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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적(妖賊) 유모를 처단하시옵소서
정조가 상소에 대한 비답을 내린 것은 1787년 2월 21일이었다. 상소를 올린 사람은 유생 황득중(黃得中)이었다. 그러나 황득중 혼자만의 상소는 아니었다. 황득중은 소두(疏頭: 연명하여 올린 상소문에서 맨 먼저 이름을 적은 사람)였으며, 연명한 선비만 921명에 이르렀다. 그러니 이 상소는 922명의 한결같은 의견인 셈이었다. 이 922명이 힘을 모아 정조에게 상소를 올린 이유는 과연 무엇이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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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임인년(1782년 정조 6년) 가을 문효세자(文孝世子)가 탄생한 이후로 영원히 이어질 나라의 무궁한 아름다움을 맡길 곳이 있음을 기뻐하였는데, 홍역을 순하게 치러 경사를 반포한 끝에 갑자기 훙서(薨逝)했다는 소식을 듣고 온 나라의 백성들이 모두 발을 동동 구르며 슬피 울었으나, 밤낮으로 간절히 빌었던 것은 오히려 후사(後嗣)의 탄생에 있었습니다. 9월에 의빈(宜嬪)이 졸한 상변(喪變)은 또 어찌 그리 가혹하단 말입니까. 중외(中外)가 놀라 통곡하고 모두의 말이 시끄럽게 들끓으면서 약을 잘못 쓴 역적 의관(醫官)과 젖을 끊은 요적(妖賊) 유모(乳母)에게 죄를 돌리지 않음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대궐의 일은 비밀스럽고 초야와는 멀리 떨어져 있어서, 그 자세한 내막을 알아낼 길이 없었습니다. 삼가 자전의 전교 가운데 ‘전후의 상변은 증상이 괴이했다.[前後喪變 症形怪底]’는 여덟 자를 본 뒤에야 온 나라의 신민(臣民)들이 모두들 눈물을 훔치고 이를 갈며 큰소리로 외치며 일어나 말하기를, ‘애통하다. 우리 세자의 상변은 진실로 하늘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바로 사람의 짓이다. 앞으로 임금의 원수와 나라의 역적을 거의 시원하게 씻을 수 있겠구나.’ 하였습니다. 그런데 한 달이 지나도록 시간만 끌어 끝내 한 번도 조사해 밝혔다는 말을 듣지 못하였고 극악한 역적들이 지금까지 목숨을 이어가고 있으니, 고금 천하에 어찌 이런 일이 있겠습니까. 아, 의관으로 하여금 약을 잘못 쓰게 하고 유모로 하여금 젖을 끊게 한 자는 자연 거기에 해당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용렬한 의원에게 맡기는 것도 오히려 불효라고 하였는데, 더구나 역적 의관에게 맡긴 자야 말할 것이 있겠으며, 약을 맛보지 않은 것도 오히려 임금을 시해했다고 하는데 더구나 독약을 투여한 자야 말할 것이 있겠습니까. 의심할 만한 단서가 여기에 있고 조사할 만한 자취도 여기에 있습니다. 심지어 ‘후일을 고려했다.’는 공초와 ‘나라의 경사를 칭송하지 않았다.’는 말은 모두 국문할 만하고 조사할 만한 증안(證案)입니다. 그런데 어째서 전하께서는 매번 ‘확실한 것이 없다.[無的]’는 두 글자로, 조사하여 밝히기 어렵다고 핑계를 대는 것입니까. 삼가 바라건대, 속히 삼사(三司)의 청을 윤허하시어 귀신과 사람의 울분을 풀어 주소서.
―〈일성록〉, 정조 11년 2월 2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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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효세자는 1782년 9월 7일에 태어나 1786년 5월 11일에 세상을 떠났다. 너무나 짧은 생애였다.

정치권력을 좇는 사람들에게 왕세자의 죽음은 예삿일이 아니었다. 왕세자의 죽음이 요절일 경우에는 언제나 ‘음모론’이 횡횡한다. 문효세자의 공식 사인은 홍역이었다. 그렇지만 많은 사람들이 왕세자의 사인을 홍역이라 받아들이지 않았다. 무언가 음모가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늘어났다. 함부로 발설하지는 못하지만 왕세자의 죽음 뒤에는 정순왕후가 있다고 믿는 이들도 있었다. 허나 진실은 알 수가 없었다. 진실을 알 수 없기에 언관들과 유생들은 의관과 유모를 심문해야 한다고 줄기차게 상소를 올렸다. 유생들의 상소는 왕세자가 죽은 이후부터 1790년까지 끊임없이 이어졌다. 언관들과 유생들의 들끓는 상소에도 불구하고 정조의 대답은 매번 단호했다. 정조가 말하길, “번거롭게 하지 말고 그대들은 물러가 학업을 닦으라.” 하였다.

