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문화계의 이슈메이커, 기생 

 

 

   
 

향문의 물결에 이 몸을 싣고/ 사랑의 돛대를 고요히 저어/ 화평한 우주의 자연미에 취하랴/ 멀-리 수평선을 눈에 그리며/ 한 곡조 두 곡조 화평을 노래하고/ 고요히 고요히 저으려 할 때/ 아- 얼마나 저주받던 이 몸이랴/ 벽장 같던 구름덩이 한 조각 두 조각/ 노호하는 폭풍은 사랑의 돛을 분지르며/ 저주하는 파도는 고요한 물결을 멀리 멀리 쫓아버리고/ 한 걸음 두 걸음 외로운 이 몸을/ 불운의 함정에 넣으려 한다/ 아- 얼마나 애달픈 이 몸의 운명이랴 (……)//
―옥향, “저주받은 이 몸”, 〈長恨〉, 1927년. 2월

 
   

 

1. 계몽의 적, 기생
 


모든 길은 ‘계몽의 빛’을 통과해야만 했다. 사랑도 명예도 문명도 국가도 민족도 ‘계몽의 빛’을 통과하지 않고서는 제 위상을 부여받지 못했다. 서구로부터 유입된 낯선 삶의 양식과 개념들은 개화·계몽의 이름으로 정당화되었다. 1894년부터 1910년까지 조선은 ‘개화·계몽’의 시대였다. 구시대적 삶의 양식은 대부분 척결의 대상으로 지탄받았으며, 서구적 삶의 양식과 문물들이 조선의 미래를 밝혀줄 것이라고 계몽 지식인들은 믿어 의심치 않았다.

서구와 같은 문명부강한 국민국가를 건설하는 것이 당시 계몽 지식인들의 바람이었다. 계몽 지식인들은 자신들의 이러한 바람을 실현하기 위해 과거와의 적극적인 ‘단절’을 시도했다. 계몽 지식인들이 생각하기에 과거 조선의 가장 큰 폐단 중에 하나는 ‘성(性)’에 대한 관리가 철저하지 못하다는 점이었다. 갑오개혁 때 공식적으로 폐지를 선언하기는 했지만 조혼(早婚)은 여전히 성행하는 ‘사회악’이었다. 조혼이 ‘사회악’으로 단죄 받았던 배경에는 ‘사회진화론’과 ‘인종론’ 같은 새로 수입된 이데올로기가 포함되어 있었다.

국가를 위해 헌신해야 할 소년들의 열정과 에너지가 조혼과 같은 구시대의 악습 때문에 ‘색욕(色慾)’에 낭비되고 있다는 것이 계몽 지식인들의 생각이었다. 특히 부모들 간에 협의로 성사되는 강제적인 결혼 제도인 조혼은 가정불화의 원흉이기도 했다. 이성 간의 사랑과 애정을 기반으로 하지 않은 결혼 때문에 남자들이 기생이나 매음녀(삼패 기생)를 찾기 일쑤라고 계몽 지식인들은 믿었다. 따라서 계몽 지식인들은 조혼제도의 영원한 폐지와 함께 기생과 매음녀의 척결을 개화·계몽의 중요한 과제로 삼았다. 

  

   
 

소위 기생이란 것은 관부에 매였거니와 그 외 음녀들이 각처에 많이 있어 빈부를 막론하고 어리석은 사나이들을 유인하여 돈을 뺏으며 혹 돈을 지체하면 패류들과 결연하여 무수히 곤욕을 보이고 때려서 몸이 상한 지경에 이르며 또 무뢰지배들이 남의 계집아이들을 사다가 오입을 가르친다니 이런 일은 경무청에서 마땅히 엄금할 일이더라.
―“잡보”, 〈독립신문〉, 1896년 7월 11일

 
   

 


1890년대 조선 ‘최대’의 민간 신문인 〈독립신문〉의 편집진들, 예를 들어 서재필과 같은 당대의 대표적인 지식인들이 기생과 매음녀를 비판하고, 국가 권력을 통해 이들을 엄중히 처단할 것을 주장한 것은 한편으로는 색욕에 빠진 인민의 ‘게으르고 나약한 신체’를 교정하려는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기생과 매음녀들의 위생 관리를 통해 그들과 관계를 갖는 ‘남성들의 몸’을 관리하자는 의미도 있었다. ‘성’이 관리의 대상으로 부각된 것은 우생학을 기반으로 ‘건강한 인종’을 육성하려는 열망 때문이었다. 매음은 성병을 유발하며 이로 인해 건강하지 못한 자녀가 태어나게 되고 결국 조선의 백성은 나약한 인종으로 전락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 당시의 인종 개량 담론의 핵심이었다.

