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력거는 최신 교통수단이면서 문명개화의 상징이자 부와 권력의 척도였지만, 인력거를 끄는 인력거꾼의 삶은 팍팍하기 그지없었다. 특히 인력거꾼의 일상은 유난히 시대의 부침(浮沈)에 영향을 많이 받았다. 인력거가 새로운 교통수단으로 각광을 받기는 했지만, 대중적인 교통수단은 아니었다. 더욱이 대다수의 인력거꾼은 회사에 고용된 ‘직원’이어서 회사와 수입을 나눠 가져야만 했다. 인력거 삯이 ‘투명’하지 않다는 이유로 ‘인력거 규칙’까지 제정했지만, 투명하지 않은 것은 인력거를 타는 손님들도 마찬가지였다.
1907년 11월에는 한 일본인이 삯을 달라고 청하는 인력거꾼을 칼로 찌르고 도망친 일이 있었고, 1910년 6월에는 기생을 데리고 청량사로 놀러간 경찰서의 간부들이 인력거꾼에게 차비를 주지 않아 인력거꾼이 경찰청에 하소연하는 일도 있었다. 어디 이뿐인가. 1910년 3월에는 일진회의 ‘한일합방청원운동’을 지원한 ‘국민동지찬성회장’ 이범찬도 인력거를 타고 삯을 주지 않았다. 이에 화가 난 인력거꾼이 이범찬의 신발을 인력거 삯으로 가지고 가버렸고 이범찬은 세간의 웃음거리가 됐다.
또한 1907년 통감부에서는 단발령을 선포했는데, 가장 먼저 타격을 받은 부류가 인력거꾼이었다. 통감부는 인력거꾼들에게도 단발할 것을 명령하였다. 인력거 조합도 통문을 돌려 정책에 따라 단발 할 것을 권고했다. 그러나 대다수의 인력거꾼들이 단발을 거부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그러자 통감부에서는 단발하지 않은 인력거꾼들의 영업을 정지시켰다. 또한 저잣거리에서는 조선인 대신 일본인들로 인력거를 대체 운영한다는 말까지 나돌았다. 이에 인력거꾼들은 생계를 위해 어쩔 수 없이 단발을 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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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9년 5월, 당시 경시청 부감(副監)이었던 구연수가 저녁 무렵에 인력거를 타고 집으로 가고 있었다. 인력거를 몰고 가던 인력거꾼은 옛날 대감 행차 때와 비슷하게 길을 트는 소리를 외쳤는데, 그게 하필이면 일본말이었다. 인력거꾼은 “오이∼, 오이∼(물럿거라∼, 물럿거라∼)” 하며 힘차게 인력거를 끌었다. 이때 만취한 김씨가 갈지자를 그리며 걸어가다가 인력거를 붙들고 인력거꾼에게 호통을 쳤다. 네놈은 도대체 어떤 ‘인종’인데 일본말을 지껄이느냐는 것이었다. 실랑이가 붙었고, 끝내 경찰이 출동하는 상황에 이르게 됐다. 김씨는 ‘교통 방해자’로 처리되어 경찰서로 끌려갔다.
김씨의 돌발 행동이 경시청 부감이자 훗날 조선인으로서는 최초이자 최후로 조선총독부 경무감을 지내게 되는 구연수를 향했던 것인지, 아니면 시대가 시대이니 만큼 인력거꾼의 ‘일본말’이 정말로 듣기 싫어서 술김에 나온 행동인지는 알 수 없는 노릇이지만, 인력거꾼을 하대하는 김씨의 태도는 꼴불견이었다.
주인을 잘 만나면 주인의 권세에 빌붙어서 자신이 마치 권력의 핵심인 양 행동하는 사람들이 있듯, 인력거꾼 중에도 그런 자가 있었다. 회사 소속이 아닌 고관대작의 ‘기사’는 쥐꼬리만도 못한 힘을 내세워 행패를 부리기 일쑤였다. 다음의 기사를 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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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전 밤에 궁내부대신 민병석 씨가 자기 별실을 인력거에 태우고 수표교 등지로 가는데 인력거에 불을 켜지 않았다. 그 장내 순사가 인력거꾼에게 불을 켜라고 권고한즉 그 인력거꾼이 제 상전의 세를 믿고 듣지 않았다. 순사가 길을 막으며 책망을 하자 민궁대가 인력거에서 내려 불문곡직하고 자기 단장(短杖)으로 순사를 때리는 고로 두어 시간을 서로 힐난하였다.
―“야만의 행위”, 〈대한매일신보〉, 1908년 10월 2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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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8년 8월에 제정된 ‘인력거영업단속규칙’ 제10조 9항에 따라 야간에는 인력거에 부착된 제등(提燈)에 불을 켜고 다녀야 한다. 민병석의 인력거꾼은 이 법규를 위반했고, 이에 경찰이 인력거를 세우고 불을 켜라고 권고한 것이다. 그런데 한 나라의 장관인 민병석은 법을 어긴 자신의 인력거꾼을 나무라기는커녕 오히려 경찰에게 폭력을 가한 것이다. 기사를 보면 법을 어긴 인력거꾼보다 자신의 권력을 믿고 경찰에게 폭력을 가한 ‘무법자’ 민병석의 행동이 더 사회적으로 문제시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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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작일 밤에 청년회관회원 임웅재, 장한준 두 사람이 청년회관에서 사무를 보고 작일 상오 한 시에 집으로 가는데 시장하여 승동 어떤 술집에 들어가서 술을 사먹을 즈음에 어떠한 패류 두 명이 민궁대의 청직이라 자칭하며 무고히 집탈하여 장씨를 무수히 난타하고 의관을 찢어버렸다. 순사가 경찰서로 그 사람을 잡아다가 사실을 확인한즉 민궁대의 인력거꾼 박봉헌, 기성원이라더라.
―“인력거꾼 행패”, 〈대한매일신보〉, 1908년 10월 2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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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기사를 종합해보면, 민병석의 인력거꾼은 주인의 권세를 이용해 ‘공권력’은 물론이거니와 평범한 사람들의 일상을 짓밟고 다녔던 ‘무법자의 망나니들’이었다. 박봉헌, 기성원 중 한 사람이 바로 순사의 명령을 깔아뭉갰던, 그리하여 순사를 민병석의 지팡이에 무수히 얻어터지게 만들었던 그 인력거꾼이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