왕세자가 죽었으니 누군가는 반드시 책임을 져야만 했다. 그런데 유생들은 왜 하필이면 의관과 유모를 지목했을까. 유생들이 의관을 왕세자의 죽음에 연루시킨 것은 이해할 만하다. 의관이 누군가의 사주를 받고 왕세자의 몸에 치명타를 줄 수 있는 약을 처방했을 수 있기 때문이다. 혹은 누군가의 사주가 아니라 단순한 ‘의료 사고’였을 수도 있다. 의관이 왕세자의 주치의였으니, 왕세자의 죽음과 의관의 치료 행위가 의심을 받을 수도 있었던 것이다. 그렇지만 유모는 무슨 죄인가?
유모의 죄는 왕세자에게 ‘충분히’ 젖을 먹이지 않은 것이었다. 젖을 먹이긴 먹였는데, 너무 일찍 젖을 끊었던 것이 화근이었다. 보통 궁중의 법도나 일반 사대부가에서 어린 아이는 무려 일곱 살 까지 유모의 젖을 먹고 자란다. 문효세자의 경우 다섯 살에 요절했으니 그 기간이 짧기도 했지만, 죽기 직전에도 유모의 젖을 먹지 못했다. 물론 이는 의관들의 판단에 따른 것이었다. 유생들은 이를 문제 삼았다. 왜 유모는 왕세자에게 젖을 주지 않았던 것이며, 의관들은 유모가 왕세자에게 젖을 물리는 것을 금지했을까. 왜 유생들은 ‘젖어멈’ 유모가 왕세자의 죽음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고 생각했을까. 왜 정조는 유생들의 빗발치는 상소에도 불구하고 ‘하찮은’ 유모를 감쌌던 것일까.
어린 왕세자가 술에 취하다
세손의 몸에서 술 냄새가 진동했다. 영조는 어찌할 바를 몰랐다. 어리디어린 세손이 벌써 술을 마시는 것일까. 억울하게 죽은 사도세자에 대한 그리움이 사무쳐 술을 배우기라도 한 것일까. 그럴 리는 없었다. 아직 돌도 지나지 않은 세손이 설마 술을 마실 수 있겠는가. 문제는 유모였다. 세손의 유모는 술을 즐겼다. 요새 말로 하면 세손의 유모는 ‘알코올중독’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니 매일 시도 때도 없이 유모의 젖을 먹은 세손의 옷에서 술 냄새가 진동했던 것이다.
조선시대 왕가와 사대부가에서는 유모를 고를 때 매우 신중했다. 친어머니의 건강이 좋지 않거나 젖이 부족해서 유모를 들이는 것이 아니라 유모에 의한 아이의 양육은 상류 계급의 풍습이자 문화였다. 유모의 건강 상태를 고려하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그 인품 또한 후덕해야만 했다. 아이는 젖을 물리는 ‘젖어멈’을 친어머니처럼 여기며, 아이는 젖어멈의 품성을 그대로 닮는다는 게 당시 사람들의 지배적인 생각이었다. 때문에 유모를 선발하는 것은 가문의 영광을 길이 보전하기 위해서도 매우 중요한 문제였다.
유모는 아이의 젖어멈이자 최초의 스승이었다. 그래서 왕가의 유모 선발 기준은 더욱 엄격하고 까다로웠다. 그런데 하필이면 정조의 유모는 술을 너무 즐겼다. 건강 상태가 좋고 인품이 후덕함을 인정받아 뽑힌 유모가 알고 보니 시도 때도 없이 술을 즐긴다는 것이 영조로서는 여간 골치 아픈 일이 아니었다. 유모가 술을 즐긴다면 유모를 바꾸면 그만인데 영조는 차마 그렇게 하지 못했다. 한 번 선택된 유모를 바꾸는 것이 아이의 건강과 인성 발달에 좋지 않다는 믿음이 강했던 시대였기 때문이다. 더욱이 유모는 결코 하찮은 ‘직업’이 아니었다. 유모를 바꾸는 것은 곧 아이의 운명을 인위적으로 바꾸는 일처럼 느껴졌던 것이다.
조선시대 왕의 유모는 ‘봉보부인(奉保夫人)’이라는 종1품 벼슬을 받았다. 왕비가 왕자를 낳기는 했지만, 왕자를 기르는 것은 유모의 책임이었다. 즉 훗날 ‘왕’이 될 사람을 가장 가까이서 보필하는 것이 유모였고, 왕자가 건강하게 자라서 왕이 된다면 그 공은 이루 말할 수 없이 큰 것이었다. 그만큼 유모의 지위는 높았고, 왕자의 보양과 장래를 위해 유모를 함부로 대할 수 없는 노릇이었다. 영조 역시 유모가 술을 즐기는 것을 언짢아하면서도 차마 유모를 내치지 못했다. 오히려 영조는 유모가 술을 마신다는 사실을 참조하여 왕자의 건강을 면밀히 진단하라고 의관들에게 명을 내렸다. 이를 보면 유모의 지위와 유모가 누린 권위를 짐작할 만하다.