 

 

 

근대 전환기에 실시된 기생과 매음녀 관리, 더 나아가 위생 관리의 목적은 ‘화류계에 정신을 허비하지 않는 대장부’, 즉 국가를 위해 기꺼이 자신의 몸을 바칠 수 있는 건강한 개인을 양산하는 데 있었다. 계몽 지식인들은 ‘풍속 개량’을 주장했다. 조선인들의 ‘건전한’ 놀이 문화를 양산하기 위해서였다. 이 주장에 따라 연흥사, 단성사, 협률사, 원각사 등의 근대식 연극장이 새로 건립되었다. 그러나 풍속 개량이라는 애초의 목적은 서서히 변질되기 시작한다.

풍속개량을 위해 만든 연극장은 정작 부랑방탕한 사람들의 집합소가 되었다. 연극장을 찾는 대다수의 남성들, 특히 나이 어린 학생들은 ‘부인석’에 앉아 있는 여성들을 구경하거나, 당시의 표현을 빌면 ‘갈보들’을 엿보기 위해 그곳을 찾는 경우가 많았다. 당시 서울에서 밀매음에 종사하는 여성들의 수는 대략 2,500여 명 정도였는데, 대부분 삼패 기생들이었다. 이들의 주요 활동 장소가 연흥사를 비롯한 근대식 극장이었다. 따라서 경시청에서는 사복 경찰을 연극장에 잠입시켜 밀매음녀를 검거하는 등, 바야흐로 밀매음과의 전쟁을 치르기 시작했다.

이처럼 국가 권력이 매음녀를 단속했던 이유는 패악스러운 풍속을 개량하려는 의도도 있었지만, 직접적으로는 성병으로부터 남성들을 ‘보호’하고 동시에 성적 욕망을 자유롭게 분출할  대상을 제거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미 통감부 정치가 실시되고 있었고, 일본의 제도를 본떠 만든 기관인 경시청 역시 통감부의 입김이 강하게 작용했기 때문에 경시청의 매음녀 단속이 순수하게 조선의 문명 진보를 위한 것이었다고는 단언하기 어렵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삼패 기생의 밀매음에 대한 경시청의 공권력 행사에 계몽 지식인들은 동조했으니, 일종의 적대적인 공모 관계를 형성한 것이었다.

비록 통감부 정책의 일환으로 경시청에서 밀매음 단속을 펼쳤지만, 조선의 계몽 지식인들의 입장에서도 그 정책에 반기를 들 이유는 없었던 것이다. 계몽 지식인들이 바랐던 것은 미미한 개인의 열정이라도 ‘애국’ 이외의 목적으로 낭비해서는 결코 안 되며, 따라서 개개인의 모든 열정은 ‘충군애국(忠君愛國)’으로 회수되어야 하는 것이었다. 물론 계몽 지식인들의 바람은 경시청의 정책 목표와는 달랐다. 그러나 이러한 상황 속에서 기생, 특히 매음에 종사했던 삼패 기생은 ‘계몽의 적’이자 ‘국가의 적’으로 지탄을 받게 되었다. 


   
 

색이라고 하는 것은 목숨을 해치는 함정이라. 요교색(夭嬌色)에 정신을 빼앗겨 밤낮 없이 교유할 제, 가정사를 불고하고 재산을 허다하게 낭비할뿐더러 기혈(氣血)까지 감손(減損)하여 명이 짧아지는 자가 허다하니, 조심할 게 이 아닌가.
―“시사평론(四戒)”, 〈대한매일신보〉, 1909년 9월 18일. 국문본·국한문본 통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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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키 2010-10-28 10: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와우, 드디어 기생 이야기가 나왔군요. 언제 기생의 문화사가 펼쳐지나 궁금했었는데^^

둥이 2010-10-28 18: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근데 기생이 사라진 직업인가?^^
명칭만 다를뿐 왠지 언젠가 본듯한데....^^텐프로던가?

이승원 2010-10-28 20: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그런가요?? 정확하게 말하면, 직업은 사라진 게 아니라 변화되는 거겠죠^^* 변사도, 전화교환수도, 인력거꾼도, 그리고 기생도.....

거리에서 2010-11-27 23: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컴컴한 극장이 왠지 달리 보입니다? 하하! 재미있네요.

비로그인 2011-04-06 11: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황진이가 지하에서 벌떡 일어나겠습니다.