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94년 갑오개혁이 단행되었다. 갑오개혁의 일환으로 궁중 연회를 담당했던 장악원(掌樂院)이 폐지되었고 그 명칭도 이후 장례원(掌隷院), 협률과(協律課), 장악과(掌樂課) 등의 이름으로 바뀌어갔다. 기생의 운명도 점점 변해갔다.

갑오개혁과 함께 신분제 폐지가 단행되었다. 그러나 신분제가 폐지되었다고 해서 곧장 ‘관기’들의 신분까지 해방된 것은 아니었다. 1904년 러일전쟁 이후 조선의 신분제는 완전히 철폐되었으며, 관기였던 기생들의 신분은 이때 해방된다. 모든 관기 제도가 폐지된 것은 1908년에 이르러서였다. 그러나 기생의 입장에서 관기 제도의 완전한 폐지가 마냥 반가운 일만은 아니었다. 관기 제도가 폐지되자 기생들의 일자리도 함께 사라지게 되었다.
마침 1908년 9월 경시청에서 <기생 단속령>과 <창기 단속령>을 제정하여 반포하였다. <기생 단속령>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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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생 단속령
1908년 9월 25일 경시청령 5호
제1조. 기생으로 생업을 삼는 자는 부모나 혹은 이에 대신할 친족의 연서(連署)한 서면으로써, 소할(所轄) 경찰관서를 경(經)하고 경시청에 신고하여 인가증을 얻음이 가함. 기업을 폐지한 때는 인가증을 경시청에 환납함이 가함.
제2조. 기생은 경시청에서 지정한 시기에 조합을 설치하고 규약을 정하여 경시청에 인가를 얻음이 가함.
제3조. 경시청은 풍속을 해하거나 혹 공안(公安)을 문란하게 하는 우(虞)가 있는 줄로 인정할 때는 기생을 업으로 삼는 것을 금지하며, 혹 정지하는 일이 있음.
제4조. 제1조의 인가증을 얻지 않고 기생을 업으로 하는 자는 10일 이하의 구류나 또는 10환 이하의 벌금에 처함.
-부칙-
제5조. 현재 기생으로 업을 삼은 자는 본령 시행일로부터 30일 이내에 제1조의 규정을 준행함이 가함.
―〈관보〉, 내각 법제국 관보과, 1908년 9월 2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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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기 단속령>은 경시청령 6호로 같은 날 반포되었는데, 내용은 동일하고 다만 ‘기생’이란 말 대신에 ‘창기(娼妓)’라는 말이 사용되었을 뿐이다. 이제 관기 제도가 폐지된 자리에 일명 ‘기생조합’이 들어서게 되었으며, 당국의 허가를 받아야 했다. 매매춘이 국가의 법에 의해 공식화된 것이다.
최초의 기생조합은 박한영 등 30여 명이 발기하여 세운 ‘한성기생조합’이었다. 한성기생조합은 기생들의 기둥서방들이 남편이 있는 유부기(有夫妓)들을 모아서 조직한 것이었다. 한성 기생조합은 훗날 ‘광교기생조합’으로 명칭을 바꿨으며, 1914년에는 일본식 명칭인 ‘권번(券番)’으로 이름을 바꾼 ‘한성권번’으로 조직을 개편하였다.
한성기생조합이 유부기 중심이었다면, 황해도와 평안도 지역에는 무부기(無夫妓)들이 중심이 된 ‘다동기생조합(茶洞妓生組合)’이 설립되었다. 다동기생조합은 1914년에 대정권번(大正券番)으로 명칭을 바꾸었다. 1920년대 식민지 조선을 대표하는 4대 권번은 대정권번, 경상도와 전라도 기생들을 중심으로 만들어진 한남권번(漢南券番), 한성권번, 평양 기생을 중심으로 구성된 조선권번이었다. 이 중에서 대정권번은 일본인이 경영하는 권번이었다.

권번은 기생들의 일상적인 관리 및 교육을 비롯하여 기생의 수입까지도 관리했으며, 명월관과 국일관 같은 유명한 요리점에 기생들을 ‘공급’했다. 식민지 조선의 4대 권번이 조선시대로 말하면 ‘일패 기생’을 양성하는 곳이었다면, ‘삼패 기생’이 중심이 된 권번도 등장했다. 삼패 기생 중심의 권번이 공공연하게 등장할 수 있었던 것은 경시청의 <기생 단속령> 및 <창기 단속령>이 반포됨으로써 매매춘이 공식화되었기 때문이다. 경시청의 기생과 창기에 관한 정책으로 인해 삼패 기생들의 활동은 급격히 왕성해졌고, 그 세력도 성장하여 권번이라는 조합까지 결성한 것이다. 삼패 기생 중심의 권번으로는 경화권번(京和券番), 경성권번, 종로권번 등이 존재했다.
삼패 기생 중심의 권번이 등장하자 스스로 일류 혹은 일패 기생이라고 자부했던 기생들의 반발도 적지 않았다. 일패 기생은 언제나 삼패 기생과 ‘구별 짓기’를 해야만 했다. 그렇지 않으면 세간의 ‘기생=매음녀’라는 비난 섞인 조롱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