유모가 아이의 건강과 보양에 직결될 수밖에 없었던 것은 물론 그들의 일이 아이에게 젖을 먹이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렇지만 유모가 ‘젖’을 먹이는 것만으로 유모의 역할을 다하는 것은 아니었다. 앞서 얘기했지만 유모의 품성을 통한 아이의 교육 또한 중요한 임무였다. 아이의 보양과 함께 아이의 교육도 중요했지만, 유모의 역할은 여기에 그치는 것이 아니었다. 유모의 중요한 역할 중 하나는 병에 걸린 아이를 ‘치료’하는 임무였다. 그렇다고 유모가 ‘의사’ 노릇을 했다는 것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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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이 수정전(修政殿)에 나갔다. 약방이 입진하였다. 이때 입시한 도제조 홍순목, 제조 이호준, 부제조 민영목, 직각 김영철, 가주서 조충희, 기사관 이명재ㆍ김우균이 차례로 나아가 엎드리고, 의관 이경년ㆍ최성협ㆍ이기철ㆍ정즙(鄭楫)이 차례로 기둥 밖에 엎드렸다.
상이 이르기를,
“사관은 좌우로 나누어 앉으라.”
하였다. 홍순목이 앞으로 나아가 아뢰기를,
“첫겨울의 날씨가 많이 음산한데 이런 때 성상의 체후는 어떠하십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한결같다.”
(……)
홍순목이 아뢰기를,
“중궁전의 기후는 어떠합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안순하다.”
하였다. 홍순목이 아뢰기를,
“신이 의관의 말을 들으니, 세자께서 요즈음 설사 증세가 있다고 하는데 지금은 태평하십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아직은 쾌차하지 않았다.”
하자, 홍순목이 아뢰기를,
“기름기가 있는 음식을 먹으면 체하게 되고, 유도(乳度)가 혹 조화되지 못하면 이런 증세가 쉽게 생기게 됩니다.”
하고, 또 아뢰기를,
“증세에 따른 투약(投藥)을 그만두어서는 안 됩니다. 대개 이런 병은 설사가 그치면 낫게 마련이니 약을 많이 써서는 안 되며, 아무리 좋은 보제(補劑)라도 갑자기 써서는 안 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증세에 따른 약은 이미 2첩을 썼다.”
하자, 홍순목이 아뢰기를,
“가장 좋은 것은 유도를 잘 조화시키는 것입니다. 유모에게 만약 습냉(濕冷) 등의 잡병(雜病)이 있으면 약을 먹여 치료하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래서 근래에 유모에게 약을 먹게 하고 있다.”
하였다.
― 〈국역승정원일기〉, 고종 12년(1875년) 10월 1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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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모의 잔병이 아이에게로 전염되지 않기 위해서 유모의 건강을 체크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아이가 병에 걸리면 유모의 역할은 더욱 막중했는데, 왜냐하면 당시만 해도 아이에게 약을 직접 투약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이가 병에 걸리면 그 치료약을 유모에게 먹인다. 그러면 아이는 유모의 젖을 통해 치료약을 간접적으로 복용하게 되었다. 유모의 유두와 젖은 일종의 의료 기구이자 의약품이 되는 셈이었다. 문효세자의 병치레 때문에 정조가 근심했던 것은 자신의 귀한 아들의 병만이 아니었다. 정조는 ‘유모’를 걱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왕세자의 병을 치료하기 위해서는 유모가 건강해야만 했는데, 유모의 몸 상태가 좋지 않아 왕세자의 치료에까지 영향을 미쳤기 때문이었다. 문효세자의 유모가 의관들의 명에 따라 세자에게 젖을 먹이지 않은 것은 그녀의 몸 상태가 좋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정조는 이를 알고 있었고, 이 때문에 무수한 상소에도 불구하고 유모를 심문하지 않았던 것이다.
왕가나 사대부가나 유모는 왕실과 가문을 지탱해가는 데 매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이에 왕가의 유모일 경우에는 유모의 자식이나 남편을 면천(免賤)해 주는 경우도 많았으며, 많은 은사(恩賜)를 하사하기도 했다. 또한 사대부가에서는 신부의 예단 품목에 유모의 예단도 당연히 포함되어 있었다.
조선 중기 인조 때의 문신이자 당대의 이름난 학자였던 택당 이식(李植)은 유훈을 남겼다. 그 중 하나가 유모의 묘에 1년에 두 번 제사를 지내도록 하라는 것이었다. 그만큼 유모는 왕가나 사대부가에서는 꼭 필요한 존재이자 특별 대우를 받았던 직업이었다. 전문적인 유모는 조선시대에만 있었던 현상도, 한국만의 풍습도 아니었다. 유럽에서도 유모를 통한 아이 양육은 보편적인 현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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