 남달리 사람이 사람을 끄는 차부(車夫). 그들의 땀방울에는 자제는 가르쳐야겠다는 굳은 결심의 눈물이 섞인 것이다.
―“직업에 귀천이 있으랴!”, 〈동아일보〉, 1932년 3월 3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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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력거꾼들은 매달 20전씩 모은 돈으로 학교를 설립했다. ‘대동학원(大東學院)’이었다. 드디어 인력거꾼 자제들의 배움터가 생겼다. 인력거꾼들은 자신들은 비록 천대 받는 직업에 종사하지만, 자신의 자식만큼은 열심히 공부해서 훗날 ‘훌륭한’ 사람이 될 것이라는 희망으로 인력거를 끌고 또 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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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것이 잘돼가는 것 같았다. 학교는 점점 번창해갔다. 그런데 일이 생겼다. ‘경성차부협회’가 사분오열되었다. 그리하여 매달 45원씩 내는 교사(校舍) 임대료를 지불하지 못하게 되었고, 집주인은 학교의 문을 봉쇄하고 학교의 기물을 전부 차압했다. 학생도 선생도 학부모도 울었다. 아무도 도와주는 이 없었다.
이때 기생들이 움직였다. 인력거를 가장 많이 애용했던 기생들이 인력거꾼들의 사정을 듣고 도움을 준 것이었다. 한성 권번, 조선 권번, 대정 권번, 한남 권번, 대동 권번에 속해 있는 700여 명의 기생들이 합심하여 다섯 차례의 후원 연주회를 열었다. 대성황이었다. 기생들은 연주회 수익과 자신들이 힘겹게 번 돈을 십시일반 모았다. 그 총액이 3,300여 원이나 되었다. 그녀들은 이 돈으로 인력거꾼들이 세운 대동학원을 후원했다. 기생들이 모아 건넨 돈으로 대성학원은 다시 일어설 수 있었고, 꺾일 뻔한 인력거꾼들의 희망도 그 날개를 다시 펼 수 있게 됐다. 힘들고 고된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처지는 힘들고 고된 삶을 살아본 사람들만이 아는 것일까. 사회적으로 ‘천대’를 받았던 인력거꾼의 어려움을 알아차리고 따뜻한 손길을 내민 것은 또 다른 ‘천대’와 ‘멸시’를 받으며 웃음을 팔아야 했던 기생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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